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김사범, 2020시즌(참 힘든, 9월의 시작)
“붐! 여기 봐 줘요!”
“아니 저 사람이 진짜 붐 맞아?”
“미기 아웃스타 봐봐, 낄낄, 진짜 맞다니까?”
“저게 뭐야? 너무 심한 거 아냐?”
휘익!
지금 난 디트로이트의 자랑, 떠오르는 야구스타 붐이 아닌 그저 구경거리, 웃음거리 김사범이다.
* * *
이틀 전.
어두운 차 안에서 두 남자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물건은, 확실하겠지?”
“어렵게 구했어. 하지만…….”
“쉿, 이미 결정된 사안이야. 너도 찬성했잖아?”
조수석의 남자가 본인이 가져온 물건을 보여 주며 운전석의 남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큰 사건을 위해서야. 사소한 동정심은 접어 둬.”
“논란이 될 수도 있어. 각오하고 있지?”
“제기랄, 사무국에서 그걸 막지만 않았어도 쉽게 갈 수 있었는데.”
“후, 난 모르는 일이야. 알지?”
“그래. 그날, 물건만 확실하게 배달해 줘.”
“첫 경기 맞지?”
“맞아.”
조수석에 타 있던 남자가 물건을 가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본인의 차로 향했다.
“천국 같은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운전석에 남아 있던 남자가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사건 당일. 코메리카 파크의 라커룸.
“오늘 컨디션 어때?”
“아, 닉, 괜찮아요. 닉은 어때요? 어제 경기에서 좀 피곤해 보이던데.”
“난 미기가 아니잖아. 아직 쌩쌩해.”
“하긴 그렇죠. 미기는 푹 쉬다 와선지 요즘 더 활기차진 거 같아요.”
“어……. 그렇지. 아, 난 몸 풀러 가야겠다.”
“아직 3시간이나……. 뭐지?”
먼저 말을 걸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카스테야노스. 요즘 들어 뭔가 이상하다.
경기 후.
평소와 같이 간단한 라커룸 인터뷰가 끝나고 미기가 내게 다가왔다.
“오늘도 붐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젠 나도 선수 생활 끝물인가 봐. 아쉬웠겠어?”
“조금만 높았어도 홈런이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시즌 끝나고 스윙 궤적을 조금 바꿔 봐야겠어요.”
“50-50을 할 수 있는 폼을? 진정해. 지금도 충분히 대단한 성적이야.”
“그래도 이런 타구가 나올 때마다 아쉬워서…….”
“그 마음 이해하지. 그래도 뭐, 야구란 게 그런 거잖아?”
“그렇죠. 근데 닉은 어디 갔어요? 기자들이 찾던데. 인터뷰도 안 하고 사라졌네요.”
“뭐 바쁜 일이 있나 보지.”
많이 급한 일인가? 이 정도면 옷도 안 갈아입고 파크를 떠난 거 같은데.
“오늘 모여서 저녁이나 먹으려고 하는데, 미기도 올래요?”
“사양할게. 곧 결혼기념일이거든.”
“아, 기념일하고 원정하고 겹쳤댔죠?”
“크흠, 그래. 아쉽게도.”
“그래요. 그럼 일찍 들어가야죠.”
그렇게 경기가 끝난 뒤, 항상 모이던 멤버 그대로 항상 가는 하우스로 향했다.
“여기도 슬슬 질리는데. 여기 말고 괜찮은 스테이크집 없나?”
“한국 식당이나 갈래?”
“난 입에서 불을 뿜는 취미는 없어.”
나는 케이시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품위 있게 두 번째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바로 그때,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핫! 야, 이거 봐봐. 난 이렇게 나가라고 하면 차라리 야구를 그만둘 거야.”
아, 폴리. 성격 급한 미친 소 같은 사람.
“도대체 뭔데 아까부터 그렇게 웃어 대는 거야?”
“뭐긴 뭐야, 요즘 루키 헤이징 시즌이잖아.”
“아, 그거?”
“게레로 주니어 아웃스타 좀 봐봐, 더블헤더 때 수영복만 입히고 커피 심부름한 거 같은데?”
“미쳤구만.”
“이 정도면 괜찮지, 붐이 하면 또 섹시스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텐데.”
내가 아웃스타를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놈의 섹시스타.
“근데 이제 곧 우리 구단도 할걸?”
벌써 스테이크 두 접시를 해치우고 접시를 정리하고 있는 이삭이 말했다.
“아, 넌 저번에 했었지?”
“했었지. 심지어 그날은 출퇴근도 대중교통으로 했어.”
