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69화 (69/175)

69화 김사범, ROYMVP?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응? 내가 이 여성분을 만난 적이 있나?

아니 내가 만났던 여성 자체가 손에 꼽는데…….

“아, 아 네.”

자리에 앉으면서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제가 좀 많이 달라졌죠?”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 한쪽이 간질간질한 게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시절 소꿉친구인가? 난 그런 거 없는데.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살풋 웃으며 다시 입을 여는 그녀.

“후훗, 기억이 잘 안 나시나 보네요. 짧은 시간이고,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어요. 수리 베이커예요.”

수리 베이커? 그 마르고 여위었던…… 누나?

“아, 기억납니다. 텍사스에서……?”

“맞아요. 그때하고는 많이 다르죠?”

“네…… 부끄럽긴 한데 제가 못 알아볼 만하네요. 정말 그때의 모습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텍사스에서 본 수리는 비쩍 마른 팔다리에 볼이 해쓱한, 눈이 굉장히 큰 여자였다.

수술이 잘됐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졌을 줄이야.

“그때 사범 씨, 아, 이렇게 불러도 되죠?”

“네,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사범 씨가 해 준 말에 용기를 얻었어요. 사범 씨 말대로 내가 용기를 내니까 좋은 결과를 얻었네요.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아빠를 통해서 에이전트에게 졸랐어요.”

“제가 그때 경황이 없어서 지금 생각해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갑자기 상체를 숙이며 짓궂은 얼굴로 내게 묻는 그녀.

“그때는 지금보다 편하게 말했던 거 같은데, 긴장하셨어요?”

“아, 아뇨. 긴장이라뇨. 그럴 이유가, 아니 그럴 필요, 후.”

긴장했다. 누가 봐도 이쁜 여자가 큰 눈으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긴장이 안 될 리가.

“긴장한 거 같네요. 사실 그땐 수리 씨가 저보다 어린 학생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짐에게 사실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거 칭찬이죠? 아니, 그때 그런 생각을 한 거니까 칭찬이 아닌가? 칭찬 맞아요?”

여기서 그냥 단순히 헷갈렸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냥, 그냥 그렇다.

“칭찬이에요. 사실 지금도 잘 안 믿기는데요?”

“칭찬이 익숙하시네요. 여자에게 인기가 많아서 그런가?”

“네?”

그럴 리가요. 그럼 뭐라도 했겠죠.

“아니에요. 식사 안 하셨죠? 당연한 건가? 여기 셰프가 제가 아주 잘 아는 분인데, 요리를 아주 잘하세요. 기대해도 좋으실 거예요.”

그런 거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는데…….

“원래 이렇게 다른 곳에선 요리를 잘 안 하시는 분인데, 설득하느라 힘들었어요. 여기를 빌려서 통째로 쓰게 해 드린다니까 그때서야 허락하시더라고요.”

아, 진짜네. 진짜 여길 전세 낸 거야.

하하…….

.

.

.

“오늘 즐거웠어요. 사범 씨.”

“저도 즐거웠습니다. 아, 그리고 맛있었고요.”

이런 음식점에서도 그렇게 큰 스테이크가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보다 더 신기했던 건 내가 코스로 나온 요리를 먹고 있을 동안 풀 쪼가리와 빵 조각을 조금씩 먹던 수리였지만.

‘몸이 작아서 저렇게 먹어도 배가 안 고픈 건가?’

김하별을 통해서 여성도 충분히 대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에겐 뭔가 신선하게 다가온 저녁식사였다.

“그럼, 사범 씨 집으론 저기 저 기사님이 데려다주실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즐거웠습니다.”

이쁜 여자와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 못 한 걸 제외하고는 올 한 해 이룬 게 참 많은 기분이다.

“저…….”

“네?”

수리 씨가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다가온다. 설마?

점점 가까워지는 우리 둘.

애는 하나가 좋은가? 그래도 저출산 시대인데 둘은 낳아야지. 그래. 둘이 좋겠어.

“바지에 뭔가 묻었네요. 잠깐만요.”

