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81화 (81/175)

81화 김사범, 2021시즌(vs 루이스 세베리노)(1)

어느새 시간은 흘러, 5월 말.

시간이 흐른 만큼 시즌은 진행되었고, 지금 나는 뉴욕에 와 있었다.

“넌 어제 선발등판 했는데 그게 넘어가냐?”

“어, 아주 잘.”

김병헌의 집, 이동일이 껴 있는 일정 덕분에 식사에 초대되었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들고 들어오는 박시윤 ‘전’ 아나운서. 아니, 제수씨.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네, 아주 맛있네요. 오랜만에 먹는 김치라 그런지 꿀맛이에요.”

원체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 평소에 김치를 따로 챙겨먹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 먹게 되면, 내 몸에 잠들어있는 한국인의 피가 끓는 것 같다.

“다행이네요. 차린 게 없어 걱정했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식탁 위에 음식이 너무 많은데…….

잠시 음식들을 보며 이걸 다 먹어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을 때, 김병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요즘 잘나간다며?”

“잘나가지, 지금 이거 너도 잘나간다고 말해 달라고 하는 거지?”

“당연하지.”

9경기 6승 2패, 방어율 2.9

5선발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거의 1선발급 활약을 하고 있는 김병헌이다.

“나를 안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라, 이번에 만났으면 방어율이고 뭐고 다 확 올랐을 테니까.”

50경기 27홈런.

나는 꾸준하게, 그리고 가끔 몰아치며 홈런 개수를 늘리고 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난 타자라 방어율 상관없는데?”

“아니 그 말이…… 후, 너답다. 언제나 항상 재수 없는 모습이야. 으으악!”

아, 나 이거 TV에서 봤어. 지금 식탁 밑에서 꼬집혔거나 발을 밟혔거나 했겠네.

“고운말 쓰기로 했잖아요.”

“아…… 미안…….”

누나는 무섭다.

얼추 식사가 끝나갈 때쯤, 아직도 와구와구 밥을 먹고 있는 김병헌을 보니 괜히 괴롭히고 싶어졌다.

“야, 너네 투수들 정보 좀 풀어 봐라.”

“……너라면 말하겠냐?”

“아니.”

“근데 왜 물어?”

음…….

“너도 폴리 같을 줄 알았지.”

“뭐?”

“그런 게 있다. 잘 먹었어요 제수씨.”

둘이 원래 친했거든. 그것도 엄청. 다큐멘터리에도 같이 나왔고.

“형수님이다.”

형수는 개뿔. 내가 너보다 10년은 더 살았거든?

“고마워요 사범 씨.”

혼자 말하는 김병헌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다음 날. 양키 스타디움

“미기, 몸 상태는 어때요?”

“아, 좋아. 어제 좀 쉬었더니 많이 나아졌어.”

시즌이 시작된 지 50일 정도, 그간 연승, 위닝시리즈 행진으로 휴식을 취해야 할 베테랑 선수들이 제대로 휴식일을 부여받지 못하면서 슬슬 힘에 부쳐하고 있다.

“힘들면 좀 쉬세요. 물론 미기가 없으면 타선이 헐거워져서 팀은 힘들 거고, 다른 타자들은 부담이 갈 거고, 상대방 투수들은 환호할 테지만.”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는 미기.

“칭찬이야, 욕이야? 그것보다 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 질문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미기와의 수다 타임이 끝나고, 멀뚱하게 해바라기씨를 씹고있던 폴리와 이삭을 잡아다가 러닝을 시작했다.

“오늘 선발이 루이스 세베리노? 맞나?”

“어. 분석지 좀 읽어라.”

“난 투수라 그런 거 몰라. 타자만 잘 알면 됐지.”

언제나 활발한 폴리. 갑자기 어제 만난 김병헌이 떠올랐다.

“야, 폴리”

“왜? 붐?”

“너 평균 구속 얼마지? 대충 97마일쯤 되나?”

“그 정도 될걸?”

“세베리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8마일쯤 된대.”

“어?”

“그것도 한 경기당 100개씩 던지면서.”

장작은 넣었는데…….

“그래서 지금 내 구속이…….”

“그만, 뛰기나 해. 여기 양키스 덕아웃 앞이다.”

이삭의 적절한 커트로 불완전 연소로 끝나고 말았다.

‘폴리가 예민한 성격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렇게 놀리지도 못하고.’

난 바보 같은 폴리가 참 좋다.

