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96화 (96/175)
  • 96화 김사범, 2021시즌(올드스쿨)(3)

    양키스는 DL에 올라간 선수들을 대신해서 마이너에서 콜업한 녀석들 혹은 백업으로 라인업을 채웠다.

    저기 저지 대신 서 있는 녀석도 마찬가지고.

    [타석에 에스테발 플로리얼 선수가 들어섭니다.. 올 시즌 저지 선수의 백업으로 나오면서 쏠쏠한 활약을 하고있는 선수죠?]

    [중장거리 히터로 홈런보단 빠른 발을 이용해서 2루타를 만드는 타입의 타자입니다.]

    어제 벤치 클리어링에서 살아남은 애런 힉스를 2번으로 두고 대신 1번으로 세울 만큼 충분히 괜찮은 백업 외야수.

    시즌 타율이……. 2할 9푼? 출루율은 좀 좋았던 것 같다. 3할 후반대였으니까.

    ‘백업으로 나온 타자도 웬만한 하위권 팀의 주전 외야수 수준이네. 이런 팀이 왜 지구에서 탬파베이에 밀려 2위를 하고 있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게 온 연습구를 스튜어트에게 돌려주자 마자 1회말이 시작됐다..

    [디트로이트의 선발 투수는 케이시 마이즈 선수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투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기 중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투수인데요. 이 웃음이 의미하는 건 아마…….]

    “볼!”

    케이시의 초구, 슬라이더가 타자의 몸쪽 높은 코스로 들어갔다.

    타석에 있던 에스테발…… 누구의 몸이 확 젖혀질 정도로 바싹 붙인 공.

    굳이 직구로 맞불을 놓지 않는, 훨씬 세련된 방법이다. 물론 양키스가 그랬다면 아주 비열한 방법이었겠지만.

    “휘익-”

    “똑바로 던져!!”

    “F#@## Son Of B*#(@!”

    관중들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타석의 녀석과 페이스가 몇 마디 말을 나누는지 살짝 지연되는 경기. 하지만 곧 타석에 들어서면서 충돌 없이 경기가 진행됐다.

    “스트라이크!”

    오늘도 케이시의 스플리터는 춤을 추고 있다.

    따악!

    내게 오는 공을 가볍게 잡아 1루로 뿌린다. 타구가 빨라 조금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강하게.

    뻐억!

    “아웃!”

    뭐. 그냥 간단하게 내 심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어차피 우리 팀 1루수들은 나 때문에 수비장갑을 2개씩 끼고 나오니까.

    [플로리얼 선수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됐습니다, 다음 타석은 애런 힉스.]

    그러고 보니. 오늘 양키스의 타선도 우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에스테발 플로리얼 - 애런 힉스 - 미겔 안두하 - 지안카를로 스탠튼 - 글레이버 토레스로 이어진 라인업은 저지와 스탠튼이 1, 2번 혹은 2, 3번으로 나왔던 예전의 라인업보다 훨씬 올드한 느낌이었으니까.

    ‘아마 분위기도 10년 전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높겠지.’

    3루에서 홈으로 대시하는 주자가 포수를 밀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포수는 그런 타자의 진로를 막고 앉아 타자를 깔아뭉개려 했던 그때처럼.

    병살을 막기 위해 때로는 베이스가 아닌 2루수나 유격수의 무릎으로 슬라이딩을 할 수도 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양 팀 모두 삼자범퇴로 끝난 이닝.

    양키스는 모르겠지만 우리 덕아웃은 아주 활발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있다.

    “좀 더 지켜봐! 아니, 붐 말고!”

    “오늘 저 녀석들이 허튼짓을 하면 바로 말하도록. 감독님이 샷건을 들고 올라갈 준비를 마쳤어.”

    “몸쪽 공을 잘 이용하는…….”

    불타는 덕아웃. 이런 분위기도 아주 좋은데?

    시끄러운 덕아웃을 뒤로하고 타석으로 향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죠. 4번타자로 출장한 김사범 선수와 김병헌 선수의 맞대결입니다.]

    [두 선수의 시즌 성적을 살펴볼까요? 김사범 선수는 3할 5푼 2리의 타율과 5할 2푼의 출루율, 8할 8푼의 장타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청자분들이 아시다시피 67홈런을 기록하고 있죠. 타율 부분을 제외하곤 모두 메이저리그의 양대 리그를 통틀어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병헌 선수는 오늘 경기 전까지 29경기에 등판하며 15승 7패. 183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은 3.24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선수 모두 대단하지만, 김사범 선수의 역대급 시즌에는 김병헌 선수가 조금 못 미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래도 메이저리그 상대 전적에서는 1타수 무안타로 김병헌 선수가 앞서 있네요. 하하.]

    [김병헌 선수 앞에선 0할 타자가 된 김사범 선수입니다.]

    타석에 들어서며 김병헌을 보고 웃어 줬다.

    마운드에서 마주 웃어 주는 김병헌.

