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김사범, 2021시즌(노려지는 자 vs 노리는 자)(1)
슈욱- 펑!
“스트라이크!!”
크리스의 슬라이더가 타자의 몸쪽으로 예리하게 꺾여 들어갔다.
점점 더 강해지는 타자들과 세밀해지는 전력분석을 상대하기 위해 현대 선발 투수들은 보다 더 다양한 구종을 던지고 있는 추세다.
기본 3개, 많으면 4~5개의 구종을 던지는 투수들 사이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단 2개의 구질,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로 200이닝 이상을 던질 수 있던 배경에는 바로 저 슬라이더가 있었다.
[크리스 아처 선수의 슬라이더가 탬파베이의 1번타자 바이달 브루한 선수의 몸쪽을 예리하게 찔러 들어갑니다.]
[스위치 타자죠? 아무래도 아처 선수의 투구 패턴이 오른손 타자에게는 슬라이더, 왼손 타자에게는 체인지업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초구부터 슬라이더가 들어올 거란 생각을 못 한 거 같아요.]
바이달 브루한. 주루능력이 위협적인 타자다.
……라고 경기 전에 본 분석자료에 적혀 있었다.
‘매년 로스터 변동이 많은 팀이라 꽤 마주치는데도 항상 새로운 기분이네.’
따악!
2구째, 상대 타자가 바깥쪽 패스트볼이 살짝 높이 들어간 걸 놓치지 않고 휘둘렀다.
3-유간을 빠져나갈 것 같은 타구.
나는 몸을 던졌다.
턱
왼손에 낀 글러브에 느껴지는 감촉. 잡았다.
제대로 자세를 잡고 송구하면 무조건 늦는다.
펑!
“세이프!”
[아, 김사범 선수의 송구가 살짝 늦었습니다. 타자 주자는 1루에서 세잎!]
[아쉽네요. 김사범 선수가 슬라이딩을 하고 난 뒤 탄력을 살려 일어서면서 송구를 했는데 브루한 선수의 발이 조금 더 빨랐습니다.]
짝짝짝!
아쉬움에 땅을 고르고 있자 마운드 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붐! 좋은 수비였어!”
좋긴 뭘, 결국 세이프인데.
‘주자가 미기나 스튜어트였으면 무조건 아웃인데. 하하.’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게임에 집중할 시간이다.
[타석에 2번타자 완더 프랑코 선수가 들어섭니다.]
[이번 시즌 탬파베이의 히트 상품이죠? 저번 시즌 중간부터 메이저리그에 콜업 돼서 ROY 조건은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만약 조건이 성립됐다면 유력한 신인왕 후보가 됐을 겁니다.]
[기록을 보면 타율이 3할 4푼, 출루율이 4할 2푼, 장타율이 5할 3푼입니다. 강타자의 기본 조건이라 불리는 3-4-5에 부합하는 선수네요.]
[마이너 시절엔 게레로 주니어만큼 주목받던 선수였습니다. 실제로 기록도 비슷했죠? 하지만 나이가 더 어립니다.]
[투수, 초구 던집니다!]
“뛴다!”
“……볼!”
“세잎!”
크리스가 초구를 던지고 5초 남짓 지난 시간, 2루 베이스 위에는 주자와 몸이 엉켜 있는 이삭의 모습이 보였다.
‘페이스가 일부러 초구를 하이 패스트볼로 선택한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도루에 성공했다고?’
콜이 떨어지고, 타자의 타임 요청에 의해 잠시 멈춘 그라운드. 이삭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켜 주는 사이 주자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갑자기 날 보며 크게 미소 짓는 녀석.
‘요놈 봐라?’
[2루에서…… 세이프입니다!]
[정말 발이 빠르네요. 사실 이 상황을 디트로이트의 포수인 페이스 선수가 예상을 했던 것 같거든요? 느린 화면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서 초구를 높은 공으로 뺍니다.]
[아, 네. 그러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루에서 살았단 말이죠. 이건 바이달 브루한 선수의 발이 그만큼 빠르다는 겁니다.]
유망주들의 도발에 넘어가기에는 내가 야구를 한 기간이 너무 길다.
살짝 울컥했던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고 다시 내 수비 위치로 향했다.
무사 2루, 초구 역시 볼이 선언되면서 1회부터 투수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 됐지만, 크리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본인의 루틴을 이어갔다.
‘역시 베테랑이네.’
그리고 시작된 환상적인 투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2구와 3구 모두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최근 들어 두 가지의 패스트볼을 섞어 던지는 크리스 아처 선수입니다. 기존의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성 움직임을 보이는 패스트볼인데요, 두 가지의 패스트볼이 구속 차이가 거의 안 나요. 타자 입장에서는 패스트볼이 계속 변하는 것 같을 겁니다.]