아.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수리가 등을 돌려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저도요…….”

행복했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나도 질척이지 않고 쿨하게 돌아섰다. 상상은 상상으로 만족해야 하니까.

그렇게 차를 향해 걸어가는 내 등 뒤에서 갑자기 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범 씨!”

뭐지?

“연락해도 되죠? 가끔 이렇게 밥도 같이 먹고요.”

“네!”

“아핫핫! 대답이 너무 빠른데요? 연락할게요.”

여자치고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그렇게 수리가 떠났다.

난 등신이다. 거기서 그걸 그렇게 빠르게 대답하냐.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얼굴을 숨기려고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저씨, 제가 너무 들이댄 건 아니겠죠?”

“하하하, 아니에요. 마음에 든 남자가 보이면 확 잡아야죠. 경쟁자가 낚아채기 전에요.”

“그렇죠? 후, 차 안이 좀 더운데 히터 꺼 주시면 안 돼요?”

“히터는 킨 적 없는데요? 하하,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신호대기를 위해 잠시 멈춘 차 안.

룸미러에 비친 수리의 얼굴이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 * *

10월의 마지막 주, 나는 비시즌기 마지막 TV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나요?”

“아무래도 체력 문제죠. 마이너에서 한 시즌을 보냈지만 메이저리그는 또 다른 리그니까요. 마이너에선 이동시간이나 이런 직접적으로 몸이 힘든 게 많은 반면, 메이저는 경기에서 집중을 하면서 소모되는 체력이 컸어요.”

“그래도 다른 메이저리거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단에서 관리를 잘해 준다던데?”

“물론 구단 차원에서 마사지 같은 관리 시스템이 있긴 한데…… 시즌 후반쯤 되니까 그걸 받는 것 자체도 체력이 소모되는 느낌? 그래도 올해 느낀 게 있으니 다음 시즌부터는 그에 맞게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야죠.”

“아하, 그렇죠. 이번이 첫 시즌이니까 아무래도 막 어리바리하고 그런 면도 있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 팀 동료들이 보기엔 그게 아니었을 거예요. 다행인 건 같은 팀에 1년 차인 루키가 꽤 있어서 티는 많이 안 났겠지만.”

나도 모르게 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이게 MC의 역량인가? 역시 어느 부문이든 프로의 힘은 무섭다.

그렇게 입안이 마를 정도로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갑자기 세트 밖에 앉아 있던 작가가 뭔가가 적힌 스케치북을 막 흔들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짝!

나도 모르게 한참을 집중하고 있자, 갑자기 MC가 박수를 쳤다.

“지금! 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날짜인 10월 26일,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네?”

“아까 계속 작가가 뭘 들고 있는지 빤히 보던데,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각도가 안 좋아서 잘 안 보였어요.”

“이건 우리 제작진과 저와의 사인교환이에요. 함부로 보면 반칙! 지금 사인 훔치기 하시는 거예요?”

“아하하하, 아뇨, 아니에요. 저는 사인을 훔치지 않습니다.”

이걸 그거와 비교하네. 우와.

“좋은 소식이 뭐냐 하면! 바로 메이저리그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신인왕, MVP 후보에 모두 김사범 선수가 포함됐다는 겁니다!”

“우와, 기분 좋은데요?”

거의 99% 확신하고 있었지만 오피셜을 들으니 또 그 나름대로 기분이 좋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요? 너무 밋밋한데?”

“하하하,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이 정도 성적을 냈으면 후보 정도에는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으하하하하, 맞아요.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운 분인데요, 아무렴요. 아이고. 우리 프로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신 분이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과장된 인사를 하는 통에 살짝 당황했다.

“근데, 미국에 안 있어도 되요? 시상식 가야지.”

아 그거…….

“사실 저도 처음에 좀 의아했던건데, 한국야구와 다르게 메이저리그는 시즌 종료 후 따로 시상식이 없다고 해요. MVP 같은 경우는 따로 화상연결을 하기는 하는데, 신기하죠?”

“오, 몰랐던 사실이네요. 땅이 커서 그런가요?”