“아…….”
“괜찮아. 미기가 가드를 붙여 줬거든. 창피함만 이겨 내면 됐으니까.”
“넌 뭐였는데?”
“호빗. 그 발 모양 신발을 만든 녀석은 지옥에나 떨어져야 해. 걷는데 지랄 맞게 힘들더라.”
와, 안 그래도 키가 작아 슬픈 이삭에게 호빗이라. 짓궂네, 짓궂어.
“코스튬은 언제 주는 거야?”
폴리가 이삭에게 물었다.
“보통 전날에 주는 거로 알고 있는데? 원정하고 겹칠 땐 비행기 안에서 주는 경우도 있는데. 뭐 우린 홈경기니까 직접 전해 주겠지.”
굉장히 편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하는 이삭.
“넌 편해 보인다?”
“난 이미 한번 했잖아. 걱정은 너희처럼 루키들이나 하는 거지. 힘내. 창피함은 한순간이야. 나중엔 좀 재미있기도 하고.”
1년 먼저 콜업 된 게 정말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이너에서 100홈런 정도 쳐서 먼저 콜업 됐어야 하는데.
‘그럼 적어도 놀릴 상대는 있었을 텐데…….’
그렇게 적당히 배부른 배와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헤어진 뒤, 집에 도착했다.
‘저건 뭐지?’
지나치려야 지나칠 수 없는,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박스. 박스 위엔 출/퇴근용 복장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설마…….’
잠시 멘붕에 빠져있다 보니, 갑자기 핸드폰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너희도 받았냐?]
[뭘?]
[후…….]
[사진]
케이시도 받은 것 같다. 폴리는 아직 도착 전인 거 같고.
[악! 이거 말한 거야? 홀리 쉿!]
어, 이제 도착했네.
[하하하, 루키들. 내일 수고해.]
여유로운 이삭의 메시지.
[어? 잠깐.]
[이거 뭐야? 왜 나한테도 온 거야?]
[아니, 난 루키가 아닌데?]
[잠깐, 미기가 전화를 안 받아!]
[아니 뭐냐고!]
그런 여유로움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후아.’
혹시나 누가 볼까 박스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부디 제발 사람이 입을 만한 옷이길.
“아니,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입어?”
“입으라고 준 거야?”
“아, 제발.”
누군가 내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좋겠다. 제발.
그리고 다음 날.
“저 사람 뭐야?”
“야, 쳐다보지 마,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어.”
“영화 촬영 같은 거 아냐?”
“근데 뭔가 많이 보던 사람 같은데…….”
그 사람 아니에요.
제발 날 알아보지 말아 줘요.
내가 걸어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진다.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며 고개를 돌리자, 가게의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친다.
짧은 가죽 반바지, 반짝거리는 구두, 가죽 멜빵. 속이 훤히 비치는, 소매가 뜯겨나간 셔츠. 목에서 달랑거리는 나비넥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만 보던 아주 화려한 나비 가면.
내 안의 존엄성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다.
경기장으로 가는 버스 안.
“야, 저 사람 붐 아냐?”
“붐? 아, 그 야구선수?”
“덩치 봐봐, 맞는 거 같은데?”
“야, 맞아. 맞는 거 같아. 오늘 타이거즈 루키 헤이징 데이래. 미기 아웃스타에 올라왔어.”
“진짜? 맞네! 진짜 붐 맞나 봐!”
누군가가 고맙게도 내 정체를 버스 안에 알려줬다.
찰칵!
스마일~!
삐빅!
그때부터 시작된 수많은 찰칵거림.
덩치가 나보다 큰, 미기가 보내 준 가드조차 킥킥대며 나를 찍기 바쁘다.
* * *
결국, 같이 사진을 찍길 원하는 팬들과 포토타임까지 가진 뒤에야 코메리카 파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커룸으로 도루하듯 뛰어 들어가자 보이는 미기의 모습. 오늘 나라면 미기의 조기 은퇴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미기!”
“이게 누구야? 못 알아볼 뻔했네? 아주 핫해.”
“아……. 후…….”
참자. 화낼 시간에 옷부터 갈아입자.
“그만, 다른 루키들 올 때까지 갈아입으면 안 되지.”
진지하게 말하는 미기를 반으로 접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는 게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다들 반가워요! 난 타이거즈의 휴먼 버너입니다!”
판타X틱4의 불꽃 인간으로 변신한 폴리가 도착했다.
“신나냐?”
“그럼! 생각보다 좋은데? 오는 길에 애들도 완전 멋지다고 계속 사진 찍어 달라더라.”
