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88화 (88/175)
  • 88화 김사범, 2021시즌(기록은 영원하다)(4)

    토론토와의 3차전이 끝난 뒤.

    후웅!

    나는 집에 돌아와 내 스윙을 다시 점검해 보고 있었다.

    ‘오늘 홈런 두 개를 치긴 했는데…… 억지로 친 느낌이었어.’

    내가 잘 쳤다기보다는 상대 투수가 실투를 던져서 홈런을 쳤다는 느낌이 강하다.

    “훅, 후우.”

    40홈런까지 앞으로 3개, 덕아웃에서 어색함에 몸부림치는 동료들을 위해 빨리 기록을 세워야 한다.

    ‘아니…… 내 손발을 위해서라도.’

    모두가 내 눈치를 보는 이런 장면이 재미있긴 하지만, 괴로워 하는 얼굴들을 즐기는 취미는 없으니까.

    다음 날.

    “베이스 온 볼스!”

    [김사범 선수, 또 다시 볼넷을 골라 나갑니다.]

    [오늘도 1번타자로 출장을 한 김사범 선수인데요, 1회부터 ‘차라리 걸어서 나가라!’라고 하는 듯이 존 밖으로 공을 던지고 있네요.]

    [평소였으면 타팀 팬에게는 물론, 토론토의 팬들도 싫어할 플레이죠.]

    [네, 맞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앞둔 지금, 디트로이트의 팬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노골적인 견제에 돌을 던질 사람은 없어요. 고의사구를 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할겁니다.]

    토론토의 투수가 공을 잘 안 준다.

    저번 시즌이 끝나갈 때쯤, 기록의 희생양이 되길 거부하며 날 거르던 그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풍겨 온다.

    ‘하긴, 나라도 기록의 희생양이 되기는 싫으니까.’

    이렇게 기록을 앞두고 경기를 하다 보면, 예전에 프로 생활을 할 때 요즘 대학생들이 하는 게임이라며 후배가 알려 준 게임이 생각난다.

    ‘베스틴라빈스 31이었나?’

    익숙한 아이스크림 가게와 이름이 똑같은 게임처럼 내게 딱 두 개의 홈런만 내주고 다음 팀에게 넘길 수 없으니까. 토론토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일 거다.

    이해는 이해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실투뿐이다.

    ‘딱 한 개의 몰린 공, 그것만 있으면…….’

    “달려! 달려!”

    “좋아! 나이스 배팅!”

    내게 너무 많은 신경을 썼는지, 토론토는 나 이외의 다른 타자들에게 그로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있었다.

    5회가 끝난 지금, 이미 우리의 전광판에 8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을 정도로.

    “오늘 영 좋은 공을 안주네? 그치?”

    “어, 딱히 실투도 없었고. 나를 상대할 때만 스트라이크 존을 옆으로 옮긴 느낌이야.”

    “맞네, 그런 느낌이야. 포수도 있는대로 빠져 앉아있고.”

    케이시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이 순간, 오늘 경기 내 기록은 3볼넷 2득점, 2도루다.

    ‘나한테 1번타자로서 재능이 있는 건가?’

    내가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오늘 내 활약은 만점이었다.

    홈런이 없다는것 빼고.

    “그런데, 경기 중반을 이제 막 지났는데 왠지 토론토 벤치는 기운이 없네?”

    “네가 하루가 멀하다고 홈런을 쳐대니 그렇지. 좀 살살해.”

    “그런가? 하긴. 나라도 4연패 위기에 빠져있으면 저럴 것 같긴 하다만.”

    그리고 6회 말, 투아웃.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지난 세 타석에서 얌전히 배트만 들고 서있어서 그런가, 상대 투수와 포수가 긴장을 놓은 것 같다.

    ‘아니면 5회부터 등판해서 날 인식 못 한 건가?’

    뭐가 됐든, 그러면 안 됐다.

    바깥쪽, 유인구답지 않은 유인구만 던지던 상대 투수가 오래간만에 던진 패스트볼.

    그 공이 아주 살짝, 살짝 몰렸다.

    여전히 존 밖으로 벗어나는 공이지만, 내 배트가 닿기엔 충분한 거리.

    따아악!

    이거지. 이 손맛이지.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 날아갑니다!]

    [우리가 기대하던, 그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장면이네요.]

    [홈런! 시즌 38호! 그리고, 9경기 연속 홈런입니다!]

    ‘앞으로 2개, 잘하면 이번 주에…… 뭐야?’

    피이이이잉- 퍼엉!

    펑!

    퍼펑!

    내가 1루를 밟는 순간, 코메리카 파크에 누군가 숨겨 놓은 폭발물이 폭발했다.

    아니 폭발한 거 같다.

    놀라 바라본 하늘에 수놓아진 형형색색의 불꽃들.

    ‘뭐지?’

