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16화 (116/175)

116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열망)(3)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우리는 왜 우승에 집착하는 걸까?’

누군가는 말한다. 프로구단이면 우승을 목표로 삼는 게 당연한 거라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프로선수라면 크게 지고 있는 경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향해 뛰어야 한다고.

음……. 왜? 우리가 이 야구라는 스포츠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잘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대리만족이잖아.”

내 두서없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수리가 말했다.

“나도 그랬는데 뭐. 난 나무막대기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지름 6센티짜리 공을 그렇게 쉽게 넘기지 못하니까. 심지어 그 공이 웬만한 자동차보다 빠르고.”

“음…….”

“돈키호테 같지 않아? 나무창 하나 들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옆에서 보면 비슷해. 둘 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거 같거든. 하지만 야구선수들은 그 어려운 일을 30퍼센트 가까운 확률로 해내잖아?”

“그렇지.”

돈키호테라.

그러고 보면 바닥을 기었던 때에도 타격이란 행위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내 연습 부족과 실력을 탓했을 뿐이지.

“난 야구선수들의 뇌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그 어려운 걸 수많은 연습을 통해 결국 해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 자기도 분명 처음엔 그랬을 거야.”

“그랬을까?”

“당연하지, 성공이 당연하지 않은 스포츠니까 더.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거겠지. 자기의 성공뿐만 아니라 이 야구라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향해.”

“음…….”

그리고 그 욕구가 쌓이다 보면…….

“물론, 자기는 돈키호테라기엔 너무 강하지만. 하하핫!”

아니다.

난 강한 사람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도 내 몸을 상해 가면서까지 야구란 운동에 집착했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그 집착 때문에 32살, 은퇴를 결심했던 그때 내 몸 상태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야구선수로서 많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들어갈까?”

“응? 응.”

이제야 미기의 마음이 와닿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랬겠지. 야구선수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다 해봤지만…… 우승이라는 단어가 주는 열망은 거부할 수 없었을 거다.

그 시절, 내가 타격에 대해 가졌던 열망처럼.

“수리, 나 사실 조금 나태해져 있던 거 같아.”

“응?”

“아니, 나태보단…… 그냥 좀 식었었네. 생각보다 너무 편하고 쉬워서 식었어. 소중함이 없어진 거지.”

“잘하고 있잖아.”

“잘하지만, 그저 잘만 하고 있던 거지. 고마워.”

돌아가자. 예전 그때로.

내게 던지듯 주어진 한 번의 타석이 너무나 소중하던 그때로.

* * *

2차전이 열리는 코메리카 파크.

“이곳 메이저리그에서 연승이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론의 질문에 모두들 ‘저게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21연승, 그리고 8연승. 3배 가까이 차이나는 숫자인데 우린 더 주목받고, 더 대단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언론에선 이미 우리를 1999년 양키스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족하나? 지금의 우리에게? 겨우 8연승을 하고?”

- No, boss!

“난 항상 이기고 싶다. 이 콜로세움의 마지막 승자가 되고 싶다는 뜻이지. 불멸의 기록과 함께.”

론이 열망하는 건 저건가?

승리에 대한 욕심, 그리고 특별한 기록들. 최고의 팀을 이끄는 감독이, 아니. 팀을 최고로 만든 감독이 되고 싶다는 욕망.

“나가자! 나가서 내게,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와!”

- Yes, boooooooss!

월드시리즈 2차전이 시작됐다.

* * *

“형님, 그럼 커쇼는요?”

“커쇼? 음…… 익숙해져야지.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익숙해진다고요?”

“구위야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아니 애초에 커쇼 공 좋은 건 다들 알고 있잖아? 이중키킹이 문제인데……. 그럼 답은 하나지.”

“오래 봐야 한다?”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 * *

[이삭 페레데스 선수, 1회 말부터 커쇼 선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군요.]

[벌써 7구째입니다. 경기 첫 타자부터 이렇게 나오면 선발투수들은 정말 진이 빠지죠.]

“타이밍 잡기가 어렵긴 하네요.”

