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94화 (94/175)
  • 94화 김사범, 2021시즌(올드스쿨)(1)

    현대 야구, 그러니까 세이버메트릭스가 주목받기 시작한 순간부터 도루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스탯이 됐다.

    굳이 부상 위험을 말하지 않더라도, 설사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팀의 득점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어떤 전문가는 도루 성공률이 75%가 넘지 않는다면 시도 자체가 손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적어도 현장에서 느끼는 도루의 가치는 그들의 생각보다 꽤 높다.

    “세잎!”

    [김사범 선수가 오늘 경기 2번째 도루를 성공시킵니다.]

    [첫 경기 때 김사범 선수를 노골적으로 거르면서 제법 효과를 봤거든요? 점수를 주긴 했지만 최소화하는데 성공했죠. 하지만 두 번째 경기부터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1번으로 김사범 선수를 기용하면서 이런 수법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됐습니다.]

    [바로 어제 경기에서 4개의 출루와 5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휴스턴 벤치를 곤란하게 했죠.]

    [2019년에 데뷔한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가 올해 포텐셜을 만개하며 거의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 주고 있지만, 오늘 김사범 선수를 막기에는 역부족 같습니다.]

    “너무하지 않아? 너 때문에 어제 치리노스를 달래느라 힘들었다고.”

    혹시라도 내 몸이 베이스와 떨어질까, 공을 잡은 글러브를 계속 내 몸에 붙이고 있던 알투베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럼 승부를 하라고 하세요. 갈 길이 먼데, 너무하지 않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렇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면, 나는 올 시즌 31개의 도루를 성공시켰으며, 32번의 도루 시도를 했다.

    그리고 97%의 도루 성공률을 가진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는 건 세이버메트릭스 관점에서도, 올드스쿨 야구 관점에서도 올바른 일이다.

    그리고 올바른 일을 넘어서서 이게 팀에 어떤 이득을 주는지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으니까.

    따악!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 바깥쪽 패스트볼을 밀었습니다! 1루수가…… 잡지 못합니다!]

    [김사범 선수가 2루로 향하면서 시프트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 휴스턴인데요. 1루수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공이 내야를 빠져나갔습니다.]

    내가 2루로 도루하면서 1루 베이스에 붙어 있어야 했던 1루수가 자유롭게 됐고, 나이가 들며 부족해진 힘을 강하게 잡아당겨 치는 걸로 메꾸던 미기에게 시프트가 걸렸다.

    그 결과는?

    상황에 따라서는 병살타가 될 수 있었던 타구로 무사 1, 3루. 이런 상황을 두고 보통 이렇게 말하곤 하지.

    ‘개이득’

    [이번 시리즈에서 3번으로 출장하고 있는 페이스 달턴 선수입니다.]

    빠아악!

    [페이스 선수가 살짝 가운데로 몰린 패스트볼을 받아쳐 큰 타구를 날립니다! 이 타구는 좌측 담장으로! 담장으로! 넘어갑니다! 팽팽하던 경기의 무게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호쾌한 홈런!!]

    내 도루가 나비효과가 되어 팀이 승리에 한발 가까워지게 됐다.

    이게 또 재미있는 거지. 내가 1번으로 올라온 이유기도 하고.

    더 재미있는 건, 전체적으로 타순이 한 칸씩 위로 올라오면서 빠진 이삭이 4번을 치고 있다는 거다.

    처음 라인업을 봤을 때 론이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이게 또 통하니까…….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볼넷으로 출루한 상황에서 5번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의 타구가 내야를 넘겼습니다. 이삭 선수는 3루까지. 또다시 재현된 무사 1, 3루에서 타자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

    출루 - 이어지는 안타 - 해결사, 또다시 출루 - 이어지는 안타 - 홈런타자.

    우리 팀의 주축 타자들이 모두 타선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과감한 구성이다.

    덕분에 지난 두 경기에서 혼란에 빠진 휴스턴의 투수들을 초반에 두들기며 쉽게 승리할 수 있었고.

    [스튜어트 선수의 타구가 우중간을 꿰뚫었습니다! 1루 주자는 이미 2루를 지나 3루로 향합니다!]

    그렇게 미닛 메이드 파크를 몇 번이고 휘젓고 다니다 보니 경기가 끝났다.

    “아웃!”

    [제이슨 폴리 선수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습니다. 원정 10연전 첫 3경기를 2승 1패로 마무리한 디트로이트! 이제 그들은 다시 뉴욕으로 향합니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을걸. - 수리]

    [1/3 지났어. 이제 곧 볼 수 있겠네.]

