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김사범, 2020시즌(디트로이트 루키 시티)(1)
어느새 개막 이후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27경기 15승 12패로 18승을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에 3게임 뒤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폴리와 이삭, 그리고 나는 오클랜드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단골 펍에서 간단한 식사를 즐기고 있다.
“내일인가? 케이시가 올라오는 게?”
“그럴걸? 오늘 경기까지 뛰고 메이저에 합류한다던데?”
이삭의 물음에 폴리가 입에 잔뜩 넣은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마이너에서 1선발 대우를 받으며 4경기 3승 1패 3.64의 방어율을 올린 케이시는 트리플A에서도 자신의 경쟁력을 증명해 냈다.
덜그럭.
체구는 내 2/3에 불과한 이삭이 나보다 빠르게 시킨 음식을 다 먹고 그릇을 포개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버릇이라나.
곧 같이 시킨 음료까지 깔끔하게 해치우고 다시 팀에 대한 진지한 토론거리를 던지는 이삭.
“로테이션은 어떻게 돌아가려나? 흠.”
“초반 몇 경기는 불펜에서 대기하지 않을까?”
“트리플A에서 꽤 잘 던졌잖아? 그럼 바로 선발로 뛸 수도 있지.”
“그럴 거면 오늘 던지게 하지 않았겠지.”
“첫 경기를 선발로 뛰냐 불펜으로 뛰냐에 따라 케이시가 잘 적응할지 말지가 결정될 텐데, 이번 시즌은 아예 불펜 대기를 안 했었잖아?”
“뭐,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어디서든 잘할 녀석이잖아.”
이삭과 폴리가 자신의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던 내게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큼.
헛기침 한 번으로 청중의 주의를 끈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케이시가 불펜에서 시작했으면 좋겠어.”
내 말에 이삭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다.
“그래도 선발이 낫지 않아? 우리 선발진에 한 명 빠져야 할 사람이 있으니 그 자리에 들어가면 되지.”
“누구? 짐머맨?”
“난 이름 이야기 안 했다. 이거 짐머맨의 귀에 들어가면 폴리 네 탓이야.”
“아니, 나도 그냥 짐머맨이 보고 싶다는 뜻으로 한 거야.”
후후, 아직 생각이 짧네, 이삭.
“불펜이 더 나아. 팀에 아주 확실한 이점이 있거든.”
“뭔데?”
“케이시가 올라오면 어쨌든 한 명이 내려가야 하잖아?”
“그렇지.”
“그럼 있는 사람을 트레이드하든가 마이너 옵션이 남아 있는 투수를 내려보내겠지?”
“그래야지. 방출하는 게 아니라면.”
“케이시가 올라와서 선발로 뛰게 되면 어쨌든 선발 한 자리는 비워야 해. 근데 지금 선발이 다 잘 던지고 있거든? 짐머맨은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지고 있고.”
내 빈틈없는 논리에 점점 빠져들어 가는 둘.
“결론적으로 불펜으로 쓰면서 불펜 한 사람을 내리는 게 낫겠지. 그리고 그 대상은…….”
“대상은?”
“대상은?”
“일주일 전에 다 이긴 경기를 8회에 나와서 말아먹은 투수가 되겠지. 그 경기 이후에 3연패 한 거 알지? 엄청나게 중요한 경기였어. 마침 그 투수는 마이너리그 거부권도 없을걸?”
그 투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 이해했는지 얼굴에 가득 웃음을 퍼트리며 말하는 이삭.
“프흐흡, 그래. 그 말이 맞네. 자기가 던지는 체인지업을 페드로에게 바친다는 그 투수 맞지?”
“맞을걸? 아주 처맞을 소리였지. 물론 정말 경기에서 맞아서 문제였지만.”
그 투수의 표정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남은 음식을 빠르게 우겨넣고 일어나 재빠르게 문을 향해 뛴다. 미안 이삭.
“야! 같이 가!”
“어디를?”
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결국 또 잡히고 말았구나 이삭. 척추가 접히기 전에 가서 구해 줄게. 미안.
잠시 후.
으아악!
드디어 비명소리가 났다. 입구에서 서성이던 나는 재빠른 발걸음으로 펍 안의 둘에게 다가갔다.
“폴리, 진정해. 13경기 2승 6홀드를 올린 불펜 에이스 투수답게 품위를 지켜야지.”
“그렇지. 품위를 지켜야지.”
뭔가 이상하다. 폴리의 팔 사이에 껴 있긴 하지만, 이삭의 몰골이 너무 차분하다.
“내가 말했지 폴리? 백 퍼센트 먹힌다니까?”
“좋아. 넌 이제 끝.”
배신의 끝은 배신이라는 말이 순간 내 심장에 꽂힌다.
그날 저녁, 내 뒤를 쫒아오는 야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만에 내 몸의 한계까지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 * *
“붐, 어제 오랜만에 루키의 밤을 즐겼다며?”
“누가 들으면 대단한 자리인 줄 알겠어요, 미기.”
