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73화 (73/175)
  • 73화 김사범, 그리고 페이스의 페이스(2)

    “페이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페이스가 날 바라봤다.

    “웬일이지? 이 시간에?”

    “이 시간까지 뭐하고 있는 거야?”

    “정리할 게 있어서. 구단 자체 기록들은 여기서만 볼 수 있으니까.”

    “매일 이렇게 따로 남아서 정리했던 거야?”

    “거의. 구단에서 제공하는 자료들로는 부족해. 내게 필요한 자료들은 거의 없기도 하고.”

    지금이 스프링 캠프 기간이니 가능한 일이다. 비교적 일정이 한가한 편이니까.

    ‘설마?’

    “그럼 일본에서도……?”

    “항상. 나는 포수니까. 상대 타자에 대한 자료는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대단하네. 물론 나도 경기 전에 상대팀, 그리고 올라올 투수에 대한 자료를 주의 깊게 보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살펴보진 않는다.

    어느새 다시 자신의 노트북에 집중하고 있는 페이스.

    “음, 가야겠네. 그럼.”

    “그래. 잘 가.”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말하더니, 다시 화면에 집중하는 페이스.

    위이잉.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가려고 할 때, 프린터에서 자료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뭘 뽑은 거지?’

    호기심에 나가면서 슬쩍 바라본 첫 페이지는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는 히팅 맵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경기 전,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내 시야에 불펜 쪽에서 나오는 버로우즈가 보였다.

    “오늘은 좀 진정된 거 같네.”

    옆에서 같이 몸을 풀던 이삭이 내 말에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좀 오래 뛰자. 슬슬 몸이 풀려 가는 거 같거든.”

    이삭의 말에 대꾸하는 동안 내 눈은 계속해서 불펜 쪽을 향해 있었다.

    곧 버로우즈를 따라 나오는 페이스.

    ‘뭐지?’

    둘이 아직 풀리지 않은 건가? 하긴, 어제 그렇게 다퉜는데 오늘 풀리는 건 좀 이상하긴 하다.

    “체중이 너무 늘어서 온 건 맞는데, 그 덕분에 타구에 힘은 좀 붙은 거 같아. 역시 엄마의…….”

    “그래, 그러네. 그럼 뛰자 돼지야.”

    그 후, 난 꽤 오랜 시간동안 뛰어야 했다.

    “잠깐 라커룸 좀 갔다 올게.”

    이삭과 러닝, 아니 추격전을 하다 보니 언더셔츠가 다 젖었다. 날씨가 좋아 감기에 걸릴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몸에 쩍쩍 달라붙는 언더셔츠를 벗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뒤틀다 보니, 내 시야에 꽤 두꺼운 종이뭉치가 보였다.

    ‘어? 저 히트 맵은?’

    어제 분석실을 나오기 전 히트 맵이다.

    저렇게 가운데로 모여 있는 히트 맵이 여러 개가 있진 않을 테니까.

    언더셔츠를 마저 갈아입고, 다시 이삭과 운동을 하기 위해 나가는 도중, 종이뭉치가 놓여 있는 캐비닛의 이름을 확인했다.

    ‘역시.’

    뷰 버로우즈.

    ‘어제 만들었던 자료는 버로우즈를 위한 거였나?’

    이제야 페이스의 성격이 어떤지 알 거 같다.

    어릴 때, 내가 많이 듣던 소리였으니까.

    ‘츤데레’

    그래. 내가 볼 땐 페이스는 츤데레다.

    * * *

    시범경기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케이시에게 물어봤다.

    “너도 받았어?”

    “뭘?”

    “페이스한테 자료.”

    “받았지.”

    “그래서 호의적으로 변했던 거구만?”

    내 말에 케이시가 물을 마시며 대꾸했다.

    “내가 맞은 홈런을 구종별, 코스별, 상황별로 정리해서 보여 주던데? 스플리터의 피홈런율이 높은 건 알았지만 자세한 수치는 몰랐거든.”

    “아.”

    “투수는 포수를 가려, 왜냐하면 사람이니까. 싫어하는 녀석이 내 공을 받고 있으면 괜히 짜증 나지. 사람들이 배터리라 부르면서 하나로 묶는 게 그런 이유에서겠지.”

    “그렇지.”

    “그런 배터리의 구성 중 하나가 더 나은 피칭을 위해 그 정도로 노력하는 게 보이는데, 그걸 싫어하는 투수가 있을까?”

    “음.”

    “표현 방식이 조금 와일드하긴 하지만, 근거 없이 말하는 편은 아니니까. 내 생각엔 이 캠프에 있는 모든 투수들의 자료를 정리해 놨을걸? 메이저리그 로스터 말고, 40인에 포함되어 있는 녀석들까지.”

    “설마,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양인데?”

    “난 확신할 수 있어.”

