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89화 (89/175)
  • 89화 김사범, 2021시즌(더, 조금 더)(1)

    디트로이트, 전기차 생산 공장.

    생산 라인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기계 소리와 드릴 소리만 가득하던 공장 한구석, 노동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자신들의 캐비닛에서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봐, 힐. 어제 봤어?”

    “뭘 봐?”

    “어제 올스타전이었잖아.”

    “오늘 아냐?”

    힐이라 불린 남자가 자신의 구형 핸드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맞는데? 작년 경기 재방송 본 거 아냐?”

    “내가 그 돈을 내고 재방송을 왜 봐? 어제가 홈런 더비였잖아.”

    힐은 손에 쥔 도시락을 자기도 모르게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아, 그게 어제였지? 어쩐지. 쉬는 날이라 기분 좋게 한잔하고 자는데 그렇게 찝찝하더라니!”

    “낄낄, 어제 브루하고 잭슨 데리고 집에서 봤는데, 아, 대단했어.”

    “잠깐. 브루? 잭슨? 그 두 얼간이를 데리고 봤으면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어?”

    남자의 눈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그건 그렇고, 어제 붐이 몇 개를 쳤는지 알아?”

    “……그걸 어떻게 알아. 경기도 못 봤는데. 1등? 그건 당연할 거고. 이번에도 자기 에이전트하고 나간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죽여줬어. 스탠튼도 안 나왔는데 누가 상대할 수 있었겠어?”

    “옐리치나, 베츠도 있고. 그 누구야, 토론토에 게레로도 있잖아.”

    “게레로 주니어지. 상대도 안 됐어.”

    “그 정도였어?”

    남자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붐이 로키산맥에 갔어.”

    “아. 끝났네.”

    “그렇지.”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두 남자를 부르며 다가왔다.

    “힐! 킨더만! 일하다 말고 어디 간 거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점심은 먹고 일하자고!”

    예전의 한가했던, 아니 을씨년스러웠던 공업단지의 풍경은 사라지고, 이젠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독촉을 받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런 디트로이트 공업단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간판에는 김사범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 * *

    그 시각, 쿠어스 필드.

    나는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 팬 행사를 위해 미기와 함께 숙소를 일찍 나섰다.

    “오랜만에 왔더니 기분이 이상한데?”

    “얼마만이죠?”

    “2016년 팻코 파크 이후 처음이니, 5년 만인가?”

    “와, 이상할 만하네요.”

    7월에 마무리된 올스타 투표에서 난 작년처럼 아메리칸 리그 야수 선발 팬 투표에서 1등을 차지하며 올스타에 왔지만, 미기는 최종 5인 투표에서야 뽑혀서 왔다. 제2의 전성기라 불릴 정도로 이번 시즌 활약이 아주 좋다 보니 예상했었지만.

    88경기 타/출/장이 각각 0.328, 0.391, 0.611이다. 전성기에 비해서 출루율이 소폭 감소했지만 타율과 장타율은 그대로다. 홈런도 17개를 쳐내면서 아직도 식지 않은 방망이를 자랑하기도 했다.

    “아무튼, 뽑혀서 왔지만 난 푹 쉬고 싶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사실은 뛰고 싶으면서. 쑥스러워하기는.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정리해 놓을 테니까.”

    “큼, 그래.”

    이거 봐, 아쉬워하잖아.

    잠시 후 도착한 행사장, 양대 리그, 지구를 가리지 않고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들의 사인을 받기 위한 팬들도 어마어마하게 모였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젊은 남성이 냉큼 내 앞으로 와서 자신의 유니폼을 내밀었다.

    “붐, 붐을 보려고 18시간 동안 차를 몰고 왔어요!”

    “네? 어디에서 출발했길래…….”

    “디트로이트요!”

    예전, 메이저리그 콜업이 되고 나서 원정 간 이동거리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기억엔…… 여기서 디트로이트까지 1,000마일이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일로 해서 숫자가 적어 보이지, 1,500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 아니 이건 장거리가 아닌 지옥거리, 헬거리 운전이다.

    “아니, 홈경기에 찾아오시면 될 텐데? 허리 괜찮아요?”

    “티켓이 없던데요? 그래도 어제 홈런 더비도 봤고, 이렇게 첫 번째로 붐을 봤으니 보람은 있네요.”

    아아…… 젊음의 힘이란…….