“그래도 재미있었나 봐? 오면서 이삭하고 폴리 얼굴을 보니까 좋아 보이던데?”
“어제의 장르는 블록버스터 히어로 무비였어요. 악당이 나였다는 게 문제지만.”
“그만 놀려. 폴리는 지금 상태가 딱 좋아. 붐의 놀림에서 벗어나려고 머리 굴리다가 머리가 좋아지면 큰일 난다니까?”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미기도 악마네요. 저기 위에서 사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지옥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내 농담에 갑자기 성호를 긋는 미기
“오늘도 또 하나의 악마를 퇴치했나이다, 아멘.”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미기에게서 베테랑의 아우라가 보인다. 아, 눈부셔.
“오케이, 졌어요.”
“흐흐, 아직 멀었어.”
“그나저나, 오클랜드라니. 머니볼! 영화에서 자주 보던 팀인데 상대편으로 만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빌리빈의 팀이지. 요즘엔 좀 별로야. 없는 살림에 신 구장으로 옮긴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거든.”
“아, 본 거 같아요. 곤돌라!”
“그래, 그거.”
미기의 말을 듣자 맥이 빠진다. 좋아하던 여배우의 민낯을 본 느낌? 혹은 김빠진 사이다를 먹는 느낌이라고 표현해야하나?
“그래도, 강팀은 강팀이야. 원래 없는 살림에서 시작한 팀이라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아. 단지 예전보다 별로라는 거지. 방심하지 마.”
“그렇죠? 알겠어요.”
화장을 지운 민낯이 화장한 얼굴보다 이쁜 여배우도 존재하니까.
“루키의 마음가짐. 상대를 얕보지 마.”
“접수했어요.”
“좋아. 오늘도 뻥뻥 날리라고. 레이스의 승자가 되고 싶다며?”
“안 그래도 요즘 견제 때문에 홈런이 뜸해서 걱정이긴 해요.”
“걱정 마, 이건 살아남는 자가 우승하는 데스레이스니까. 시즌을 보내다 보면 이런 순간도 지나갈 거야.”
돌아오기 전엔 사력을 다해 골라내려 노력했던 볼넷이 요즘은 너무나 쉽게 얻어진다.
쉴 새 없이 2루로 뛰며 복수하고 있지만, 결국 내가 제일 뿌듯함을 느끼는 건 홈런이니까.
조금 아쉽긴 하다.
* * *
디트로이트 공항.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진 남자가 출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으로 나왔다.
“후, 너무 늦었나? 하필 그때…….”
비행기는 생각보다 연착이 많은 이동수단이다.
티켓을 예약해 준 담당자도 충분히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넉넉하게 예약을 했지만, 사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닥치는 법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남자는 곧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흔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케이시 마이즈]
“안녕하세요, 케이시 마이즈입니다.”
“오, 안녕하세요. 다행이네요. 이번 비행기엔 별일이 없어서.”
“그러게요. 마침 티켓도 없어서 마이너리그 담당자가 고생했죠.”
“일단 가시죠. 어차피 경기는 이미 시작했지만, 원하시면 경기를 보고 잠깐 합류하셔도 되고, 집으로 가셔도 됩니다.”
“일단 경기장으로 가시죠. 앞으로 제가 던질 구장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요.”
“그렇게 하시죠.”
케이시. 디트로이트 팜에서 제일 주목하는 유망주인 그가 메이저에 합류했다.
잠시 후,
“계약할 때 오고 처음이네요. 언제 봐도 저 호랑이들은 인상적이에요.”
“하하, 그렇죠? 이제는 계속 볼 수 있을 겁니다. 짐은 저에게 주시면 제가 나중에 돌려드리죠. 여기 티켓입니다.”
“아, 외야석으로 주세요. 제일 높은 좌석으로.”
“네? 그 자리는…….”
“크게 보고 싶거든요. 어차피 가까이서 보는 건 내일부터 지겹게 볼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따로 티켓을 가져갈 필요 없이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
구단 담당자가 자신의 사무실로 복귀하고, 홀로 남은 케이시.
‘어디, 잘나가는 친구들 플레이나 한번 볼까?’
케이시는 예전에 받은 구장 투어의 기억을 되살려 외야석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 년 전만 해도 꽤 비어 있던 경기장인데, 이젠 거의 가득 찼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인 전광판의 숫자에 케이시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3대8? 3회까지 8실점을 하고 따라가고 있나보네. 이제 7회 말이니까, 세 번 남았군.’
그때, 주변에 얼큰하게 취한 두 중년 남성이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짐머맨 저X끼는 팔아치워 버려야 해. 아니면 방출하던가.”
“저런 놈이 연봉을 2천만 달러 넘게 먹고 있으니 지금 팀이 이런 거야. 이번 시즌에 1승이라도 하겠어?”
“못하지, 못할 거야. 이미 배팅볼러가 됐다고. 자기는 공을 잘 던지든 못 던지든 상관없거든. 왜냐하면 못 던져도 빌어먹을 연봉을 주니까!”