* * *

[오늘 경기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경기입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뉴욕 양키스의 시즌 첫 맞대결! 4연전의 첫 경기를 함께하겠습니다.]

[아쉽게도 김병헌 선수와 김사범 선수의 맞대결은 불발이 됐네요. 4연전이면 로테이션의 투수 중 대부분이 나서는 경기인데, 아쉽게 됐어요.]

[그래도 중간에 이동일이 하루가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김병헌 선수의 위상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맞대결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고, 오늘 선발인 루이스 세베리노 선수에 대해 말해 볼까요?]

[3년째 양키스의 1선발을 맡고 있는 선수죠? 선발 투수로서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8마일, 80마일 후반대에서 90마일 초반대의 날카로운 슬라이더가 주 무기입니다. 그 외에도 80마일 초반대의 체인지업이 있는데 이 구종도 무브먼트는 크지 않지만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는 데에는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번 시즌에 달라진 점도 있다면서요?]

[보통 파워피처들은 나이가 들면서 힘에 부치거든요? 그래서 그라운드 볼을 유도하기 위한 공을 하나둘 장착하곤 하는데, 세베리노 선수도 역시 이번 시즌에 커터를 장착했습니다. 근데 이게 아주 재미있는 효과를 냈어요.]

[재미있는 효과요?]

[그라운드 볼 유도를 위해 장착했는데, 오히려 이 구종으로 삼진의 탑을 쌓고 있습니다. 최고 구속 94마일까지 나오는 공이 끝에서 갑자기 툭! 하고 꺾이니까 타자들이 도저히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하하, 아이러니한 상황이네요. 이제 국가가 울리고, 경기 시작합니다.]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오늘 내 타순은 3번, 최근 닉이 컨디션이 좋아서 요즘은 주로 3번으로 나서고 있다.

“크리스, 오늘 투수가 크리스하고 비슷한 타입 아니에요?”

어제 투구한 뒤, 편하게 쉬고 있는 크리스에게 찾아가 물었다.

“음? 그렇지. 주로 쓰는 구종도 그렇고.”

“타석에서 뭘 때려야 잘 때렸다고 양키 스타디움에 소문이 날까요?”

“……나랑 비슷한 타입이라고 해놓고 그런 질문 하니까 느낌이 이상한데? 음…… 제일 쉬운 건 실투로 들어오는 포심을 노리는 거 아냐? 경기 초반엔 그게 낫겠지.”

“음, 카피.”

크리스와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여러모로 업그레이드 된 투수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딱 한 계단 위인 선수? 비슷한 주 무기를 가져서 던지는 스타일은 비슷하지만.

그런 좋은 투수를 상대하는 우리 팀의 선발?

‘당연히 케이시지.’

대(vs)에이스 전문가, 로테이션계의 불운아. 그 외 등등. 우리가 붙여 준 수많은 별명이 존재하는 이 시대의 상남자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하하, 순식간이네.

이러다가 대기타석으로 나가는 사이에 내 타순이 돌아오겠어.

내 예상대로, 대기타석에서 공을 지켜볼 시간은 아주 짧았다.

[루이스 세베리노 선수가 공 8개로 투아웃을 잡아냈습니다.]

[구위가 워낙 좋은 투수고, 제구도 따라 주다 보니 타자들이 첫 타석에서는 배트에 공을 맞추기 힘듭니다. 1, 2회에 약점을 보이는 다른 투수들과 조금 다른 점이죠.]

예전에 프로에서 뛰면서 150km 중반의 공을 상대했을 때, 호기심이 생겼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98마일,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는데, 타석에서 그런 투수의 공을 보면 어떤 느낌일까?’

메이저리거가 된 뒤, 그 궁금증이 풀렸다.

평범한 공을 상대하는 템포가 ‘쳐야지! 따악!’ 이라면 100마일에 근접할수록 ‘쳐…… 딱!’ 이 된다.

생각할 시간이 없이, 공이 보이자마자 배트를 휘둘러야 타이밍을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뭐, 예전엔 보여도 못 쳤는데. 지금은 보이면 치니까.’

타석에 들어서서 타격 자세를 잡고 투수를 바라보니 느껴지는 기운.

최근에 느끼는 건데, 리그 탑급 투수들은 자신의 아우라를 경기장 안에 풍기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만화나 드라마처럼 사람 등 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건 아니지만…… 경기를 지배하려고 하는 느낌? 자신감?

