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17화 (117/175)

117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열망)(4)

“끅, 잘 먹었네. 이제 입가심하러 가야지?”

“그, 그래야죠.”

“낄낄낄, 쫄기는. 걱정하지 마라. 후배한테 이렇게 얻어만 먹고 있겠냐? 케이크 좋아해? 이 근처에 와이프가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가 있는데. 갈래?”

“디저트 카페요?”

“가자. 너도 한번 맛보면 좋아할걸?”

김태연은 생각했다.

맛이고 자시고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카페에 가서 디저트를 시켜 먹는 게 창피해서 그런 거라고.

잠시 후.

“어때?”

“……와, 진짜 맛있는데요?”

“그치? 이렇게 룸도 있고. 그래서 자주 와.”

“그럴 만하네요. 아, 여기 오기 전에 물어본 건…….”

“누구였지? 뷸러였나?”

“네.”

“음…….”

“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류현이 마침내 류현이 입을 열었다.

“걔가 제일 힘들 텐데. 별다른 약점도 없고. 그나마 제구? 근데 100마일을 뿌리는 투수에게 제구가 그렇게 크게 필요한가?”

“아, 제구요?”

“그게 좀 아쉽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아예 제구가 안 되는 타입이 아니야. 그냥 좀, 덜 위력적이라는 거지.”

“다른 약점은 없을까요?”

“글쎄, 투수 입장에서야 몇 개 말해 줄 수 있지만……. 아, 그나마 좀 노려볼 만한 게 변화구?”

김태연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하며 빛났다.

“변화구가 안 좋나 봐요?”

“아니. 좋아. 엄청. 근데 좀 확 차이가 나지. 스트라이크랑 볼이랑.”

“애초에 변화구가 좋으면 볼로 던져도 헛스윙을 끌어내잖아요?”

“그래. 그래서 문제란 거야.”

* * *

부웅!

붕!

이런, 먼저 온 사람이 있었네?

LA의 원정 숙소. 론은 간단한 몸풀기를 제외한 모든 연습과 훈련을 금지시켰다.

‘그래도 숨어서 할 사람은 하지. 나처럼.’

휴식을 통한 컨디션 관리도 좋지만, 나는 몸을 조금 움직여 줘야 컨디션이 더 올라오는 타입니다.

스윙 소리가 들리는 트레이닝 룸의 문을 열자 그을린 피부의 작은 그림자가 눈에 이상한 고글을 끼고 스윙 연습을 하는 게 보였다.

“이삭, 그건 뭐야?”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스윙을 멈추는 이삭.

“후우우, 뭐야? 오늘 쉬는 거 아냐?”

“너는?”

“내가 쉬면? 팀은?”

“내 홈런으로 이기겠지. 내일 4개 칠 거거든.”

“퍽이나. 운동할 거야?”

“조금? 근데 그건 뭐야? 웬 고글?”

이삭이 벗어놓은 고글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거? 에이전트가 요즘 다른 스포츠에서 유행하고 있다면서 한번 써 보라던데? 오늘 처음 써 봤는데 괜찮아.”

“그래서, 그게 뭔데?”

“스포츠 선수용 VR. 이걸로 방금 다저스 투수들을 으깨 놓고 있었지.”

이런 게 있었었나?

‘하긴. 10년 뒤면 이런 걸 쓰고 뇌파로 게임도 할 텐데.’

“나도 한번 해보자. 줘 봐.”

“……네 꺼냐?”

“좋은 건 나눠야지. 나도 내일 홈런 칠 거 나눠 줄게. 내가 3개만 칠 테니까 한 개 가져가라.”

순순히 VR을 건네는 이삭이 내게 속삭였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오는 날, 넌 아마 죽을 거야. 우리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거든.”

어쭈? 형한테 일러? 그건 반칙인데.

고글을 받아들고 익숙하게 VR의 머리 부분 사이즈를 조절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겐 수리가 있으니까. 수리가 쉴드 직원인 거 모르지? 스칼렛 요한슨이 직속 상사인데. 오, 뭐야? 이거 괜찮은데?”

이 정도면 거의 2세대 VR급인데? 단순히 시각하고 청각으로만 이렇게…… 와우.