[3구째에 배트를 강하게 휘둘러본 완더 프랑코 선수입니다. 하지만 배트엔 맞지 않았습니다.]
헛스윙 뒤에 고개를 갸웃하는 타자의 얼굴이 보였다.
타이밍이 맞았는데 공이 도망가니 이상했겠지.
“흐압!”
크리스가 기합소리와 함께 던진 슬라이더가 몸쪽을 향해 날아갔다.
따악!
펑!
“아웃!”
“세이프!”
[프랑코 선수, 쳤습니다! 김사범 선수 정면타구! 잡고 바로 2루를 향해! 아, 아쉽게도 병살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꽤 빠른 타구가 내 정면을 향해 왔다.
원아웃.
공을 잡자마자 내 근처에 있던 브루한을 잡을 것처럼 대쉬했다.
헐레벌떡 귀루하는 녀석. 꼴좋다.
하지만 아직 원아웃 2루,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페이스의 미트가 춤을 추고, 크리스는 미리 약속한 것처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던졌다.
따악!
무사 주자 2루에서 공수 교대까지, 아웃카운트 3개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덕아웃으로 향하며 2루에서 헬멧을 벗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툭 쳐줬다.
그러게. 도발을 하려면 좀 세련되게 해야지.
* * *
덕아웃에서 장비를 챙기며 상대 선발 허니웰의 연습투구를 지켜봤다.
오늘의 타순은 1번 이삭, 2번 나, 3번 스튜어트, 4번으로 미기가 나선다.
옆에서 자신의 배트를 뽑아들고 있는 이삭이 마운드를 보며 말했다.
“공은 좋은 거 같은데…… 좀 아쉬운데?”
“그러게, 근데 안 나가?”
“나가야지.”
이삭의 말마따나 세간의 평가에 비해 구위가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 정도 구위로 블레이크 스넬보다 더 많은 이닝, 승리를 거뒀다고?’
대기타석에 도착하자 때마침 마지막 연습구를 던지는 브랜트 허니웰.
‘어?’
조금 이상한 느낌의 공이 포수의 미트에 박혔다.
‘체인지업? 커브? 이게 그건가?’
아무래도 타석에 들어가 제대로 봐야 감이 올 거 같다.
“스트라이크!”
[허니웰 선수가 던진 패스트볼이 바깥쪽 존을 통과합니다. 카운트는 2-2]
[데이터 상이나 화면에 비춰지는 모습으로 보아 구위가 뛰어난 패스트볼은 아니지만 뛰어난 제구를 가지고 있네요. 비록 볼이 됐지만 3구째에 던진 커브도 무브먼트가 아주 괜찮았습니다.]
[허니웰 선수, 5구를 던집니다!]
후웅!
펑!
“스트라이크! 아웃!”
[아, 드디어 나왔네요. 허니웰 선수의 스크류 볼입니다.]
[언뜻 보면 커브와 비슷한 궤적인데 반대로 휘는 보습이 보일 겁니다. 구속도 84마일 정도로 비슷하네요.]
스윙 아웃을 당하고 덕아웃으로 향하는 이삭에게 물었다.
“어때?”
“체인지업이 아니라 커브 느낌이야. 왼손투수.”
“좋아. 수고했어.”
조금씩 이미지를 잡으며 타석에 들어서자, 앉아있던 포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 유명인사가 마침내 타석에 방문해 줬군. 반가워.”
저번 시즌엔 못 봤던 거 같은데. 루키인가?
“그래.”
“오늘도 ‘붐 샷’ 보여 줄 거야?”
“그게 뭔데?”
“요즘 인터넷에서 네 홈런을 보고 하는 말인데. 몰랐나 보지?”
“음…… 인터넷을 잘 안 해서.”
“하하, 그렇군.”
뭔가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만하지, 잡담은 경기장 밖에서 만나서 하도록.”
“옙.”
저번 시즌엔 루키라고 놀림 받고 날선 반응이 전부였는데. 1년이라도 커리어를 쌓았더니 다른 반응이 보인다.
‘나중에, 내가 누구도 넘보지 못할 커리어를 쌓으면…….’
머리에 꽃밭이 펼쳐졌다.
딱 초구를 지켜보기 전까지는.
펑!
“볼.”
[허니웰 선수, 초구를 몸쪽으로 바짝 붙였습니다.]
어우씨, 깜짝 놀랐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포수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한껏 휘어져 있었다.
‘내가 잊고 있었네. 포수란 인간들이 어떤 족속들인지.’
