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김사범, 2021시즌(폭탄 돌리기)(4)
[캔자스시티 로얄즈.
혹자(보통 캔자스시티의 팬)는 메이저리그에 남은 유일한 남자의 팀이라고 부르는 이 팀은 특이한 리빌딩 전략으로 유명하다.
보통 어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며 튀어나온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고, 이렇게 모은 유망주가 차례차례 메이저 레디가 되는 시점에 맞춰 한두 명의 FA를 영입하여 대권에 도전하는 게 일반적인 메이저리그 팀의 리빌딩 방식인데, 캔자스시티는 조금 다르다.
몇 년에 걸친 탱킹과 트레이드로 드래프트 상위 픽을 모으고, 그 픽으로 코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를 한 번에 지명, 그 후에 그들을 같이 성장시키는 방식.
이 방식을 처음 도입한 데이튼 무어는 수많은 욕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전략을 고수했고, 이는 29년 만에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림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번 시즌은 데이튼 무어가 진행한 2번째 리빌딩이 시작되는 시즌이었다.
64승이라는 저조한 승률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팀에 응원을 보내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어느새 선수단의 리더로 성장한 윗 매리필드는…….]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오늘 상대할 캔자스시티에 대한 칼럼을 읽고 있는 내게 케이시가 다가와 말했다.
“뭐 그냥, 심심풀이. 컨디션은 어때?”
“좋지. 아주. 방금 ‘붐의 의자’에서 명상을 했거든.”
“아 좀…….”
내 안식처였던 버스 의자는 원래 자신의 자리가 아닌 덕아웃 한쪽에 자리 잡게 됐다.
“농담이야. 슬슬 가자고. 아까부터 페이스가 널 찾는 것 같던데?”
“그래, 가야지.”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긴장감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적당한 긴장감과 약간의 부담감.
오늘의 컨디션은…… 좋다.
* * *
1회 초, 캔자스시티의 공격은 시미즈의 공에 완벽히 가로막혔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새로운 캔자스시티라는 거지?’
음…… 이렇게 돌아오게 되면서 가끔 씁쓸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 같은 경우일 거다.
꽤 오랜 시간, 5년 가까이 진행한 캔자스시티의 리빌딩은…… 실패한다.
그들이 코어로 삼은 유망주들은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리더로 삼을 윗 매리필드는 내후년에 FA로 팀을 떠나게 될 거니까.
‘아마 내셔널리그 쪽으로 갔을 텐데…….’
그런 이유로, 지금 저기 마운드에 서서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저 투수가 좀 안타까우면서도 고맙다.
[1회 말, 김사범 선수로부터 디트로이트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캔자스시티의 선발 투수는 잭슨 코워, 이번 시즌 29경기에 등판해서 5승 12패. 평균자책점은 4.2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캔자스시티의 네드 요스트 감독이 고의사구는 없다는 인터뷰를 했는데, 과연 그 말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볼!”
오. 꽤 날카로운 패스트볼이 몸쪽으로 붙어서 들어왔다.
‘떨어지라는 거지?’
[아. 쉽게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 같은 공이였습니다. 홈플레이트에 가깝게 붙어 있는 김사범 선수에게 몸쪽 패스트볼을 던졌죠?]
[초구 몸쪽 패스트볼, 무슨 의미인가요?]
[고의사구가 아닌 경우, 보통 바깥쪽으로 많이 벗어나는 유인구로 타자를 내보냅니다. 김사범 선수도 그걸 염두에 두고 바깥쪽으로 오는 실투를 받아치기 위해 플레이트에 바싹 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아, 그렇다면 붙지 말라는 위협구를 던졌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클리블랜드와 달리 쉽게 1루를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운드 위, 날 바라보는 투수의 눈빛은 여전히 사납다.
나도 마주 노려보면서, 타석에서 나와 장갑을 고쳐 끼기 시작했다.
‘최고 97마일, 평균 94마일의 패스트볼, 디셉션은…… 아직 모르겠고, 체인지업이 주 무기랬지?’
경기 전, 상대에 대한 자료를 머릿속에 넣어놓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런 자료를 보지 않고도 성적을 내는 괴물들도 많은 곳이지만..
탁!
“파울!”
아.
몸쪽 패스트볼 - 바깥쪽 슬라이더. 마치 야구의 정석에 나올 법한 볼 배합이었는데.
생각보다 슬라이더가 더 휘어 나가는 바람에 배트 끝에 맞아 버렸다.
- 붐! 붐! 붐! 붐!
인제야 관중석의 팬들도 분위기를 읽은 것 같다.
“다음은 존에서 떨어지는 체인지업, 맞지?”