“그래, 그게 문제라니까? 배팅볼러가 돼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짐머맨이 또 초반에 대량실점을 하고 내려간 것 같다.
‘팬들도 이런 반응이라니. 구단에서 뭔가 수를 쓰겠군.’
전광판의 아웃 카운트가 올라간다. 이닝이 끝나고 곧 덕아웃에서 수비를 위해 나오는 디트로이트 선수들.
케이시의 시야에 남들보다 작은 선수와 큰 선수가 이야기를 나누며 그라운드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하군.’
시간이 지나 경기가 오클랜드의 승리로 끝날 때까지 케이시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경기 후.
“오랜만이네. 모두.”
드디어 케이시가 올라왔다.
“여, 케이시? 얼마 안 됐는데 반갑네!”
같은 투수라 그런지, 더 격하게 환영하는 폴리.
“어디서 마이너리거 냄새가 나는데?”
어디서 좀 배운 건지, 이젠 놀릴 줄도 안다.
“그래? 아직 냄새가 안 빠졌나 보네. 근데 상관없잖아? 곧 매일 맡게 될 냄샌데. 안 그래, 폴리?”
“아…….”
덤빌 사람한테 덤벼야지.
나는 폴리를 격침시킨 케이시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왼손을 들어 툭 치는 케이시.
“반갑네. 아직 로스터에 정식으로 등재된 건 아니지?”
“아마 곧? 교통정리가 필요한 거 같더라고.”
“흠. 팀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하네.”
“뭐, 우리가 궁금해할 상황은 아니지. 폴리 빼고.”
“그건 그래. 일단 어디든 가서 이야기하자.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좀…….”
“그래, 어디든 가자고. 이야기할 게 많아.”
예전과 달리 넓어지고 쾌적해진 이삭의 차를 타고 우리는 코메리카 파크를 떠났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바로 어제 왔던 그곳,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더블A 시절이 생각나는데? 장소만 바뀐 거 같아.”
“그러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인데…….”
“폴리 넌 뭐 아는 게 있어?”
폴리가 입을 열자 이삭이 재빨리 묻는다.
“아무래도 같이 몸을 푸는 투수조니까. 확실한건 아니고……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짐머맨이?”
“그래. 에이전트와 통화하는 거 같았는데, 지명할당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럴 거면 차라리 DL에 올리는 게 낫지 않아?”
“비슷하긴 한데, 그건 그거대로 걸리는 게 많으니까. 연봉이 뭐라고 이야기하긴 하던데…… 아무래도 구단에서 칼을 빼 든 거 같아.”
“연봉만 보전해 주면 그게 나을 수도 있지. 곤잘레스 같은 경우도 있고.”
“짐머맨은 현역으로 뛰고 싶은 의지가 큰 거 같아. 그래서 이번 시즌에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작했는데…… 뭐 결과가 이러니.”
“성적이 이렇게 나와 버리면 트레이드도 힘들긴 하지. 아무튼 그건 구단하고 짐머맨이 할 일이고, 우리는 지금을 즐기자고.”
“트리플A는 아무도 안 겪어 봤지? 후. 거기는…….”
그렇게 세 남자의 수다가 시작됐다.
난 빼고. 흠흠.
* * *
디트로이트, 알의 사무실.
알과 한 남자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젠 결정해야 할 순간이에요, 케빈.”
“음…… 고객의 의지가 워낙…….”
“1년 남은 계약이에요. 우리는 언제라도 돌아설 생각이 있고요. 잘 생각해 봐요.”
“혹시 관심을 보이는 구단이 있습니까?”
“음…….”
“후,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죠.”
케빈이라 불린 남자가 나간 뒤, 알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트레이드라…… 그것도 원하는 팀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 지금 이 상태론…….”
서류에는 짐머맨의 최신 리포트와 함께 이번 시즌 성적이 나와 있다.
[5경기 20 2/3이닝 21점 1승 4패 방어율 9.17
……
최근 2경기 모두 3이닝 이하, 5실점 이상으로 세이버매트릭스에 기초한 모든 지표가 메이저리그에 어울리지 않는 투수라고 말하고 있음.]
그리고 다음 날.
[디트로이트, 조던 짐머맨에게 마이너리그행 권유. 짐머맨은 받아들이지 않아.
-디트로이트의 선발투수 조던 짐머맨(35)이 지명할당 처리됐다. 2016년에 맺은 5년 계약의 마지막인 올해, 좋지 않은 성적으로 트레이드 대상으로 올랐지만 원하는 구단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지명할당으로 인해 짐머맨은 10일간의 시간 동안 지명할당선수 신분을 유지하며, 해당 기간 안에 짐머맨을 원하는 구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웨이버 공시를 통해 트레이드 혹은 방출 처리된다. 방출될 경우 디트로이트가 부담할 연봉은 2500만 달러다.
디트로이트는 최근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발 유망주인 케이시 마이즈(24)를 이른 시간에 콜업 하며 리빌딩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디트로이트의 이러한 결정을 어리석고 무모한 결정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디트로이트의 단장 알 아빌라는 이에 대한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