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김사범, 2020 시즌(붐! 콜)
[메일로 추천 목록 보냈어요. 한번 살펴봐요.]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전, 짐의 문자가 왔다.
‘잠깐 확인하고 갈까? 어차피 얼마 안 걸리는데.’
내 몸은 생각보다 솔직했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켜는 내 몸.
[등장음악 추천목록
1. Darude - Sandstorm
: 일렉트로닉 계열 곡, 한국에는 반더레이 실바의 등장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2. Eminem - Drop the bomb on 'Em
: 디트로이트 출신 랩퍼인 에미넴의 곡, 상징적인 면에서 디트로이트 팬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다.
3. Eminem - Detroit Vs Everybody
: 2번과 비슷하지만 좀 더 공격적인 곡. 후렴부가 강렬하다. 추천.
4. Black Eyed Peas - Boom Boom Pow
: 별명과 타격 스타일과 잘 맞는 곡.
5. Beethoven - 교향곡 제 5번 C단조 작품 67, 일명 ‘운명’
: 덧붙일 말이 없음. 클래식으로 하고 싶다면 이 노래를 추천.]
운명을 제외하고는 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다. 노래 제목을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어? 미기? 일찍 나왔네요?”
“오, 일찍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나오는 거야?”
“전 집에서 할 게 없으니까요. 와서 스트레칭도 하고, 그라운드 상태도 보고, 뭐 그러는 거죠.”
“하하, 성적이 좋은 선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운동할 거지?”
“네, 해야죠.”
“같이 하지. 오래간만에 일찍 나왔는데 트레이너 부르기가 귀찮아서 운동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보조 가능하지?”
“물론이죠. 옷 갈아입고 올게요.”
잠시 후.
“후, 붐. 나에게는 솔직히 털어놔도 돼, 난 입이 무거운 사람이거든.”
“후우…… 네?”
“아니 그러지 말고 팔뚝을 봐야겠네, 잠깐 협조 좀 해 줘.”
갑자기 내 몸 이곳저곳을 걷어 올리는 미기. 이삭이 이랬으면 이미 트레이닝 룸 반대편 벽에 박혀 있을 거다.
“아하하. 미기, 간지러워요. 왜 이래요?”
“약물이 아니고서야 이런 출력이 나올 수 없어. 이게 가능한 무게야?”
“하하, 칭찬이죠?”
“칭찬이지. 내가 볼 때 순수 파워는 메이저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거 같은데? 물론 떠도는 소문이 진짜라는 가정하에.”
“고마워요.”
“고맙긴, 세 손가락 중 나머지 둘은 재판에 들락날락하고 있어. 약물을 했거든.”
“네?”
“농담이야. 부럽군. 이 정도로 강한 육체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
“마이너부터 힘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힘보다 유연성 위주로 하고 있어요. 무게야 더 올릴 수 있는데 관절하고 인대가 걱정돼서…….”
“좋은 판단이야.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의도치 않게 미기와의 대화가 길어지면서 몸이 식었다. 바로 운동을 재개하면 몸에 부담이 올 거다.
‘아, 그걸 물어봐야겠다.’
“미기, 미기는 등장음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골랐어요?”
“응? 등장음악? 흠…… 별생각 없이 골랐는데?”
“아…….”
“뭐,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고르는 거지. 느낌이 오는 노래 있잖아. 어떤 선수는 의미를 둔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골랐지. 타석에 들어설 때 신나잖아.”
“음…… 그게 나을까요?”
“뭐, 사람마다 다르지. 자기 출신 지역하고 팀이 같은 경우에는 그 지역의 힙합음악을 많이 선택하는 편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코믹스나 드라마 OST를 쓰기도 하고, 툴로위츠키 같은 경우는 아예 어린 팬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고를걸? 만화영화 주제곡 같은 거.”
“결국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정하면 돼. 결국 야구를 잘하면 따라서 사랑받을 노래니까. 리베라나 호프먼같이.”
“고마워요, 덕분에 뭔가 알 거 같네요.”
“하하, 이럴 때만 루키 같군. 난 좀 쉬어야겠어. 좀 이따 보자고.”
“네.”
일단 내가 좋아하는 곡은 선택에서 제외했다. 발라드를 들으면서 타석에 들어서는 건 좀 이상하니까.
팬들이 좋아하는 곡? 임팩트가 있는 곡? 디트로이트를 상징하는 곡? 짐이 준 트랙을 들으며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하다 갑자기 돌아오기 전의 좋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20대 마지막, 3년 정도 몸 담았던 팀인 부산에서의 기억.
사직 노래방이라 불릴 정도로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곳에서 우연히 역전 적시타를 친 적이 있었다.
팀도, 나도, 팬들도, 심지어 상대 팀도 놀란 그 순간에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진 내 응원가.
물론 나만을 위한 응원가가 아닌, 주인이 여러 번 바뀐 중고 응원가였지만. 그때 내 몸을 내달리던 소름을 잊을 수 없다.
아마 내가 홈런을 친 뒤 붐 콜을 들을 때마다 감격하는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일 거다.
‘좋아. 어떤 느낌의 곡으로 할지 정했다.’
붐 콜 대신 울려 퍼질 단순하고 신나는, 혹은 멋있는 곡.