“맞아. 알고도 못 치는 체인지업이 뭔지 보여 주지.”
요즘 들어 맛 들인 포수와의 대화(이것 말고는 타석에서 할 게 없었다.)를 시도해 봤지만, 저기 투수와 마찬가지로 올해 처음 콜업 된 이 포수는 나와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후웅!
“스트라이크!”
‘아, 제길. 진짜 체인지업이야?’
“어때? 좋지? 알고도 못 치는 공이라니까.”
포수가 자신할 만한 공이었다. 완벽하게 속도를 죽인 체인지업은 아니었지만, 패스트볼과 꽤 비슷한 폼에서 나오는 서클 체인지업.
‘살짝 스크류볼 느낌도 나고.’
“좋네. 좋아. 이제 자신 있어. 한 번 더 던져 보라고.”
“아쉽게도 한 타자에게 한 번만 보여 주는 공이라, 이번에 삼진 당하고 들어가면 다음 타석에서 보여 준다고 약속할게.”
하. 이 자식.
입 잘 터네.
“스트라이크! 아웃!”
[아, 김사범 선수, 첫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4구째 높은 패스트볼에 크게 돌려 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높게 들어왔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김사범 선수, 아. 그런 김사범 선수에게 덕아웃의 팀원들이 의자를 가져다주네요.]
[저게 ‘붐의 의자’인가요? 김사범 선수,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결국 앉고 맙니다. 아하하, 머리를 좀 식히라는 의미겠죠.]
“붐의 의자!”
“붐의 의자!”
“붐의 의자!”
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너무 슬프다.
만약 영어가 내 모국어였다면 여기 내 주위를 돌며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 이놈들에게 좀 더 현란한 욕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붐의 의자!”
후.
우드드득.
“으억! 왜 나만 가지고!”
원래 어그로는 마지막 딜을 넣은 사람이 가져가는 거다, 이 미친 소야.
* * *
5회 초가 끝나고, 캔자스시티의 덕아웃.
“코워, 가끔 난 두려워.”
“무슨 소리야?”
포수 장비를 벗으며 오늘 선발 투수인 코워에서 말을 거는 M.J 멜렌데즈.
“네 체인지업이. 벌써 시즌 72홈런을 때리고 있는 타자를 두 번이나 잡았잖아?”
멜렌데즈의 말이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는 코워.
“두 번째 타석은 슬라이더였어. 거의 넘어갈 뻔했고.”
“거의 넘어갈 뻔한 거지, 넘어간 건 아니잖아? 결국 승자는 너야.”
“자, 그럼 날 진짜 승리자로 만들어 줘. 팀이 아직 지고 있다고.”
“좋지. 기다려. 널 진짜 승리투수로 만들어 줄 테니까.”
팀의 에이스가 될 자질을 가진 투수와 주전 포수가 서로를 보며 키득대고 있을 때, 캔자스시티의 감독인 네드 요스트는 옆의 투수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야.”
“맞습니다. 생각 외로 코워가 잘 막아 내고 있군요. 3실점도 상대방 포수가 실투를 잘 노려 때려낸 거고.”
“붐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한 거지.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데 말이야.”
“네?”
“모든 타자가 매 타석에서 성공한다면, 이 스포츠를 볼 필요가 없지 않나? 저 괴물 같은 녀석도 결국 세 번의 기회 중 두 번은 실패하잖나.”
“아, 맞습니다.”
“올해야 루키들이 적응하는 기간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내년엔 저기 타이거즈의 위치에 우리가 올라설 수도 있겠어. 재미있겠군.”
2014년, 그리고 2015년에 디트로이트와 벌인 레이스를 떠올리는 네드 요스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일단 타자들에게 좀 더 집중하라고 하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로 그때,
“자자! 애송이들! 모두 집중!”
휘익!
윗 메이필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치자, 자유분방하게 앉아 있던 선수들이 휘파람과 함께 주목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숙제는 다 했나? 내가 볼 땐 카릴을 제외하고 숙제가 밀린 것 같은데?”
“아직 경기가 중반밖에 안 지났어요!”
“두 타석이면 충분하죠!”
익살스러운 말투로 선생님을 흉내 내는 윗의 말에 한두 마디씩을 덧붙이는 캔자스시티의 선수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윗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나가서 저기 저 일본인 투수를 부숴 버리자고! 코워가 던진 만큼은 해야지?”
“Roger, Sir!”
누군가의 장난스런 대답이 곧 덕아웃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드 요스트가 타격 코치를 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안 해도 될 거 같군. 윗이 좋은 선수가 됐어.”
“맞습니다. 아주 좋은 선수죠.”