    [이제라도 다시 집에 들어갈까? - 수리]

    디트로이트가 여자 혼자 지내기에는 좋은 도시가 아니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 전화해 보시는 건 어때요? 제가 보기엔 최고의 타이밍인데.]

    [그런가? 알겠네. - 필]

    [혹시 연락이 안 돼도 두어 번 더 시도해 보는 걸 추천할게요.]

    [아직 내 딸은 내가 더 잘 알아. 고맙네. - 필]

    진정한 남자는 때로는 조금 비겁하거나, 중간을 걷는 정치력을 보여 줘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여자친구와 그 아버지의 사이면 더 그렇고.

    “뭔데 그렇게 웃으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아. 미기. 다음 생에는 스파이로 태어날까 싶어서요. 지금 전 완벽한 스파이거든요.”

    “흠,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그렇게 과신하다 보면 중요한 걸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지.”

    “그럴 리가요.”

    뉴욕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 10연전 중 초반이다 보니 아직 다들 쌩쌩하다. 나도 그렇고.

    미기가 맥주병을 든 채 사라지고, 디트로이트의 천재 전술가가 나를 찾아왔다.

    “론,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전용기는 숙박업소와 같다고 하시던 분이?”

    “아. 좀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오, 결국 전 마이너로 내려가게 되는 거죠? 내년엔 더 열심히 해서 이런 취급을 받지 않을 겁니다. 꼭이요.”

    “큼, 그래. 일단 싱글A로…… 후, 난 이런 걸 못해. 인정해야겠군.”

    “하하, 제 연기가 뛰어난 거지 론이 못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무슨 이야기예요?”

    내 말에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에 몇 가지 자료를 띄우는 론.

    “그런 거 안 보여 줘도 돼요. 믿으니까.”

    “그런가? 그럼 더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음, 원래라면 이러지 않지만…….”

    “진짜 마이너행이에요? 평소답지 않아요, 론.”

    “후, 좋아. 남은 경기에서 타순을 마구 섞을 거야. 오늘 경기에서 뭘 좀 본 거 같거든. 원래 기록에 도전하는 선수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야, 그거였어? 항상 그래 왔…… 아. 기록.

    “홈런 기록이요? 음. 그래요. 그걸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네요.”

    “음…….”

    내가 메이저리그에 와서 조금 놀랐던 건, 몇몇 대단한 감독들을 제외한 꽤 많은 수의 감독들이 팀의 고액 연봉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크게 피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기서 맥주를 먹으며 닉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미기도 예전 플레이오프 때 투수 기용 문제로 감독에게 욕설을 내뱉은 전과가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그랬으면…… 어휴, 생각하기도 싫네.’

    그러다 보니 론도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게 말하는 것일 테고. 이럴 때 보면 메이저리그 감독도 참 못할 짓이구나 싶다.

    “그걸 생각하면 곤란하겠죠. 전혀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신경을 쓰든 안 쓰든 이뤄 낼 기록이고, 이번에 안 되면 내년에 깨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구 섞어 주세요.”

    “하하, 또 속았군. 알겠네. 그렇게 말한다면 다행이지.”

    론이 좌석에서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있다 보니 갑자기 머리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 그리고…….”

    “또 뭔가 장난을 치려는 건가?”

    “아뇨, 음…… 이건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뭐지?”

    “아마 두 번째 경기에서는 투수가 절 거르지 않을 거예요.”

    “아하, 그리고 또?”

    “전 4번을 좋아해요.”

    아무리 메이저리그라도 상황에 따라선 이게 굉장히 실례일 수도 있다.

    팀 전체를 주무르는 한국 야구의 감독은 아니지만, 여기 메이저리그에서도 타선 구성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니까.

    “이제 보니 붐도 올드스쿨이군? 올드한 사람으로서 그런 욕심은 언제든지 환영이지. 기대하고 있게.”

    휴.

    론이 자리에서 떠나고, 옆에 놓아 둔 음료수를 마시며 속으로 몇 번이고 되씹어 봤다.

    ‘4번타자 김사범.’

    멋진데.

    * * *

    난 싸움이 싫다.

    어렸을 때부터 컸던 덩치로 인해 제법 많은 시비에 휘말렸고,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어를 위해 손과 발을 휘둘러 상대를 제압해도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약 거기서 조금이라도 좋은 기분을 느꼈으면 고등학교 때 진작 이종격투기로 진로를 바꿨을 수도 있었겠지.