    음. 예전에도 이렇게 팀에 녹아들었나 보네.

    참 힘들게도 산다.

    그리고 멋지게 살기도 하고.

    * * *

    체감상 참 길게 느껴졌던 캠프가 끝났다.

    항상 해 왔던 것과 다르게 몸을 늦게 끌어올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훈련보다 인터뷰가 더 힘들었다. 거의 매일, 돌아가며 인터뷰를 하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 기다렸던 2021시즌 개막 첫 경기가 시작됐다.

    “와우, 우리도 우리지만 저기도 다들 얼굴이 하얗네. 못 보던 애송이들이 많아졌어.”

    “폴리, 너도 작년까진 애송이였어.”

    “그럴 리가. 난 그랬던 적이 없어.”

    거만하게 말을 내뱉는 폴리에게 2년 전 우울했던 시절을 보여 주고 싶다.

    내가 SNS를 안 한다는 게 갑자기 참 아쉬웠다.

    그렇게 아쉬움을 삼키며 화이트삭스 쪽을 보니, 폴리의 말대로 작년보다 생동감 넘치는 덕아웃이 보였다.

    경기 시작 직전.

    론이 갑자기 선수들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2021시즌의 첫 경기다. 시작을 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이기자.”

    이 장면을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불안한데…….

    그리고 잠시 후.

    “스트라이크! 아웃!”

    [크리스 아처 선수가 또 하나의 삼진을 잡아냅니다! 8개째의 삼진!]

    [그동안 주 무기인 슬라이더에 이은 서드 피치로 체인지업을 연마해 왔는데, 이제 거의 정착된 모습입니다. 그동안 단조로운 투구패턴으로 경기 후반에…….]

    크리스의 호투와.

    따아악!

    -Let's get it boom! boom! boom!

    [관중들이 김사범 선수의 시즌 첫 홈런을 입을 모아 축하하고 있습니다! 좌측 담장을 넘기는 김사범 선수의 시즌 첫 홈런!]

    내 홈런.

    [페이스 달턴 선수! 데뷔 경기에서 자신의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이 홈런으로 스코어는 7:0! 디트로이트가 2021시즌을 산뜻하게 시작할 것 같습니다!]

    [일본 야구 시절에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였는데요. 그래서 이번 포스팅 신청을 모두 의아해했었죠? 오늘 모습이 그 대답이 될 거 같네요.]

    이어진 페이스의 홈런으로 우린 간단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좋아!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경기였네. 모두 이렇게만 하면…….”

    선수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팀 전체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던 론이 시즌에 돌입하자 갑자기 라커룸에서 말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역할을 대신하던 미기와 닉은 조금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다른 선수들과 잡담을 나눴다.

    팀의 변화. 선수들도, 코칭스태프도, 그리고 프런트 역시. 우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휴식일.

    [그래서, 고민하던 건 해결됐어요?]

    “수리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 줬어요. 고마워요.”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항상 고맙다고만 하네요, 사범 씨는.]

    “어…… 그냥 왠지 자주 쓰게 되네요.”

    [그럼…… 저도 고마워요.]

    “네? 하하하, 이런 기분이었어요?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네요.”

    [아핫핫! 저도 그랬어요. 아 맞다, 화이트삭스는 어때요?]

    음. 야구 이야기는 하기 싫은데.

    “뭐…… 그냥 그랬어요. 좀 달라진 거 같긴 한데, 딱히 임팩트가 없어서…….”

    [내 취미가 뭔지 말해 줬죠?]

    “말해 줬어요. 전화로 2시간 넘게.”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어요?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가서…….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 시즌에 화이트삭스,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요.]

    말이 갑자기 빨라져서 잘 듣진 못했는데,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휙 지나간 느낌이다. 화이트삭스 그런 거 말고.

    “그래요?”

    [팜의 유망주들이 폭발 직전이에요. 스카우터들이 말하는 툴뿐만 아니라 세이버상의 지표로도 이미 저번 시즌 후반기에 리그 수준을 초월했거든요.]

    “음…….”

    [4월 이후, 화이트삭스 로스터에 큰 변화가 생기면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지만 루키 몇이 합류한다고 해서 팀이 크게 바뀌진 않아요.”

    만약 그렇게 리빌딩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오늘도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있을 프런트 직원들은 모두 해고당할 거다.

    [2020시즌의 디트로이트는요?]

    아.

    “그건 좀 비교하기엔…….”

    [왜요? 사범 씨가 있었다고요?]

    “네. 그렇죠?”

    분명 겸손하게 대답하자라고 머리로 생각했는데…… 척수에서 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핫핫! 역시, 사범 씨와 이야기하면 너무 재미있어요.]

    좀 재수 없게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하아, 내가 너무 크게 웃었죠?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후우. 이제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네요. 아까부터 아빠가 자꾸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아…….”