    “좋아요. 일단 그 유니폼은 주고, 잠깐만 기다려요.”

    재빨리 라커룸으로 달려가 내 짐을 찾았다.

    ‘어제 따로 놓고 가지 않았으니까 분명 가방에 있을 거야.’

    가끔 도지는 건망증 덕분에 좋은 선물을 할 수 있게 됐다.

    ‘여기 있네. 다행이야.’

    여러 가지 물건들을 챙기다 손이 부족해져서 그냥 내 가방을 통째로 들고 행사장으로 뛰었다.

    “후욱, 오래 기다렸죠?”

    “네? 아뇨. 근데 그건…….”

    테이블 밑에 가져다 놓은 가방에서 준비한 것들을 꺼냈다.

    홈런 더비 때 입었던 유니폼.(세탁 안 한)

    홈런 더비 때 교체한 배트.(중간에 살짝 금이 가 있다)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부터 신었던 스파이크.

    그리고 여분으로 가져온 글러브까지.

    모든 물건에 재빨리 사인을 하면서 앞에 있는 젊은 남성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조나단, 조나단 폴링슬리요.”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 대답을 듣자마자 펜으로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정도면 왕복 36시간의 보답이 되겠죠?”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나단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 안 돼. 제발…….’

    “큽, 킁. 네, 충분해요. 아, 이렇게까지는…….”

    “조나단?”

    “네?”

    “난 남자의 눈물을 혐오해요. 그러니까 제발…….”

    “푸하핫, 킁, 알겠어요. 고마워요 붐. 오늘을 꼭 기억할게요.”

    “그 물건들이 이베이에 올라가 있는 게 보이면…… 알죠?”

    “당연하죠.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조나단이 양손 가득 물건들을 가지고 떠나고,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난 내 가방 안의 모든 물건이 털렸다.

    심지어 차고 있던 벨트도.

    “그러게, 왜 그랬어?”

    행사가 끝나고,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라커룸으로 향하는 길에 미기가 내게 물었다.

    “그냥, 고맙잖아요. 팬이라는 게.”

    평소에도 고마웠지만…… 오늘은 뭔가 더 고마운 날이었다.

    “바지 또 내려간다.”

    벨트는 주지 말걸 그랬나?

    * * *

    올스타전은 특별하다.

    경기 전 행사에 몰린 팬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메이저리그는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올스타급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쓰며 이 자리를 특별하고, 명예로운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그 ‘급’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선수다.

    갑자기 웬 자화자찬이냐고?

    [베이스 온 볼스! 붐이 원아웃 만루에서 고의사구를 받았습니다.]

    [포스트…… 아니 붐답군요. 올스타전에서 보여 주는 퍼포먼스의 일환일까요?]

    1루에 나간 뒤, 게레로의 유격수 방향 깊은 땅볼에 아쉽게도 2루에서 아웃을 당했다.

    “론, 이거 말고 다른 서프라이즈 준비한 거 없어요?”

    덕아웃에서 웃고 있던 론에게 농담을 던졌다.

    “아직 몇 개 더 있지. 저쪽 감독하고 각본을 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조금 있으면 한 이닝에 만루 홈런 두 개를 쳐야 하니까 푹 쉬고 있으라고.”

    “아, 제발. 그럼 베이스를 두 번 돌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힘들어요.”

    실실 웃는 론을 뒤로하고 언제나와 같이 미기의 옆자리로 향했다.

    “기분이 어때?”

    “죽이죠. 정말 죽이네요.”

    만루에서 날 걸렀다.

    그러니까, 한 점을 그냥 주는 게 내가 타격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거다.

    “일종의 퍼포먼스일 수도 있지만, 어제 오늘 네가 보여 준 활약을 보면 나라도 저랬을 거야.”

    “제가 좀 그렇긴 하죠?”

    “110개라니, 맙소사.”

    홈런 더비에서 내가 날린 홈런의 개수다.

    덕분에 오늘 아침, 짐의 오른팔은 거의 99% 정도 기능을 정지했지만.

    “그러고도 모자라 오늘도 벌써 두 개나 홈런을 날려 대니…….”

    1회, 3회. 각각 솔로 홈런과 쓰리런.

    내가 봐도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음…… 그런 기록이다.

    [경기는 9:9, 동점인 상태로 9회로 넘어갑니다.]

    뭐, 내가 아무리 활약해도 다른 타자들이 이렇게 잘 치면 별 의미 없지만.

