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김사범, 2021시즌(기록은 영원하다)(3)
유명인의 아들들과 싸우는 토론토 전, 한 경기 전까지 좋았던 컨디션은 어디 갔는지 내 타격 컨디션은 한 타석, 한 타석마다 널을 뛰고 있었다.
공을 맞히긴 하는데 오늘 경기는 이상하게 공이 뜨질 않는 느낌이다.
[김사범 선수, 두 타석 연속 범타로 물러납니다.]
[최근 홈런을 꽤 많이 생산해 내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타율과 출루율은 떨어지고 있는 게 보입니다. 최근 7경기에서 6홈런을 치며 3할 3푼 대의 타율과 4할의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3경기로 표본을 줄여 보면 타율이 2할 5푼 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일종의 슬럼프인가요? 홈런 페이스는 아주 훌륭한데요.]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는 없지만……. 연속경기 홈런 기록이 이어지면서 일종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후아.”
“아쉬웠어. 좋은 타구였는데.”
“아, 헤이스. 뭐, 어쩔 수 없죠. 잘 맞은 타구들이 저렇게 야수 정면으로 가는 건데.”
“아직 적어도 두 타석은 남아 있잖아? 힘내.”
두 타석, 이번 경기에서 남은 기회다. 무안타 경기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나지만……. 이렇게 말리기 시작하면 장담을 할 수 없는 게 야구란 게임이니까.
‘내 타석에서는 시프트도 크게 안 걸리는데…… 묘하게 타구가…….’
그렇게 한 타석을 더 범타로 물러난 뒤, 마지막 타석.
[토론토의 션 라이드-폴리 선수가 오늘 눈부신 호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7회까지 6개의 안타를 맞았지만 위기관리 능력을 뽐내며 한 명의 주자도 홈에 들여보내지 않았죠?]
[투구 수도 8회 말을 시작하는 지금 시점에 92개. 아주 좋습니다. 최근에 잘 사용하지 않던 커브를 높은 비율로 구사한 게 디트로이트 타자들에게 아주 잘 먹혀들었어요.]
[타석엔 이삭 페레데스 선수입니다.]
“이삭! 쳐!”
벤치에서 우리 팀 폴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근 3연투로 휴식일을 받아 덕아웃에서 하루 종일 심심해하더니, 응원에 맛 들렸나?
“스트라이크!”
이삭이 바깥쪽 낮은 패스트볼을 지켜봤다.
오늘 우리 팀 타자들이 무기력한 건 바로 저 존 때문이다. 바깥쪽 낮은 쪽을 유난히 잘 잡아 주는 존.
‘우리 팀 투수들도 제법 잘 이용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특히 이삭처럼 키가 작은 타자들이 어려워하는 코스기도 하고…….
“볼!”
오른발 쪽으로 떨어지는, 몸쪽 커브를 아주 잘 참아낸 이삭.
“좋아! 이삭! 네가 해결해야 해! 오늘 붐이 완전 별…….”
덕아웃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타석을 바라보니 이삭도 들었는지 헬멧을 고쳐 쓰는 척하며 씩 웃고 있다.
‘덕아웃에 빨리 돌아가야겠네.’
타석에 나선 타자가 덕아웃으로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방법?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그거지.
따아악!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좌측으로 뻗어나갑니다!]
[이건 넘어갔네요.]
[시즌 35호, 솔로 홈런! 그리고 연속경기 홈런 기록을 7경기로 늘렸습니다!]
투수가 주저앉은 마운드를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한 바퀴를 돌아 홈을 밟았다.
그리고 들어선 덕아웃. 환호 소리와 함께 날 반겨 주는 팀원들 사이에서 목표물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으아악!”
그러게 말을 조심해야지.
조금만 조심했으면 허리도 살고 너도 살았을 텐데…….
* * *
토론토와의 2차전은 내 홈런으로 만든 1점을 제외하고 아무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1:0 승리.
“그린 선수, 오늘 오랜만에 세이브 상황에 올라가셨는데 기분이 어떠셨나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폴리가…….”
“전체적인 팀의 타격이 침체되어 있다는 세간의 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미기?”
“헛소리지. 상대 팀 투수가 잘 던진 걸 칭찬하면 되지 왜 우리 타격을 걸고…….”
‘음……. 왜 나한텐 아무도 안 오지?’
결승 홈런을 올린 선수에게 인터뷰를 청하는 기자가 없다니.