“괜찮지? 나도 쓰기 전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방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한번 써 봤거든. 근데 도저히 배트를 휘두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더라고.”

내 시야엔 내일 다저스의 선발투수인 워커 뷸러가 공을 던지는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따라 돌아가는 풍경들.

“진짜 괜찮네. 이 정도면 쓸 만하겠어.”

고글을 벗어 회사 이름을 찾아봤다.

“뭐야? 회사 이름이 없네?”

“아, 그거 비매품이야. 아직 정식 판매는 안 하고 있다는데? 회사 이름이 뭐라더라.”

잠깐, 설마?

“아, 그래. 헤븐, 헤븐이었어.”

맙소사.

* * *

“LA 다저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뭐야? 영어로 해.”

“별거 아냐. 그냥 경기 시작했다고.”

한국 방송을 볼 때마다 나오는 오프닝 멘트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시즌 후반에 허벅지 쪽 이상이 있어 DL에 올라갔던 워커 뷸러 선수입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었기 때문에 15일 정도의 휴식 후 포스트시즌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뷸러 선수 입장에서는 리그를 대표할 투수가 되려고 할 때마다 부상에 가로막히는 게 억울하겠네요.]

[전문가들은 투구 폼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지속해서 제기될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죠?]

[첫발이 너무 길어요. 보통 메이저리그에서는 익스텐션이라고 표현하는데, 투구 판과 공을 던지는 손 끝 사이의 거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구위에 비해 작은 체격을 긴 익스텐션으로 보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딛는 발이 커지게 된 거죠.]

[간단하게 말하자면 폼이 크다?]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익스텐션의 문제만 제외하면 나머지 폼은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렇다면 긴 익스텐션을 조금 줄이면 되지 않나요?]

[그럼 지금과 같은 구위를 포기해야겠죠.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2024년에 FA가 되는 선수인데, 그때가 되면 벌써 31살이거든요? 내구성에 문제가 있는 30대의 선발투수는 시장에서 큰 환영을 받지 못하죠.]

따악!

“파울!”

딱!

“파울!”

펑!

“볼!”

이삭은 오늘도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끈질긴 승부를 이어 가고 있다.

‘어제 그 고글이 꽤…… 후.’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나중에 하자.

“붐.”

“왜?”

마사지를 받고 왔는지, 폴리가 오른팔을 살살 돌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삭처럼 처음 본 투수의 공을 잘 커트해 내는 타자는 많지 않지?”

“그렇지.”

많지 않은 게 아니라 드물다. 상대하는 투수가 괴수 레벨인데.

“좋아. 잘됐네.”

“왜?”

“내년에 연봉조정이잖아. 우리 모두. 이삭이 많이 기대하고 있더라고.”

구단이 서비스 타임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우리보다 1년 이르게 메이저로 올라온 이삭도 우리와 같이 연봉조정 자격을 얻게 됐다.

“그러네. 그때 더블A에서 같이 있던 우리가 어느새 연봉조정이라니…….”

“이삭을 제외하고는 꽤 운이 좋은 거지. 아무튼. 이삭이 내년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오려나봐.”

아. 그래서 저렇게…….

“돈이 많이 필요하겠네.”

“그렇지. 장기계약이야 붐 네가 있어서 당장은 어려우니까. 그래서 요즘 좀 무리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좀 아쉽잖아. 친구로서.”

“이삭의 기준을 잘 몰라서 답해 주기 어렵지만……. 아마 괜찮게 받겠지. 타격 좋은 2루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축 멤버면 더 프리미엄이 붙겠지.

요즘 이삭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좋은 성적의 이유가 드러난 것 같다.

‘가족, 가족이라.’

따아악!

[이삭 페레데스 선수, 우익수 앞에 아주 깨끗한 안타를 뽑아냈습니다!]

[아, 워커 뷸러 선수의 주 무기인 슬라이더를 아주 깔끔하게 결대로 밀었어요.]

대기타석으로 나서며 3루 쪽 관중석에 앉아 계시는 부모님을 한번 쳐다봤다.

‘파이팅!’

당연한 듯 마주친 눈, 어머니는 이제는 조금 어색한 한국식 응원으로 내게 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가족, 가족이라. 그렇지. 가족도 큰 이유 중 하나겠지. 특히 이삭은.’