“이제 몇 타석만 넘기면 우리는 성공한 경기를 치룬 셈이군. 끝까지 집중해 주게.”
그의 시선이 유격수 자리에서 땅을 고르고 있는 덩치 큰 동양인에게 머물렀다.
* * *
후회한다.
정말 후회한다.
‘내가 왜 그 의자를 들여온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지?’
내가 삼진 혹은 범타를 날릴 때마다 난 그 의자에 앉아야 했고, 덕아웃의 동료들은(마지막엔 미기까지) 내 주위를 돌며 ‘붐의 의자!’를 외쳐 댔다.
이 정도면 날 상대로 인생투구를 보여 주는 저 투수보다 우리 팀원들이 더 미울 지경이다.
딱!
깊은 타구를 백핸드로 잡아 스텝을 따로 밟지 않고 1루에 송구했다.
“아웃!”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올리면서 외야수에게 투아웃임을 다시 주지시켰다.
곧 내 타석이 돌아온다.
만약 그때까지 저 투수가 마운드를 지키고 있다면, 합법적인 방법으로 저 녀석을 두들겨 패 줄 거다.
‘저 녀석이 잘 던지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 후에 저 의자를 내 손으로…….
따악!
“붐!”
발이 빠른 캔자스시티의 1번을 막기 위해 깊게 수비하고 있던 내게 이삭이 글러브로 공을 토스했다.
‘부숴 버려야지!’
“아웃!”
[아, 이닝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올라갔습니다! 카릴 리 선수가 센터 방향으로 좋은 땅볼 타구를 날렸지만…….]
[시프트를 통해 자리를 잡고 있던 이삭 선수의 슬라이딩 캐치가 돋보였죠. 역동작이었기 때문에 일어나서 송구하면 늦다는 판단 또한 아주 좋았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백업 플레이도 아주 좋았죠. 이삭 선수의 글러브 토스를 오른손으로 잡아 바로 바로 송구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내야 수비가 아주 솔리드합니다. 다른 팀의 키스톤 콤비가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수비를 매 경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경기는 5회 말로 넘어갑니다. 김사범 선수가 이번엔 안타, 혹은 홈런을 때릴 수 있을까요?]
* * *
체인지업은 결국 좋은 패스트볼이 같이 있어야 빛나는 구종이다.
아무리 그 무브먼트가 현란하더라고. 체인지업 자체가 의도적으로 공의 속도를 줄이면서 이득을 보는 구종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리 체인지업을 주 무기로 삼아도 그 비율이 높거나 예상이 가능하면…….
따아아악!
넘어간다는 거지.
왼손의 배트를 스냅을 이용해서 화려하게 공중으로 던졌다.
“쯧!”
건방진 공을 가진 한 놈은 보냈고.
이제 나머지를 응징할 시간이군.
펑! 퍼벙!
- 우와아아아아아아!
- Let's get it Boom! Boom! Boom!
[김사범 선수가 마침내 73호 홈런을 담장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투수가 고개를 완전히 꺾을 정도로 완벽한, 높은 포물선의 타구!]
[생각보다 훨씬 일찍 나왔네요. 이제 남은 건 유일한 기록을 세우는 겁니다. 대단하네요, 대단해요. 코메리카 파크는 지금 흥분과 경악으로 펄펄 끓고 있습니다.]
홈플레이트를 밟고, 다가온 이삭에게 말을 건넸다.
“이삭, 넌 나가. 뒤지기 싫으면”
“뭐?”
뜬금없는 내 말에 의아해하는 이삭.
“그런 게 있다.”
가끔, 아주 가끔 한국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한국이었으면 바로 ‘고맙다, 사범아’가 나왔을 텐데.
덕아웃에 들어서서, 환호와 희열에 빠진 화상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누가 의자에 앉을 차례지?”
[캔자스시티, 디트로이트에게 9-0 패배, 디트로이트는 시즌 112승으로 기록에 4경기를 앞둬.]
[디트로이트의 붐, 배리 본즈의 73홈런 기록에 도달. 남은 경기는 14경기.]
[붐, ‘73개의 홈런은 아직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곧 의미 있는 숫자로 만들 것.’]
[캔자스시티의 네드 요스트 감독, ‘코워는 잘 던져줬다. 붐을 상대로 그 정도의 배짱을 보여 줄 수 있는 투수는 많지 않다.’, ‘붐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은 타자’]
[5회 말, 디트로이트의 덕아웃에서 무슨 일이? 차례대로 의자에 ‘던져진’ 디트로이트 타자들.]
[12경기 만에 본인의 출루 기록을 실패한 이삭 페레데스, ‘나만 붐의 의자에 앉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며 아쉬움 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