    서로가 서로를 보고 웃고 있지만…….

    ‘날 먹잇감으로 보고 있는 건가? 지금의 날 보고도?’

    우리 둘의 웃음과 눈빛은 분명 닮아 있을 거다.

    둘 다 서로를 먹어 치워 버리길 원하고 있으니까.

    오랜만에 느껴지는 호승심. 이 녀석을 만나면 항상 느끼는 감정이다.

    예전의 열등감을 벗어던진 건 오래전이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커리어 차이가 확실하니까.

    이제 반대로 그럴싸하게 성장한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시간이다.

    “어디가 좋아? 엉덩이? 팔? 머리? 말만 해. 그대로 사인을 내줄 테니까.”

    어제 부상을 당한 게리 산체스 대신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는 앤서니 시글러가 내개 말을 걸어왔다.

    “주둥아리 닥치고 사인이나 내. 그 상태로 집어 던져서 외야에 처박아버리기 전에.”

    “뭐?”

    “그만. 더 이상 내게 인내심을 요구하지 말게.”

    어제의 벤치 클리어링과 1회 초반의 신경전 때문에 예민한 구심의 한마디에 우리 둘은 입을 다물었다. 좋은 일이지.

    이 승부에 쓸데없는 엑스트라가 끼어드는 건 싫다.

    저 포수의 역할은 그저 김병헌의 공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김병헌 선수가 크게 와인드업을 합니다! 초구!]

    빠아악!

    [첫 타구부터 큽니다! 이 공이 외야로! 외야로! 아…… 마지막에 오른쪽으로 휘면서 폴대 밖으로 휘어져 나갑니다.]

    ‘내 예상을 벗어나질 앉는군. 단순하긴.’

    저릿저릿한 손을 푸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괜히 타석에서 나와 장갑을 다시 매만졌다.

    [초구부터 99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던져 본 김병헌 선수지만, 김사범 선수가 이미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적으로도 꽤 인연이 있는 선수들 사이에선 이런 상황이 나오기도 하죠.]

    [서로를 잘 알다 보니 그런 거겠죠?]

    타석으로 들어선 내게 김병헌이 입모양만으로 무언갈 말했다.

    ‘밀.렸.냐?’

    나도 대답해 줘야지.

    ‘쫄.았.냐?’

    갑자기 이를 악물며 투구를 시작하는 녀석. 진짜 쫄았나 본데?

    “파울!”

    “볼!”

    “파울!”

    “파울!”

    “볼!”

    [아. 치열한 승부입니다. 2-2의 카운트!]

    [아 이건…… 음…… 일단 타석이 끝나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이 타석이 어떻게 끝날지.

    어때? 자신 있어?

    으드드득.

    마운드 위에서 이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빠아아악!

    [김병헌 선수의 공이 홈플레이트가 아닌 담장을 넘어갑니다! 1:0! 김병헌 선수를 상대로 앞서나가는 홈런을 쳐낸 김사범 선수!! 시즌 68호 홈런을 때려냅니다!]

    [아까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지만, 파울 타구 자체가 뒤로 넘어가는 공이 없었어요. 타이밍의 문제였던 거지 구위를 못 이겨 낸 타구가 아니었거든요. 대단합니다. 홈런 생산 능력 하나만큼은 이미 역대급 선수가 됐어요.]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멍하니 서 있는 앤서니 서글러에게 말했다.

    “네 투수에게 전해. 배팅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걸 뺏는 거라고. 그걸 못하니 내게 이렇게 처맞는 거지. 쯧.”

    과연 녀석이 김병헌에게 이 말을 전할까?

    뭐, 전하지 않더라도 다음 타석을 위한 밑밥 정도는 되겠지.

    * * *

    잠시 뒤, 양키 스타디움.

    타다다다닥.

    “야, 홍기자야.”

    “지금 2보 작성 중이에요. 집중 중이니까 기다려 봐요.”

    [김사범, 김병헌 상대로 솔로 홈런 ‘쾅!’

    - 뉴욕 양키스와 디트로이트의 시즌 6차전, 어제의 벤치 클리어링 이후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김병헌과 김사범의 승부가 펼쳐졌다.

    7구에 걸친 치열한 승부 끝에 먼저 승기를 차지한 건 김사범.

    김병헌이 던진 몸쪽 컷 패스트볼을 그대로 당긴 타구가 양키 스타디움 좌측 담장을 넘기면서 김사범은 시즌 68호 홈런을 기록했다.

    김병헌은 이 홈런에도 굴하지 않고 이후 7타자를 모두 범타 혹은 삼진으로 잡아내며 홈런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한편, 양키스의 타선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케이시 마이즈를 상대로 매 이닝 출루에 성공했지만 타선의 응집력 부족으로…….]

    “야, 지금 그걸 쓸 데가 아니라니까?”

    느낌이 온 듯, 신들린 속도로 타이핑을 하고 있던 남자를 계속해서 부르는 일행.