    “미기, 그런데 진짜 욕심 없어요?”

    “어떤 거?”

    “그냥, 올스타전 출전도 그렇고. 기록도 그렇고.”

    내 말에 미기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만약 오늘 경기에 나서게 된다면…… 내 안에서 큰 변화가 있을 것 같거든. 그게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이거다.

    오늘 미기는 꼭 타석에 나서야 한다.

    ‘저런 표정으로 말하는 베테랑치고 은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내 경험상 지금 미기는 선수 생활을 계속하느냐 마느냐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타석에 나가기 싫다고 말한 거겠지. 올스타전 타석에 나서서 좋은 타구를 때려내면, 은퇴를 결심한 마음에 틈이 생길까 봐.

    ‘미기, 전 느낄 수 있어요. 저도 알고 보면 꽤 베테랑이거든요.’

    “전 미기를 응원할게요. 아니, 유격수로 한번 뛰어 볼래요?”

    “뭐?”

    “제 타석을 양보하려고요. 지금 론에게 말하려고 하는데.”

    “이 몸뚱이로 거기에 서 있으면 굉장히 재미있겠는데?”

    “그쵸?”

    “끌리긴 하는데, 사양할게.”

    미기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두 명의 타자가 아웃을 당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미기, 대타야.”

    9회 초, 투아웃 상황에서 미기가 타석에 나섰다.

    [아, 미구엘 카브레라가 타석에 나섰습니다. 오늘도 ‘언터쳐블’을 보여 주고 있는 조시 헤이더에게 커리어의 끝을 보고 있는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미기라면 가능하죠. 요즘 그의 폼은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으니까요.]

    퍼억!

    “스트라이크!”

    슬라이더로 보이는 구질이 미기의 존을 통과했다.

    낮은 쓰리쿼터에서 나오는, 먼 곳에서 먼 곳을 통과하는 슬라이더였겠지.

    미기가 구심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타석에서 나와 장갑을 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어린아이 같은 응원이 터져 나왔다.

    “미기! 보여 줘요!”

    날 보며 씨익 웃는 미기.

    9회,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앞서나가는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를 도는 미기를 보고 싶다.

    [조시 헤이더. 와인드업.]

    따아악!

    그리고, 미기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와아아아아!

    시즌 중에도 많이 봤던 모습이지만. 오늘따라 뭔가 더 가슴이 찡한데?

    * * *

    “2021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붐을 만나 봤습니다.”

    리포터의 클로징 멘트를 끝으로 공식적인 올스타전이 모두 끝났다.

    이제 론, 미기와 함께 디트로이트로 돌아가 하루를 푹 쉬고…… 아니 수리를 만나고, 후반기를 준비하면 된다.

    덕아웃을 지나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에는 꽤 많은 기자들이 각자 한 사람씩 잡고 인터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붐!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 인터뷰가 끝났나 봐요?”

    “네 뭐, 그렇죠. 오래간만이에요 제시.”

    “오랜만이에요. 일단 MVP 수상 축하드리고. 아, 이번에도 MVP 부상은 기부할 건가요?”

    “물론이죠. 아직 고액 연봉자는 아니지만 그 정도야 뭐.”

    “그럴 줄 알았어요. 아, 조금 있다 미기가 무슨 할 말이 있다면서 다들 불러 모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요?”

    뭐지? 난 모르는 이야기인데.

    “아뇨. 저도 모르는데……. 물어봐야겠네요.”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제시에게 양해를 구하고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실 앞에서 친한 기자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미기.

    “미기!”

    “어, 붐. 벌써 왔나?”

    별다를 거 없는 평소 모습인데.

    “혹시 오늘 뭐 중대발표 같은 거 해요?”

    “음?”

    “아니, 아까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하하, 그래. 중대한 발표긴 하지.”

    “뭔데요?”

    미기는 내게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자 여러분! 오늘의 발표 순서입니다!”

    각자 인터뷰하던 선수의 양해를 구하며 모이는 기자들.

    각자의 눈을 빛내며 미기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무슨 발표죠? 혹시?”

    불안하다.

    “말 돌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바로 말하죠. 이번 시즌까지만 뛰고 은퇴할 겁니다. 깨끗하게.”

    찰나의 순간, 라커룸에 침묵이 감돌았다.

    몇 초 뒤에 불어닥칠 말들의 태풍을 예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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