    [내일 경기도 힘내요, 사범 씨!]

    그 뒤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통화가 종료됐다.

    힘내요 사범 씨…….

    내일은 특히 더 힘을 내야겠네.

    * * *

    화이트삭스와의 2차전, 힘을 내야 하는 날이 밝았다.

    빠아악!

    빠악!

    따아악!

    경기 전, 배팅 케이지에서 나온 내게 미기가 말을 걸었다.

    “붐. 오늘 기분 좋은가 봐? 타구가 무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이 정도야 뭐, 보통이죠. 원래 힘!은 알아주잖아요.”

    “음…… 뭐 그렇긴 한데.”

    하루를 쉬고 하는 경기라 그런가?

    오늘 컨디션은…… 최고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화이트삭스의 일로이 히네메즈 선수, 또다시 장타를 뽑아내며 팀의 역전을 이끕니다!]

    [1회 1타점 2루타에 이어 4회에도 홈런을 치며 이번 경기, 오늘 경기 본인의 타점을 3개로 늘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3번으로 나선 김사범 선수와 같은 타순입니다. 양 팀 모두 3번 타순에서만 타점이 나왔네요.]

    [1회 초가 시작하자마자 이삭 페레데스 선수와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2, 3루에서 김사범 선수의 2타점 2루타로 앞서나갔거든요?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는 후속타 불발로 김사범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게 아쉽겠어요.]

    경기 시작 전까지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화이트삭스는 전과 달리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웃!”

    4회 말, 조금 긴 수비가 끝나고 난 뒤, 나는 음료수를 들고 장비를 벗고 있는 페이스에게 다가갔다.

    “루키, 메이저리그에 온 걸 환영해.”

    “……고맙다.”

    “그렇게 인상을 쓰면서 말하면 고마운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후, 고맙다.”

    그렇다고 바로 다시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농담이었어. 어때? 두 경기째 메이저리그를 경험해 본 소감은?”

    “여긴 참 괴물들이 많군. 방심하지도 않았고, 코스도 완벽하게 약점을 찌르면서 들어왔는데 그걸 치다니.”

    “그래서 재미있잖아? 사람들이 스카우터들이 말하는 툴을 가지고 욕을 해도, 결국 저렇게 자신의 툴을 증명해 내는 선수들이 존재한다는 게.”

    내 말에 페이스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 그건 맞지만. 아무튼. 하늘 같은 2년 차 선배로서 말해 주는 거야. 저런, 아니 저보다 더한 녀석들을 앞으로 수도 없이 만날 테니까 기죽지 말라고.”

    내가 이 녀석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내 경험상 이런 타입은 실패에 쉽게 무너진다. 지금도 보면 내가 오기 전까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자신을 탓하고…….

    “훗, 이건 웃겼어. 오랜만이군. 이런 유머에 웃는 건.”

    뭐지?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풀렸다. 고맙다.”

    “어…… 그래.”

    뭔가 내가 생각했던 상황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뭐…… 긴장이 풀렸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남은 이닝,

    페이스의 미트가 춤을 췄다.

    “볼!”

    [일로이 히메네즈 선수, 이번 타석에도 걸어서 1루로 향합니다.]

    [디트로이트가 김사범 선수의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한 후, 철저하게 가로막히는 화이트삭스의 타선입니다.]

    [일단 일로이 선수 앞에 주자를 쌓아 놓질 않습니다. 방금도 7회 말에 일로이 선수 앞에서 공격이 끊기면서 선두타자로 나섰거든요? 이렇게 되면 화이트삭스 입장에서는 답답하죠. 일로이 선수가 좋은 타자임은 분명하지만, 좋은 주자라고 볼 수는 없거든요.]

    아까 론을 찾아가 쑥덕대더니, 이렇게 고립시킬 생각이었구만?

    괜히 조언을 하겠답시고 나선 과거의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게 병살과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한 뒤,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이삭에게 말했다.

    “이삭.”

    “왜 또, 이젠 체중도 정상범위야.”

    “그거 말고.”

    “또 뭐?”

    캠프 때부터 하도 놀려 댔더니 이젠 말만 걸어도 날카로운 반응이 날아온다.

    “나 오늘 좀 부끄럽다.”

    내 진솔한 고백에 이삭이 배트를 들며 대꾸했다.

    “내가 너 때문에 이번 타석에서 무조건 홈런 친다. 지금 내가 안타 하나밖에 못 쳤다고 그러는 거지?”

    자기 말만 내뱉고 대기타석으로 향하는 이삭.

    ‘뭐지?’

    그리고 잠시 후,

    [이삭 페레데스 선수의 타구가 가운데 담장을 향해 뻗어 갑니다! 이 타구가! 담장을 넘겼습니다! 시즌 1호 홈런!]

    오늘 나는 두 명의 동료를 각성시켰다.

    그러려던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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