    “아, 뭔데요? 선배, 우리 초치기로 사는 사람이잖아요. 국내에서 중계 보고 올리는 놈들보다 늦으면 편집장님에게 얼마나 욕을 먹는지…….”

    빠악!

    누가 봐도 홈런임을 알 수 있는 거대한 타구가 양키 스타디움의 외벽을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그거 볼 때가 아니라고 했잖아. 김사범, 또 넘겼다.”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한발 늦게 들려오는 중계음.

    [김병헌 선수의 4구 체인지업을 그대로 받아쳐 넘기는 김사범 선수! 자신의 69호 홈런을 장외홈런으로 장식했습니다!]

    “선배! 어떻게 된 거예요?”

    “쯧. 몸쪽 빠른공 스트라이크, 바깥쪽 투심 스트라이크. 몸쪽 빠른공 조금 깊어서 볼. 아슬아슬하게 맞을 뻔했는데 김사범이 안 피했어. 마지막으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몸을 숙여서 받아쳐서 홈런. 다 적었냐?”

    “카브레라는요?”

    “초구에 포수 플라이.”

    “오케이.”

    다시 한 번 키보드를 넘나드는 홍기자의 손가락. 쉼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바라보던 선배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야, 홍기자야.”

    “아 왜요! 김사범 또 나온 거 아니죠? 그럼 좀 이따 말해요!”

    타다다다닥.

    “아니, 지금 연타석 홈런이잖아.”

    “그럼 뭐 지금 7회예요? 당연히 연타석이죠!”

    타다다닥.

    “그럼 지금 3연타석 홈런이다. 어제 벤치 클리어링 때문에 퇴장당하기 전 타석에서 홈런 쳤었잖아.”

    타닥.

    “어? 그러네요?”

    “메이저리그 연타석 홈런 기록이 4타석 맞지?”

    “맞을걸요? 잠시만요.”

    바로 메이저리그 레퍼런스 사이트에 접속해 정보를 찾아낸 홍기자.

    “맞네요. 최근 기록한 선수가 J.D 마르티네즈, 2017년이네요. 18번째고.”

    “여기서 한 개 더 치면 19번째로 이름 올리는 거고, 또 한 개를 더 치면……?”

    “메이저리그 최초…….”

    “지금 69개니까 만약에, 만약에라도 두 개 더 치면…… 71개 맞지?”

    “맞죠.”

    “그럼 맥과이어 기록도 넘겨서 올타임 2번째 기록이잖아? 본즈 기록에 2개 남겨 놓는 거고.”

    “와…….”

    “써. 그걸 부각시켜서. 빨리! 만약에 이거 제대로 터지면, 우리 완전 대박 잡고 들어가는 거야. 송고하자마자 올리라고 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멋지게.”

    “옙!”

    타다다다다닥.

    “홍기자야, 이게 짬에서 나오는 구력이란 거다. 나 없었으면 너 어쩌려고 했냐?”

    “말시키지 마요.”

    “새끼, 부끄러워 하긴.”

    * * *

    두 번째 홈런을 치고, 나는 정말 놀랐다.

    ‘그냥 가볍게 던진 함정이었는데, 정말 물었단 말이야?’

    나는 사실 그 말, 그러니까 배팅은 타이밍, 피칭은 그걸 뺏는 거라는 말을 누가 말한 건지도 모른다.

    그저 두 번째 타석에서 귀찮은 머리싸움을 하지 않고 낚을 수 있겠다 싶어 던진 말인데…….

    5번으로 나선 스튜어트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덕아웃으로 향하는 길목.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내 귀에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우리 팬들의 목소리.

    -Let's Get it, Boom! Boom! Boom!

    최근 팀의 성적 덕분에 홈경기 땐 확연하게 체감이 될 정도로 관중이 늘었지만, 이렇게 평일에 원정을 따라 올 정도로 열정적인 팬은 드물다.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노동자니까.’

    “붐! 한 방 더! 저기 저 얼간이들을 교육해 줘요!”

    “휘익- 날 가져요!”

    “Boom! Boom! Boom! Boom! Boom!”

    그런 열정적인 팬들에게 가볍게 양손을 들어 세레머니를 바치고, 마침내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와! 투런! 아니 연타석 홈런!”

    “우와아아!!”

    “대단해!!”

    “최고야!!!”

    뭐지? 이 종이인형 같은 반응은?

    “다들 왜 이래요?”

    주변을 둘러싼 동료들을 쓱 둘러보자 이 이상함의 근원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내 눈을 피하고 있다.

    심지어 미기조차.

    “다들 창피해서 그래요? 맞죠?”

    맞네. 큰소리 뻥뻥 쳐 놓고 창피한 거네.

    어젯밤에만 해도 20점은 기본이고 30점도 낼 수 있다고 다들 큰소리를 뻥뻥 쳐 놨으니 창피할 만하지.

    “큼큼, 내가 지금 좀 목이 마른데…….”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다.

    이 덕아웃의 갑 오브 갑으로 군림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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