“저게 커쇼의 능력이지. 어릴 땐 그래도 제법 일정하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뭐 저렇게 던지면서도 조금씩 타이밍을 바꾸는 거 같은데?”

“보크 아니에요?”

“알면서 넘어가는 거지. 커쇼니까.”

바꿔 말하면 커쇼가 보크가 선언되지 않을 선에서 자신의 투구 폼을 컨트롤한다는 이야기다.

“이삭이 아주 잘해 주고 있네요. 타석에 들어서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눈에 익었어요.”

“아. 그렇지. 꼬마가 잘해 주고 있어.”

커쇼를 상대하기 위한 첫 번째.

투구 폼 익히기.

혹은 앞에 주자가 나가 있어도 된다. 셋업 포지션에선 저 이중키킹을 하지 않으니까.

“파울!”

8개째? 맞나?

이삭의 눈빛에서 독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커쇼 선수가 바깥쪽 떨어지는 커브로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구위 때문에 이제 커쇼 선수를 압도적인 첫 번째 투수로 꼽는 사람들은 적어졌지만, 그래도 커쇼 선수입니다. 가지고 있는 구종 3개가 모두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거든요.]

“아오! 조금만 더 하면 하나 올 거 같았는데!”

이삭이 울분을 토하며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어때?”

“처음엔 타이밍을 잘 못 잡았는데, 음. 그래도 몇 번 보니까 익숙해지긴 했어.”

“그래?”

“익숙해지자마자 템포를 바꿔서 다시 헷갈리긴 했지만.”

“음, 패스트볼은?”

“다른 투수들보다 한 개는 더 높게 들어와.”

“오케이.”

이삭이 말해 준 포인트를 머리에 쑤셔 넣으며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페이스도 버틸 만큼 버텨 주겠지.’

정교한 타격을 하는 친구는 아니지만, 치기 좋은 공을 보는 눈은 있으니까.

그리고.

[힛 바이 피치, 사구입니다. 유니폼 끝에 살짝 스쳤네요.]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나와 항의를 해보지만, 판정이 번복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2구 만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으면서 다시 페이스를 찾을 것 같았는데요. 아쉽습니다.]

‘주자 1루, 원아웃이라.’

좋은 투수를 상대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선 선택지를 좁히는 게 중요하다.

특히 이렇게 모든 공이 좋은 타입의 투수면 더더욱.

그리고, 커쇼는…… 불리한 카운트에서 커브를 거의 던지지 않는 투수다.

‘우타자를 상대로 초구에 커브를 던질 확률은 7%, 투수에게 불리한 카운트에선 1%.’

체인지업이야 거의 봉인한 구종이니 제쳐 두고. 결국 내가 초구에서 노릴 구종은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둘 중 하나라는 소리.

“컨디션 어때? 디트로이트의 밤은 평온했나?”

타석에 들어서 포수에게 말을 걸며 원래 위치보다 조금 더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매연 가득한 곳에서 잤더니 머리가 지끈거려. 네 입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거든.”

와, 이건 상처인데?

“그러니까…….”

“그만, 정말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조용히 해 줘. 진심이야.”

아오.

졌다.

이건 졌어.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커쇼로 가득 채웠다.

패스트볼이면 공 한 개 반쯤 위를 노리고 휘두를 거고, 슬라이더면 꺾이는 도중을 노려 휘두를 거다.

커브? 체인지업?

반 템포 늦춰서. 가능하다면.

[커쇼 선수가 김사범 선수를 거르진 않을 겁니다. 벤치에서도 사인이 나오지 않을 거고요.]

[리그를 지배하던 투수의 자존심 같은 건가요?]

[기본적으로 모든 타자들을 잡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올라갈 수 없는 자리니까요.]

[두 선수의 대결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탁!

“파울!”

아. 후, 아쉬운 타구다.

분명 한 개 반 위를 휘둘렀는데…….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해서인지 살짝 아래쪽에 맞았다.

‘한 개, 한 개로 줄이자.’

스트라이크를 하나 먹으며 늘어난 선택지.

패스트볼, 커브, 슬라이더. 슬라이더가 올 확률이 제일 높지만 나머지 공들도 적은 확률이 아니다.