“뒷모습이 멋지다고 그러지?”
“어떻게 알았어?”
네 등판에 멍청한 투수라고 적혀 있으니까.
“됐다. 이제 두 명 남았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케이시가 도착했다.
“모두 안……. 아, 진짜 불편해 뒤지겠네!”
와. 저건 또 뭐야?
“푸하하핫! 너 그거 잘 어울린다! 그래, 항상 머리 굴리는 너한테 아주 딱 맞아!”
“고마워. 너도 잘 어울리네. 맨날 등판해서 마운드에 불 지르잖아.”
“아…….”
자기 머리의 3배는 될 거 같은 커다란 인형 머리를 쓰고 있는 케이시가 멍청한 투수를 침몰시켰다. 왕대두 어좁이. 그런 컨셉인 것 같다.
‘이제 해방까지 한 명 남았다.’
“붐은, 음. 섹시 다이너마이트네.”
아, 왜 나까지 때리냐.
케이시를 무찌르기 위해 온갖 단어들을 짜 맞추고 있을 때, 오늘의 마지막 주인공이 도착했다.
“아, 미기!”
큰 발, 큰 손. 어……. 호빗?
“이왕 시킬 거면 다른 걸 시키던지!”
“으하하하하! 아무리 고민해도 그거 말곤 생각이 안 나더라고.”
“전 작년에 했잖아요!”
“루키하고 놀면 루키가 되는 거야.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이런 말도 있잖아?”
“그게 무슨……. 후. 이제 벗어도 되죠?”
“다 모였으니 사진 한 장 남기고 벗자고. 아, 그리고 퇴근할 때도 입고 가야 하는 거 알지?”
아…….
* * *
“스트라이크! 아웃!”
[아, 케이시 선수가 그야말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스플리터가 정말 춤을 추네요.]
[패스트볼 구속이 98마일까지 나오면서 결정구인 스플리터가 더 효과적으로 타자들의 배트를 끌어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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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선수, 7회에도 안타를 치며 출루에 성공합니다! 오늘 4번째 출루네요!]
[오늘따라 굉장히 공격적인 스윙을 가져가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원래 눈과 손의 협응력, 핸드-아이 코디네이션이 좋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인 만큼 오늘 같은 모습을 언제든 보여 줄 수 있는 선수입니다.]
[다음 타석은 김사범 선수입니다. 김사범 선수도 오늘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앞의 세 타석 모두 존에서 빠지는 공을 쳐서 모두 2루타로 연결했거든요? 이번 타석에서는 홈런을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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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닝을 마무리하는 폴리 선수! 오늘 본인의 최고 구속 기록을 104마일로 경신하면서 캔자스시티 타자들을 그야말로 찍어 눌렀습니다!]
[하하, 케이시 선수의 8이닝 무실점 호투와 이삭 선수의 5출루, 김사범 선수의 7회 투런 홈런에 이어 폴리 선수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하네요. 오늘은 루키 선수들이 다한 경기였어요.]
[디트로이트의 앞날이 밝다는 증거네요.]
[맞습니다. 이대로의 활약을 꾸준히…….]
경기 후, 덕아웃.
“붐, 오늘 홈런 축하해. 다시 공동 1등이네?”
“그러네요.”
“아니, 50-50이 다섯 걸음 남은 위대한 타자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닉이 저 대신 그 옷 입고 퇴근해 볼래요?”
“아니, 사양할게. 빨리 인터뷰해야지. 저기 그라운드에서 사람들 기다린다.”
아. 인터뷰만 아니었어도.
“3, 2, 1. 큐!”
헤드셋 안에서 PD의 큐 사인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붐!”
“안녕하세요.”
“오늘 4타석에서 투런 홈런을 포함해서 4개의 안타를 치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주 좋습니다.”
“50-50까지 홈런 5개만 남겨두고 계시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면 도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인터뷰고 뭐고. 지금은 퇴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아하하, 그렇죠. 최선을 다해야죠. 오늘은 경기장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아주 핫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여러 팬분들이 새로운 별명을 지어 주셨어요. 혹시 아시나요?”
“네?”
뭐지? 새로운 별명?
“아직 모르시는 거 같은데……. 어떻게, 제가 말씀해 드릴까요?”
“아뇨, 아니에요. 인터뷰 진행하시죠.”
새 별명이 뭐가 됐든 절대 방송에 나가게 둘 순 없다.
“BOOM the Beauhunk!”
관중석에서 누군가 말하기 전까지는.
근데…… 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