“아마 그런 거 같아요. 아, 1월 말쯤 따로 행사를 하긴 할 거예요. BBWAA? 전미 야구기자 협회가 주최하는 건데, 만약 상을 타게 되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겠죠.”

“꼭 김사범 선수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발표는 언제쯤인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골드글러브-실버슬러거-신인왕-MVP 순으로 3~4일 텀을 두고 발표할걸요?”

“그 정도면 잘 모르는 게 아닌데?”

내가 받을 상인데, 내가 알고 있어야지.

“하하핫, 제가 언제 상을 받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뱉은 멘트에 MC의 눈이 가늘어진다.

“가만 보면, 되게 안 겸손한데 겸손한 척 조근조근 말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더 겸손한 거 같잖아. 김사범 선수, 특이하단 소리 많이 듣죠?”

“네? 아뇨, 전 특이한 사람이 아닌 야구를 좀 잘하는 보통 사람입니다.”

* * *

[김사범, 2020 골드글러브 수상!

- 메이저리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김사범(21)선수가 오늘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 11.5

[50-50의 김사범, ‘당연한’ 실버슬러거 수상, 한국인 최초.] - 11.9

[AL 올해의 신인왕은 김사범! 30표 중 1위표 30개, 만장일치 수상] - 11.13

[메이저리그 MVP는 누구에게? AL ‘지안카를로 스탠튼’, ‘김사범’ 유력]

MVP 발표 당일, 이른 아침부터 우리 집엔 여러 사람들이 와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MVP 수상 발표와 함께 내보낼 영상을 찍을 MLB.com측 인원이다.

“음료수 마시면서 하세요.”

더 이른 아침부터 하별이와 풀세팅을 마친 어머니는 여러 사람 사이를 누비시면서 음료수를 건네주고 계신다.

우우우웅!

[준비는 잘 돼가요? 긴장한 건 아니죠?]

[아뇨, 괜찮아요. 시즌 끝나고 하도 인터뷰를 많이 해서 별로 긴장 안 돼요.]

[꼭 받았으면 좋겠어요. MVP]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절 찍으려고 집에 왔는데, 설마 아니겠어요?]

“김사범 선수?”

[그렇긴 한데…… 내가 아빠한테 물어볼까요?]

[하하, 괜찮아요. 어제 병원 간…….]

“김사범 선수?”

“으앗!”

김하별이 갑자기 내 발을 밟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저분이 아까부터 부르시잖아.”

아.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 곧 준비가 끝날 거 같은데 준비되셨나요?”

“아, 네. 저는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렇게 잠깐의 대화가 끝나고, 옆에 있는 김하별에게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봤다.

“야, 넌 근데 저번에 공항 땐 사진 찍는 거 무섭다고 안 오더니 여기에는 왜 앉아 있냐?”

“그땐 다이어트 중, 지금은 성공.”

얼씨구?

설득력은 좀 있네.

그리고 마침내, MVP 발표가 났다.

“김사범 선수, 축하드립니다. MVP를 수상하셨네요.”

꺄아아악!

아우 깜짝이야.

“아하하, 감사합니다.”

“이제 연결됐습니다. 3, 2, 1.”

[안녕하세요 붐, 잘 지내고 있나요?]

귀에 꽂은 인이어를 통해서 사회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방금 전 AL MVP에 선정됐는데, 기분이 어때요?]

“당연히 최고의 기분이죠, 지금 이 기분을 옆에 있는 가족들과 디트로이트 팬들, 그리고 팀 동료와 나누고 싶네요.”

[하하, 그런 틀에 박힌 말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요.]

“인생에서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ROY와 다르게 이건 계속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딱 오늘 하루, 최고로 행복해하다가 내일부터 다시 또 이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디트로이트도 나와 같이 노력하고, 날아오를 테니 지켜봐 주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OK, 자신감 넘치는 붐과의 화상연결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아니 날아갈 것 같다.

야구 괴물들이 모인 곳의 1등이라니.

내년에도 나는 이 자리를 뺏기지 않을 거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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