갱단이 나라를 집어 삼켜버린 멕시코다.

평소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같이 TV를 보며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자리를 비우는 이삭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스트라이크! 아웃!”

[페이스 달턴 선수가 낮은 커브에 삼진을 당하고 맙니다.]

[아주 좋은 공이었어요. 저런 커브를 메이저리그에선 12-6 커브라고…….]

“어때?”

“제구가 아직 덜 잡힌 거 같더군. 아래쪽에서 조금 흩어진 느낌이야.”

“알겠어. 또 다른 건?”

“표정이 별로야.”

“뭐?”

“사람을 내려다보더군. 키도 별로 크지 않은 놈이.”

거만하다?

좋은 징조네.

“복수해 줄게.”

“부탁하지.”

어느 날, 어느 때처럼 타석에 발을 박아 넣으며 다저스의 포수인 키버트 루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혹시 집안이 어렵거나, 야구가 안 되어서 죽을 거 같거나, 아니면 기타 등등의 슬픈 사연이 있나?”

“……뭐라고?”

“없다고? 알겠어. 그럼 다행이네.”

있다고 했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좌우 제구에 약하고, 존의 위아래를 잘 이용한다고 했지?’

주 무기는 슬라이더지만, 이삭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때려낸 걸로 봐선 적어도 이번 타석에서만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다.

‘패스트볼, 커터, 커브. 아, 투심도.’

패스트볼만 노린다.

[김사범 선수는 패스트볼 타이밍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죠?]

[변형 패스트볼 패키지, 포심과 투심, 커터를 모두 던지는 투수지만 완성도가 높지 않은 선수입니다. 특히 커터는 구속 차이가 거의 8마일 정도 나기도 하구요.]

[아, 꽤 차이가 나는군요?]

[최고 100마일의 패스트볼과 달리 91~2마일 정도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패스트볼 타이밍을 노린다면 어떻게든 맞춰 낼 수 있을 겁니다.]

[슬라이더와 커브는…….]

[경기 초반이지만, 슬라이더가 몰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커브 같은 경우는 아마 조금 더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던질 가능성이 크고요.]

마운드의 워커 뷸러가 공을 던졌다.

꽤 빠르게 느껴지는 패스트볼.

아마 바깥쪽 아래의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꽤 좋은 공이었을 거다.

내가 배트를 내지 않았더라면.

뻐어어억!

[워커 뷸러 선수, 김사범 선수를 상대로 제1구! 엇!]

[아, 넘어갔어요.]

[중계 카메라가 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쏘아져 나가는 타구였습니다!!]

[이건 뭐,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타구네요. 지금 그라운드의 모두가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터어엉!

내 타구가 다저 스타디움 좌중간에 설치된 전광판에 맞고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봐도 빠른 타구에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건가. 사방이 고요하다.

-우와아아…….

-우와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악!!!!

1루를 지나 2루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터진 함성.

그렇지. 이래야지.

[방금 김사범 선수의 타구 데이터가 나왔는데…… 오류가 아닐까요?]

[아닐 겁니다. 타구 속도가 132마일, 발사 각도가 17도네요. 132마일이면…… 210km/h 정도인데…….]

[방금 들어온 자료에 의하면 좌중간 전광판에 타구가 맞기까지 3초가 약간 안 되게 걸렸다고 하네요.]

홈플레이트에서 날 반기는 이삭에게 말했다.

“두 개 남았어.”

“뭐라고?”

아직도 소리를 질러 대는 팬들 때문에 잘 안 들리나 보다.

“두 개! 남았다고!”

“뭐가!”

“홈런!”

그제야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이삭.

그런 이삭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여 줬다.

“너도 한 개 쳐야 해.”

1회 초부터 2점. 내가 두 개 더 치면 적어도 4점. 이삭까지 합치면 5점.

오늘 투수진이 5점 이하로만 점수를 내주면 우리는 월드시리즈 3연승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월드시리즈에서 3연승을 거둔 후 리버스 스윕을 당한 팀은…… 없다.

“정말로?”

“왜?”

“정말 나도 하나 쳐야 하냐고.”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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