살짝 나를 적셔 오는 창피함에 애꿎은 배트를 두어 번 땅에 두드렸다.
그리고 2구.
투수의 손에서 떠난 직구가 높은 코스로 다가온다.
내 몸쪽으로.
‘피해야 하나?’
컨트롤이 좋은 투수다. 실투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 공이 손에서 빠졌나요? 김사범 선수의 등 뒤로 향하는 공입니다! 포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우와…… 김사범 선수 미동조차 없네요. 공이 뒤로 빠지는 순간에도 투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공을 놓고 홈플레이트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이어진 투수와의 눈싸움은 허니웰이 먼저 꼬리를 내림으로서 끝났다.
타격 자세를 잡으며 포수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게 전부야?”
“음?”
“아직 못 해본 게 있으면 다 해보라고. 미련 남지 않게.”
뭐라 달싹이는 입에서 시선을 돌려 타격자세를 취했다.
잠시 이어진 사인 교환, 그리고 4구.
“스트라이크!”
이 정도로 꽉 찬 코스에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었으면서 그랬단 말이지.
“스트라이크!”
4구는 몸쪽을 타고 들어온 커브.
오히려 2구째 위협구보다 이 공에 몸이 움찔거렸다.
[2볼 이후 2개의 스트라이크를 연달아 잡아내는 허니웰 선수입니다. 투수도, 타자도 긴장되는 카운트!]
[아마 그 공을 던질 겁니다. 주 무기니까요.]
5구, 모두의 예상대로 스크류볼이 왔다.
처음 보는 공, 살짝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공이 존 가운데서 몸쪽을 향해 말려들어온다.
순간 생각나는 페이스의 조언.
‘함정을 깔아서 시즌 후반에…….’
음…… 페이스. 난 글렀어.
따아아악!
-LET'S GET IT BOOM!! BOOM!! BOOM!!
[김사범 선수, 스크류볼을 받아쳤습니다! 이 공은 아주 멀리, 멀리 날아갑니다! 하늘을 가르는 김사범 선수의 타구!]
[제대로 받쳐 놓고 때렸어요. 이런 종류의 공은 생소함에서 오는 낯설음이 제일 큰 무기인데 전혀 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가운데 담장을 넘겼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시즌 14호 홈런! 시즌이 시작하고 37경기 만에 쏘아 올렸습니다!]
[하하, 대충 계산해도 60홈런 이상을 바라보는 페이스네요. 김사범 선수답습니다.]
1루, 2루, 3루를 조깅하듯 뛰어 홈플레이트에 도달했다.
마침 눈에 띄는 탬파베이의 포수.
“다음번에 만날 땐 공부터 잘 잡으라고. 포수는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
가볍게 멘트를 날려 주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때릴 만해? 어때?”
“때릴 만했으니까 때렸겠지! 아오! 이 괴물!”
덕아웃에 들어서자마자 팀 동료들이 축하가 쏟아졌다. 이젠 이 정도로 안 기뻐해도 되는데. 그냥 일상 아닌가?
음료수를 마시러 라커룸 한구석에 있는 냉장고로 가는 길에 크리스에게 물었다.
“더 필요하신 거라도?”
내 질문에 씨익 웃으며 대꾸하는 크리스.
“이 정도면 충분해, 맨.”
아무렴요.
* * *
대단한 투수는 대단하다.
아니, 한 번이라도 대단했던 선수는 언제나 대단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대단이란 단어를 이렇게 대단하게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1회가 끝나고 보여 준 아처의 피칭 때문이다.
[아, 크리스 아처 선수, 2회부터 7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삼진을 잡아내면서도 투구 수가 크게 많지 않아요. 이 말은 공격적인 투구를 한다는 이야긴데, 말이 공격적인 투구지 맞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존 안에 공을 집어넣는, 아니 꽂는다는 이야기거든요? 구위도 구위지만 저런 피칭이야말로 크리스 아처 선수의 아이덴티티입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2이닝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4회.
딱!
[크리스 아처 선수의 4구째 슬라이더를 받아 칩니다! 이 공은 2루수 정면으로! 아웃입니다!]
[타순이 한 바퀴 돌자 바로 투구 패턴을 바꾼 거 같죠? 각이 큰 슬라이더를 이용해서 삼진을 솎아 내던 앞선 이닝과 달리, 각이 작고 구속이 빠른 슬라이더를 이용하며 맞춰 잡는 피칭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저번 경기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을 받진 못했는데.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크리스는 뭔가…… 거대해 보였다.
4회 초가 끝나고, 덕아웃 앞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던 아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더 필요하신 거라도?”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조금 더 열정적인 선수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