‘이것도 그거하고 연관돼 있는 건가?’
그렇게 간단한 인터뷰가 끝나고. 외부인들이 모두 나간 라커룸에서 하나둘씩 씻으러 들어가는 타이밍.
나는 내 옆 라커를 쓰는 이삭이 들을 수 있게 조금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 오늘은 어떻게 넘겼는데, 이대로 타격 컨디션이 떨어지면 내 ‘기록’은 어쩌지?”
움찔.
맞네, 맞아.
내 예상이 맞았다.
이러면 요 며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설명된다.
1. 오늘 아침, 잘려 있는 채로 발견된 인터넷선.
2. 어제부터 나와 눈도 안 마주치는, 어색한 페이스의 태도.
3. 내가 핸드폰으로 뭔가 하려고 하면 날 끌고 가는 동료들.
4. 결정적으로, 8회까지 0-0이었던 투수전을 끝낸 타자에게 아무도 오지 않은 기자.
5. 서비스, 이삭의 반응.
모든 사건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내 기록을 위해 모두가 입단속을 하고 있는 거지. 퍼펙트나 노히터 전의 덕아웃처럼.’
그렇다고 이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뭐, 내가 깨려는 기록이 그만큼 사기적인 기록이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나? 내가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이 내 덩치를 보고 자주 오해하곤 하는데, 난 꽤 눈치가 빠르다.
지난 세월, 그러니까 한국에서 야구를 할 때 나는 오랜 기간 후보, 아니면 그보다 밑에 있었으니까.
내게 올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늘리려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방법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아, 오늘 경기는 ‘기록’하지 말고 가서 자야겠네. 피곤해.”
움찔.
“흡!”
“콜록, 크앗!”
다들 귀엽네.
* * *
김사범이 떠나고 난 뒤, 라커룸.
“붐이 눈치챈 거 아냐?”
“그렇게 눈치가 좋은 녀석이 아닌데…….”
이삭과 스튜어트가 고개를 저으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챘으면 접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일을 키워 놓은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흠…….”
“미기한테 물어보죠? 그게 제일 낫겠네. 이 계획의 Boss는 미기니까.”
갑자기 서로를 보며 웃는 스튜어트와 이삭.
“그렇네. 책임은 Boss가. 맞지?”
잠시 후.
“그래서, 붐이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거 같다고?”
“제 생각은요. 아까 퇴근하기 전에 저한테 기록이니 뭐니 하는 걸로 봐선 알고 있는 거 같아요.”
“흠, 판이 이미 다 깔렸는데…….”
“어떡하죠?”
이삭의 말에 라커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접어야지. 다 아는데 뭔 재미로 해?”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 놓고 안 하면 좀 창피하지 않아?”
“아니 그러게 왜 이렇게 큰 규모로…….”
“내가 붐의 머리를 때려서 기억을 지워 볼게.”
“그러다가 또 잡혀서 아파할 거 같은데요…….”
쾅! 쾅!
“모두 조용!”
디트로이트의 상징, 미구엘 카브레라가 그동안 보여 주지 않았던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계속 진행하지.”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건 붐도 어울려 주겠다는 뜻일 거다. 접기엔 너무 멀리 왔어. 어차피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기록이니…….”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렇게, 김사범과 나머지 팀원들의 연극이 시작됐다.
그리고 다음 날, 경기 전.
“붐, 오늘도 홈런 칠 거야?”
“쳐야지. 쳐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쳐야지.”
“아하하하하.”
어제와 또 다른 분위기에 론이 은근슬쩍 미기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이 분위기는 뭐야?”
덕아웃에 자신의 배트를 종류별로 진열하고 있던 미기가 론의 질문에 대답했다.
“다 들켰어요. 붐이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요.”
“정말?”
“아마도? 그래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어요.”
“오, 구단을 닦달해서 에이전트에게까지 연락한 나는 뭐가 되는 거야?”
“붐도 받아 주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진행하면 되겠죠.”
“페이스에게만 희소식이군.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으니.”
“그렇겠네요. 살면서 저렇게 연기를 못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저러면서 어떻게 포수 자리에 앉아 있는 거죠?”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들은 원래 본성인 거지. 아무튼, 알겠네. 나도 다시 코치들에게 언질을 하지.”
“고마워요 론.”
미기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경기 전 제출할 라인업을 보던 론이 중얼거렸다.
“붐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다행이군. 알고 있으면 힘들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어.”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는 디트로이트와 토론토의 시즌 6차전입니다.]