‘지금 세베리노가 저 정도인데, 예전에 리그를 정복했던 투수들은 어땠을까?’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항상 타석에 들어설 때면 느껴지는, 날 내려다보는듯한 투수의 눈빛.

맘에 안 든다.

[세베리노 선수, 와인드업…….]

그의 오른팔에서 공이 뿜어져 나왔다.

정말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패스트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에는 100이라는 숫자가 떠 있다.

메이저에서 종종 겪어본 구속이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제구를 같이 겪은 적은 없었는데…….

‘바깥쪽 낮은 코스, 완벽하게 모서리를 찔렀어. 폼은 간결. 디셉션이 완벽하진 않은 것 같다.’

초구에서 얻은 정보를 정리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투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세베리노.

구위가 좋으니 별 고민이 없겠지.

2구, 또다시 패스트볼.

타악!

“파울!”

두 번 당할 순 없지.

사실 꽤 진지하게 한 스윙이지만, 생각보다 높이 들어와서 공의 아래를 때렸다.

‘2-0, 몰리면 재미없는데.’

마음속에 설정했던 존을 반개씩 넓히며 좀 더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3구, 체인지업.

보였다.

[아, 김사범 선수, 카운트가 몰렸습니다.]

[보통 타자들이 굉장히 약해지는 볼 카운트인데요. 김사범 선수도 예외는 아닌 게 2-0에서 2할 4푼 대의 타격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이야기일까요?]

[투수 입장에서 굉장히 유리한 카운트죠.]

빠아악!

존 아래로 떨어지는 낮은 체인지업.

영상 자료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잡은 낙폭보다 훨씬 크게 떨어진 공이 배트 끝에 맞았다.

울리는 손의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타구를 지켜봤다.

“파울!”

[아, 거의 원바운드가 될 거 같았던 체인지업을 걷어 올려 봤던 김사범 선수입니다만…… 폴대 밖으로 벗어납니다.]

[보통 이런 타격을 보게 되면 당연히 나쁜 쪽의 결과를 예측하게 되는데, 김사범 선수의 경우는 워낙 이런 상황에서 홈런을 많이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대를 하게 되네요.]

세베리노가 공을 돌려받고 마운드를 고르고 있다.

홈구장, 1회 초에 공을 열개 남짓 던지고 마운드를 저렇게 고르고 있다는 건,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4구.

그의 주 무기인 슬라이더가 존을 향해 다가왔다.

‘바깥쪽, 멀다!’

각이 큰, 마치 독을 가득 품은 독사 같은 슬라이더.

이건 정말 잘 참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스트라이크! 아웃!”

뭐?

* * *

디트로이트의 덕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찾아온 김사범의 삼진에 덕아웃의 동료들은 살짝 웃음 지었다.

물론 동료가 삼진을 당한 건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그간 김사범의 선구안을 두 눈으로 봤던 선수들은 ‘와, 투수가 정말 쩌는 공을 던졌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으니까.

그렇게 약간의 술렁임이 지나간 후, 타석에서 움직이지 않는 김사범의 모습에 모두들 이상함을 느꼈다.

“왜 안 나오지?”

“설마?”

홈플레이트의 측면에 위치한 덕아웃에선 우타자인 김사범의 몸에 가려서 자세한 상황을 볼 수 없었다.

“감독님.”

“맡기겠네.”

그리고 그간의 경험으로 상황을 짐작한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성과 함께.

“헤이! 구심! 그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야!”

“볼 판정에 대한 항의는 퇴장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눈이 한쪽에 몰려 있는 심판 상대로는 그래도 돼! 그게 스트라이크라고? 정말? 내가 한번 시험해 볼까?”

“경고합니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 사무적으로 대꾸하는 구심과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론 가든하이어 감독.

“이런 제기랄! 좋아, 그게 스트라이크라 이거지? 좋아, 우리 투수들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할 테니까 한번 잘 잡아 보라고. 결국 당신은 시즌이 끝나고 마이너 경기에 처박힐 테니까!!”

구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퇴장!”

“내 발로 나가! 나도 이따위 구심하고는 같이 일 못해!”

뒤늦게 말리러 나온 코치들을 뿌리친 채 스스로의 발로 덕아웃을 나가는 감독.

쾅!

복도에 있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아, 아무리 봐도 이건 볼인데요. 지금 현지 방송사에서도 여러 각도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만, 구심의 잘못된 판정인 것 같습니다.]

[론 가든하이어 감독도 강하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했죠? 이건 경기가 끝난 뒤 이야기가 나오겠네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는 1회 말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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