    아무튼. 돌아오기 전에도 싫어했지만, 돌아오고 난 뒤에는 특히 더 조심하고 있다.

    폴리나 이삭을 장난스럽게 제압하거나, 투닥댈 때도 최대한 신경을 쓰며 조심할 정도니까.

    ‘진짜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으면 어떡해?’

    하지만 사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나곤 한다.

    양키 스타디움. 3연전의 첫 경기.

    [6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애런 저지 선수를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시미즈 루이 선수!]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은 것 같죠? 5회 김사범 선수의 투런 홈런으로 앞서나가면서 조금 더 신나게 던지고 있는 것 같아요.]

    [타석에 지안카를로 스탠튼 선수가 들어섭니다.]

    [저번 타석에서는 무릎 쪽에 공을 맞으면서 힛바이 피치,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었습니다.]

    제구력이 좋다는 건 언제나 좋은 투구 내용을 보여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마운드에서 양키스 타선을 맞아 6이닝 가까이 호투하고 있는 시미즈처럼.

    “그렇게만 해! 아주 좋아!”

    1루에서 시미즈를 향해 소리 지르는 스튜어트의 말처럼, 시미즈는 오늘 아주 좋은 투구를 하고 있었다.

    스탠튼을 상대로 한 초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지 않고 그의 옆구리에 꽂히기 전까진.

    “왓 더 ㅍ…….”

    하지만 제구력 하나만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아니 그들이라고 해도 투수의 제구력은 근본적으로 믿을 게 못 된다. 아무리 제구력이 좋은 투수라도 지금처럼 복합적인 이유로 어이없는 공을 던질 때도 분명 존재하니까.

    [아. 다시 한 번 몸에 맞는 공!]

    느낌이 싸하다. 순간 덕아웃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폴리는 덕아웃 난간을 잡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저런다는 건…….’

    누구보다 벤치 클리어링의 냄새를 잘 맡는 폴리다.

    ‘일단 막고 보자.’

    [김사범 선수, 재빨리 다가와 시미즈 선수와 스탠튼 선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개자식이!”

    1루가 아닌 마운드 방향으로 걸어가는 스탠튼. 페이스가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진정해, 고의가 아니잖아.”

    “손목을 부러트려 줄까? 아니면 그딴 개 같은 짓거리를 하는 머리를 부숴 줘?”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전혀 듣질 않는다.

    “경고하는데, 그보다 더 다가오면 진짜 머리가 부서질 수도 있어. 나도 내 힘을 잘 모른다고.”

    “뭐?”

    천천히 걸어오다 내 말에 빠르게 대시하는 스탠튼.

    아. 정말인데. 진짜 잘 모르는데.

    “난 경고했어.”

    달려오는 스탠튼이 휘두른 오른손을 피하고, 허리춤의 벨트를 붙잡아 던졌다.

    쿵!

    “크아아악!”

    어…… 이 정도였나?

    마운드에서 1루 베이스까지 던져진 스탠튼의 비명을 시작으로, 언제 뛰쳐나가야 할지 타이밍만 보고 있던 양 팀 선수들이 모두 나를 향해 뛰어왔다.

    “저 자식을 죽여 버려!”

    “기름때 낀 더러운 놈들!”

    “스탠튼 먼저 부축해!”

    “이거 놔요!!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이건 1루 측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고.

    “뛰어! 저 새끼들보다 먼저 가야한다고!”

    “우와아아아아악!!”

    “죽여 버려!”

    “머리를 $$#%해서 #[email protected]@ 해버려!!”

    이건 3루 측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아, 결국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납니다! 마운드를 향해 몰려드는 양 팀 선수들!]

    [조심해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부상이 많이 나오거든요? 김사범 선수도 버티고 있는 것보단 동료들과 함께…… 아…….]

    [야, 양키스 선수들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피하고, 잡고, 던지고.

    난 싸움이 싫다.

    내 손에 맞아 누군가 다치는 것도 싫고.

    그래도…….

    내 동료가 누군가에게 맞는 걸 보는 것보단 내 손을 더럽히는 게 낫지.

    [달려오던 디트로이트 선수단이 던져지는 양키스 선수들을 피하느라 접근하지도 못하는군요! 오직 제이슨 폴리 선수 혼자 그 틈을 뚫고 김사범 선수 옆에서 양키스 선수단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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