[오늘 경기 라인업이 조금 특별하죠?]
[네, 김사범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와서 처음 1번 타자로 나서는 경기입니다. 이 라인업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록이 얼마 남지 않은 타자다 보니, 최대한 많은 타석을 확보해 주려는 거죠. 오늘 홈런을 치면 연속경기 홈런 기록을 8경기로 늘리면서 메이저 경기와 동률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1번 타자가 타석 면에선…….]
“플레이 볼!”
* * *
메이저리그 감독으로 살아온 지 30여 년, 론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다행히 라인업을 보고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군.’
팀의 고참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주도해서 시작한 이벤트가 점점 규모를 불려 가더니, 이제는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건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연속경기 홈런 기록이 대단하긴 하지만…….’
수십 년을 묵은 기록을 갈아치운다면 팀 입장에서도, 개인의 입장에서도 꽤 큰 모멘텀이 될 것 같기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이렇게 모두들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줄 줄은 몰랐다. 팬이든, 기자든, 누군가는 붐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지.
“어제 경기를 보니 붐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어디에 놓든 제 몫은 해 주는 선수니까. 오늘 경기만 블루라이트도 줬지 않나.”
“홈런 때문이면 차라리 주지 않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럼 너무 티가 나잖나. 알아서 할 거야.”
타격 코치와의 사담을 끝내고, 론은 타석에 들어선 붐을 지켜봤다.
[토론토의 선발, 네이트 피어슨이 김사범 선수를 맞아 초구를 던집니다.]
따아악!
우와아아아아!
-Let's get it Boom!!
“그것 보게, 알아서 하는 선수라니까.”
“하하하, 나머지 경기에서 1번 타자로 출장시키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하겠군요.”
“안 그래도 시즌 후반에 퍼지는 선수인데? 지금이 나아. 그래야 ‘진짜’ 경기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줄 테니까.”
[김사범 선수가 36번째 홈런을 쏘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저리그의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1956년의 데일 롱, 1987년의 돈 매팅리, 1993년의 캔 그리피 주니어만 가지고 있던 8경기 연속 홈런 기록에 2021년, 김사범이란 이름이 새겨진 순간이네요.]
[어제 경기부터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었는데, 그걸 부정이라도 하듯 첫 타석, 초구에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대단합니다. 안 좋으면 1홈런, 좋으면 2홈런. 이런 건가요?]
경기 후.
[디트로이트, 2홈런을 몰아친 붐을 앞세워 토론토 전 승리. 시즌 3번째 4연승.
- 디트로이트산 폭격기의 기세가 무섭다. 최근 8경기에서 9홈런을 생산해 내며 상대방 투수들을 폭격하고 있는 ‘붐(사범-킴)’은…….]
“구단 측에서 폭죽 준비가 끝났답니다.”
“아주 신났겠구먼.”
“하하, 뭐, 프런트는 항상 이런 이슈에 목말라 있으니까요.”
“기자들의 인내심도 이미 거의 한계치야. 이 기사도 보면 직접적으로 말만 안 한 것뿐이지 거의 99%는 말해 놨군.”
모니터를 돌려 자신이 보던 기사를 코치에게 보여 주는 론.
“……그렇네요. 최근 8경기 9홈런, 이건 거의 알아봐 달라고 하는 꼴이잖습니까?”
“붐이 내일 제발 홈런을 쳐 줬으면 좋겠군.”
* * *
그리고 다음 날.
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터지는 폭죽 사이에서 대치 중인 두 부류.
관중들의 함성, 아니 괴성 사이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들.
“붐! 붐! 붐! 붐!”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맙소사, 9경기 연속 홈런? 어떻게 해야 이런 기록이 나오는 거야?”
“붐의 배트, 배트를 찾아야 해. 어디 있지? 분명 여기 가방에 넣어 놨을 텐데?”
“60경기, 아니 61경기인가? 38개면…… 시즌 끝날 때쯤엔 80개가 넘는 홈런을 친다는 거잖아? 이게 말이 돼?”
광기 어린 목소리로 목표물을 찾아 좀비처럼 다가오는 선수들을 앞에 두고, 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잠깐! 이게 뭐야? 저 폭죽은 뭐고? 다들 숫자를 잘못 센 거 아냐? 아직 38개야! 40개까진 2개 더 남았다니까!”
그 순간, 론은 생각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붐은 눈치가 없는 선수일 수도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