    어안이 벙벙한 채 마침내 홈을 밟았을 때, 팀원들 모두가 덕아웃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착각했나? 아니면 38개에도 뭔가 다른 기록이 있는 건가? 아니면 메이저리그는 2개 전부터 이러는 게 정상인건가? 아니, 작년에는 없었는데?’

    마치 좀비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팀원들을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다.

    “……아직 38개야! 40개까진 2개 더 남았다니까!”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 소릴 제외하곤 그라운드의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하아…….”

    선두에 있던 미기가 갑자기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덮쳐.”

    “아니 미기, 그러니까 지금…….”

    ‘으억, 거긴 왜 때리는 건데?’

    ‘아니 옆구리는 왜 꼬집는 거고?’

    ‘이러다 DL 가는거 아냐? 오해 때문에?’

    한참을 괴롭힘 당하고 나서 거지꼴로 덕아웃으로 들어가다 보니, 페이스가 어깨동무를 하며 내게 말해 줬다.

    “붐, 방금 홈런으로 넌 메이저리그 연속경기 홈런 기록을 깼다.”

    “으…… 어?”

    “9경기. 레전드들의 위에 네 이름을 새겼다고.”

    어…….

    뭐?

    * * *

    미국의 한 스튜디오. 세트장에 걸려 있는 커다란 글자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쇼의 제목을 보여 주고 있다.

    [캐리 앤 필 쇼]

    녹화가 진행되고 있는 스튜디오에 남자 진행자, 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자료를 들고 왔어요. 기대해도 좋을걸요?”

    “이봐요 필, 우리는 원래 재미있는 자료를 가지고 말하는 프로예요. 그건 당연한 거라고요.”

    “아하! 우리 프로, 시사교양 프로 아니었나요, 캐리?”

    “또 그런다, 재미 없으면 두고 보자고요. 다음 주부터는 캐리 앤 필 쇼가 아니라 캐리 쇼가 될 테니까.”

    “아하하, 그거 무서운 소리군요. 그래도 일단…… 한번 맞춰 볼래요?”

    필이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맞은편 캐리에게 물었다.

    “음…… 아니, 어떤 주제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맞춰요?”

    “힌트를 드리죠, 힌트는…… 데릭 지터?”

    “네? 그가 또 누굴 만났어요?”

    “아하하, 아닙니다. 이러다가 내일까지 쇼가 안끝나겠군요. 직접 보시죠.”

    자료화면이 스튜디오 한가운데의 스크린에 나오기 시작했다.

    “……2개 더 남았다니까?”

    “일단 덮쳐.”

    다시 한 번 짧게 반복되는 장면.

    “……2개 더…….”

    “……덮쳐…….”

    와하하하하하!

    인공적인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끝난 뒤, 캐리가 말했다.

    “아하, 이거군요? 어제 인터넷에 하루 종일 떠 있던 기사잖아요?”

    “웃기지 않아요? 9경기 연속 홈런을 때린 타자가 그걸 모르다니!”

    “저렇게 목소리까지 나오면 쇼였다고 말할 수도 없겠네요.”

    “웃기죠? 인정하나요?”

    “다음 주도 아쉽게 캐리 앤 필 쇼가 되겠네요.”

    와하하하하!

    “아직 안 끝났어요. 경기가 끝난 뒤 타이거즈 선수들의 인터뷰도 보시죠.”

    화면에 입만 모자이크된 디트로이트 선수가 나왔다.

    “평소에 눈치가 없는 편이긴 했어요. 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사실 전날에 들킨 줄 알았어요. 모두가 합심해서 준비했는데 워낙 어려운 일이라…….”

    “모두 제 덕분이죠.”

    “이 자료 따로 보내줄 수 있어요? 평생 소장하려고요.”

    영상을 보던 캐리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요, 보내 드릴 수 있죠. 아니, 어차피 인터넷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텐데, 굳이 필요하겠어요? 이 정도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텐데?”

    “그래도 보내 주죠. 붐에게!”

    “악질이네요.”

    “맞아요. 악질이죠. 그리고 더 악질 같은 제작진이 힘겹게 따온 붐의 인터뷰를 끝으로 다음 코너로 넘어갈게요.”

    “붐! 오늘 상황에 대해 한마디만 해 주세요!”

    “오늘 상황이요?”

    “아까 6회에 홈런…….”

    “그건 대답하기 싫습니다. 저리 가세요.”

    카메라를 손으로 가리는 김사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꺼졌다.

    와하하하하!

    * * *

    내 창피함을 발판 삼아, 팀의 분위기는 하늘을 뚫을 것처럼 상승했다.

    그리고 난, 힘들었다.

    왜냐하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유명인사 아냐? 내가 오늘 네 기록을 조사해왔어…….”

    날 보면서

    “풉.”

    웃기에 바빴으니까.

    “오늘도 자기 전에 네 영상을 보고 자. 왠지 모르게 안정되는 기분이거든.”