페이스를 바라보다 갑자기 던진 2구.

가운데 높은 존으로 힘없는 공이…….

‘그럴 리가!’

“볼!”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공. 커브였다.

1-1, 내게 보여 주지 않은 공은 이제 슬라이더 하나.

하지만 나라면…….

따악!

[김사범 선수! 커쇼 선수의 패스트볼을 받아 쳤습니다!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타구!]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던 거 같죠? 1루 주자는 안전하게 3루까지, 김사범 선수는 2루에 들어옵니다.]

결정구로 사용하기 위해 슬라이더를 아껴 둘 거 같다는 생각이 적중했다.

예상 외로 많은 공을 던진 1회, 어려운 타자를 만나 최소한의 공으로 잡아내고 싶었을 테니까.

그리고 타석엔 미기가 들어왔다.

상처 입었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맹수.

타악!

“파울!”

아. 저러면 안 되는데. 차라리 배트에 공이 맞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가 왼손을 잡고 괴로워하고 있네요.]

[슬라이더가 배트 끝에 맞으면서 손이 울렸나 봅니다. 간혹 가다 저럴 때가 있죠.]

[느낌이 어떤가요?]

[음…… 별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하하. 대구 사투리로 말해도 될까요?]

[아 네, 뭐. 시청자분들도 이해하실 겁니다.]

[‘우리~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정말 우리우리하죠.]

[아하하하…….]

론의 지시로 타격코치와 의료진이 빠르게 달려 나와 스프레이를 뿌렸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계속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미기.

다저스의 배터리가 사인을 나누는 사이, 미기와 눈이 마주친 나는 몸짓으로 괜찮냐고 물어봤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미기.

바로 그때.

“타임!”

갑자기 타임을 외치며 덕아웃에서 나오는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

“저기 2루 주자가 사인을 훔치는데 도대체 왜 제재를 하지 않는 거요?”

뭐?

“갑자기 무슨…….”

심판도, 나도, 미기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 2루 주자가 카브레라에게 신호를 주는 걸 나만 봤나? 심지어 카브레라는 고개도 끄덕이던데?”

아.

“그만. 내가 볼 땐 그런 상황은 없었습니다.”

오해할 만하네.

“내가 분명 봤다니까!”

“……그만하시죠. 경기 보고서에 올릴 테니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추후 징계가 내려질 겁니다.”

아우 씨, 쪽팔려.

따악!

* * *

[LA 다저스, 디트로이트에 2연패. 1회 1사 2, 3루 위기를 잘 넘겼지만 5회에 와르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붐, 홈런 두 개로 팀 타점의 절반을 책임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6 - 1 LA 다저스. 커쇼, 또다시 ‘kershawing’ 하다.]

[5이닝 4실점. 다저스의 에이스는 어디로?]

[커리어 첫 포스트시즌 완투승을 거둔 케이시 마이즈, ‘경기 후반 힘이 빠졌을 때 잘 이끌어 준 페이스에게 감사.’]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디트로이트는 비열한 팀이다. 사인을 훔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 그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오늘 경기, 사인 훔치기 논란이 나왔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사인, 훔쳤나요?”

너무 단도직입적인데?

“아뇨. 훔치지 않았습니다. 단지 미기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뿐이었어요. 물론 상황이 오해받을 만한 상황이라는 건 이해합니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의 오해다?”

“그렇죠. 저는 사인을 훔치지 않습니다. 혹시나 우연히 훔쳤더라도 미기에게 알려 주진 않아요.”

“네?”

“미기는 그런 방법으로 타석에서 성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제게 있어 미기는 위대한 타자고, 전 제 손으로 제 우상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요.”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 샤워를 하고 나온 내게 미기가 말을 걸었다.

“내가 훔친 사인도, 받은 사인도 많은데?”

그냥 미기가 왼손에 부상이 있는데 그게 걱정되어서 그랬다고 말했어야 하나?

“제발, 제 우상으로 남아 줘요. 환상이 깨지려고 하니까.”

“그래?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그런가?”

거기서 그게 왜 나와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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