    경기에서도 마찬가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상대 팀 포수, 가끔씩은 심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물론, 내 메신저는 이미 폭파됐고.

    [한공고 (+999)]

    그리고…… 수리도…….

    [괜찮아요. 난 재미있었어요 ;)]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오욕의 시간이 잊혀 갈 때쯤, 우리는 시즌의 반환점을 1등으로 돌 준비를 완료했다.

    연속홈런 기록?

    그 멘탈에서 홈런이 나오면 그게 사람일까?

    9경기에서 멈췄다.

    ‘다다음 시리즈에서 40홈런을 넘겼으니 망정이지.’

    70경기 40홈런, 그리고 올스타전을 앞둔 지금은?

    92경기 51홈런, 시즌 90홈런 페이스로 순항 중이다.

    팀 성적 또한 92경기 59승 33패로 지구 1등을 넘어 메이저리그 1등을 달리고 있고.

    나를 희생양 삼아 얻은 1등.

    난 팀이 잘 나가면 그걸로 족하다.

    …….

    아마도.

    * * *

    올스타전 전날, 쿠어스 필드.

    “나 환호성 좀 질러도 돼요?”

    “짐, 제발.”

    “와후!!!!”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신나는 건 알겠는데,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신난 거예요?”

    “내 고객이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타자니까요!”

    이 아저씨도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진중하고 유쾌한 아저씨였는데…….

    “저 아직 두 번째 시즌을 치루고 있는 선수예요.”

    “메이저리그 역사에 두 번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거죠.”

    조증인지, 이제는 조금 감당하기 벅차다.

    “빨리 숙소로 가죠? 연습은 좀 했어요?”

    “고등학교 때 던지던 슬라이더를 던져 봤는데, 그때보다 더 잘 휘는 거 같아요. 기대해도 좋을걸요?”

    ……우리가 같이 하는 게 홈런 더비라는 걸 잊은 건가?

    “으하하하하, 농담이에요. 그래도 연습 때 조금 던져 보는 건 괜찮죠?”

    띠리리리.

    “그러세요. 아 잠시, 그때 말했던 전화가 왔네요.”

    “그 전화 인터뷰요? 한국의 쇼 프로그램에 나온댔죠?”

    “네. 친구가 부탁을 해서. 잠깐만요.”

    유명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초대돼서 신나하던 녀석에게 차마 팩트폭행을 날리진 못했다.

    ‘아무리 봐도 날 낚으려고 김태연에게 접근한 거 같은데.’

    띠리리리리.

    “큼, 큼. 태연이냐?”

    [……잠깐! 잠깐! 진짜 받았어! 크흡, 안녕하세요! 김사범 선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태연이 목소리는 아닌데…… 누구시죠?”

    미리 연락이 와서 시간대도 맞춰 놓고 이런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작가가 리얼리티를 살려야 한다고 거의 빌듯이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도전의후예 촬영 중인데요, 저는 전호석입니다! 혹시……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국민 MC를 모르면 한국사람 아니잖아요?”

    [으하하하하! 다행이네요. 사실 모르시면 어쩔까 걱정했었는데!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네. 가능합니다. 태연이가 도전의후예에 나왔나 봐요?”

    [아, 오늘 서울 야구장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되어서요, 김태연 선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하, 야구에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인데, 옆에 있으면 혼내 주세요.”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와 흥분한 김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뭐, 나 정도면 이런 말 할 수 있는 거 아냐?

    [아하하, 김태연 선수 말리느라 4명이 다 달라붙어 있느라……. 아, 요즘 한국에서 김사범 선수 인기가 어마어마한 거 알고 계신가요?]

    “제가 인터넷이나 이런 걸 잘 안 해서…… 아직 체감은 하지 못했습니다.”

    [시즌 끝나고 들어오시면 아주 까암짝! 놀라실 겁니다.]

    그 이후에도 내 한국에서의 인기와, 프로그램에 대한 덕담, 그리고 꼭 한번 직접 나와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아니, 끝내려고 했다.

    기어코 전화기를 뺏은 김태연이 한마디를 덧붙이기 전까진.

    [풉! 타이…… 킁! 틀 두 개 남았으니까앜크크킄, 후읍. 열심히 해라. 겨울엨큭, 흥! 보자!]

    “야 너, 내가 그거 하지…… 여보세요? 김태연!!”

    다시 걸어서 김태연을 바꿔 달라고 하면 추한 거겠지?

    ‘겨우겨우 잊혀지나 했는데…….’

    이번 겨울엔 꼭 김태연을 만날 거다.

    꼭.

    후. 김태연은 김태연이고. 방송사에서 이런 연결까지 하는 걸 보면 내가 누군가가, 아니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 됐다는 뜻이니까. 기분은 좋다.

    “……그래서 이번엔 끝까지 오래 던지려고 두 달 전부터 운동을…….”

    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숙소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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