이제 찾기만 하면 된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
[서울의1번타자 : ……자니?] 11:01
[김사범 : 여기 대낮이다.] 11:02
[서울의1번타자 : 여기는 새벽이야. 갑자기 니 생각나서 카톡해 봤어…… 혹시…… 우리…… 다시…….] 11:04
[김사범 : 차단한다. 수고.] 11:04
[서울의1번타자 : 야! 잠깐!] 11:05
[김사범 : 왜] 11:06
[서울의1번타자 : 너 별명이 붐 맞지? 여기 기사엔 그렇게 써 있던데.] 11:07
[김사범 : 어 맞지.] 11:07
[서울의1번타자 : 그럼 이거 한번 들어봐라.] 11:07
김태연이 링크 하나를 채팅방에 올린다.
하는 말 중 반이 헛소리라 신뢰가 가진 않는데…… 주위를 확인하고 링크를 클릭한다.
잠시 후.
‘이거다.’
나는 내 등장음악을 정했다.
* * *
다음 날.
[정말 이 노래로 할 거예요? 이왕이면 미국 노래로 하는 게 좋을 텐데.]
“어차피 초반 부분만 쓸 건데요. 협의는 다 끝난 거죠?”
[끝났죠. 서류상 정리할 건 남아 있는데, 먼저 사용하겠다고 말해 놨어요. 구단 측에도 말해 놨으니 아마 오늘 경기부터 나올 거예요.]
“좋네요. 좋아요.”
[저는 3번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로컬 이미지도 있고…….]
“짐, 사직에 아직 안 가 봤죠?”
[사직? 야구장이요? 안 가 봤죠.]
“가 보면 왜 내가 이 노래를 선택한지 알 거예요. 갈 때 신문지하고 치킨 챙겨 가요.”
[한국에 들어가려면 멀었는데…… 일단 기억해 놓을게요.]
“오케이, 고마워요. 이제 슬슬 몸을 풀어야겠어요. 오늘도 먹어 치울 투수들이 많이 나올 테니까.”
[그래요. 아주 좋은 자세예요.]
짐과의 통화가 끝났다.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 섰을 때처럼 약간의 설렘이 느껴진다.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와 디트로이트의 시즌 3차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풀머가 1회 초를 아주 잘 막았어요.]
[그렇죠. 하향세긴 하지만 짐머맨 선수를 밀어내고 팀의 1선발, 에이스 자리에서 던지고 있거든요? 그만큼 구위가 훌륭하다는 뜻이죠.]
[말씀드리는 순간, 1번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2루수 정면타구로 아웃됩니다.]
[아깝네요. 강한 타구였는데 코스가 안 좋았어요.]
[2번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투수 와인드업, 초구가…… 초구를 쳤습니다! 외야로 쭉쭉 날아가는 타구! 이 타구가! 타구가! 아…… 워닝트랙 끝에서 잡힙니다.]
[초구부터 원하던 공이 와서 휘둘러 본 거 같은데, 바람 때문인가요? 끝에 가서 힘이 좀 죽었어요.]
[이제 다음 타석은 김사범 선수입니다. 어? 갑자기 팬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하하, 팬들의 환호 소리가 꽤 큰데요? 디트로이트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네요.]
카스테야노스의 아쉬운 타석이 끝나고, 이제 내가 타석으로 향했다.
코메리카 파크에 일렉기타 소리가 울려 퍼진다.
[Let's get it Boom! Boom! Boom!
Let's get it Boom! Boom!]
잠시 멍하게 노래를 듣고 있던 팬들이 환호하기 시작한다. 팬들도 이 노래가 맘에 든 거 같다.
기분이 좋다.
빨리 던져라. 이 노래를 아카펠라 버전으로 듣고 싶으니까.
그리고 두 시간 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는 세인 그린 선수입니다. 디트로이트가 클리블랜드와의 홈경기에서 3승으로 스윕을 달성했습니다.]
[김사범 선수가 1회 솔로 홈런으로 만든 1점을 끝까지 지켜내 승리했습니다. 오늘 투수진이 큰 역할을 했어요.]
[추격조로 나오던 제이슨 폴리 선수가 8회 1사 2, 3루에서 등판해 연속 삼진으로 이닝을 끝낸 게 컸어요. 이렇게 유망주들이 실적과 함께 자신감을 쌓아가야 하거든요. 론 가든하이어 감독의 용병술이 빛을 발했네요.]
[저희는 내일 디트로이트와 탬파베이의 경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 * *
경기가 끝나고 덕아웃에 폭탄 제조의 현장이 펼쳐졌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현장에 곧 FBI가 들이닥치던데.
“붐! 빨리 음료수 더 가져와! 시간이 얼마 없어!”
“잠깐만. 지금 갈게.”
나도 이제 공범이다. 행동 조심해야지.
“키가 클수록 유리해. 하나는 붐이 들고…… 이삭. 내려놔.”
“어…….”
마침내 복수의 순간이 왔다.
폴리의 시야, 그 사각을 향해 조심조심 나아간다.
엊그제 나를 인터뷰했던 그 아나운서가 폴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오늘 체인지업을 위닝샷 삼아서 2개의 삼진을 잡아내셨는데요, 체인지업은 언제…….”
이런. 폴리를 신경 쓰느라 아나운서의 시야를 신경 쓰지 못했다. 급격히 굳어지는 표정이 보인다.
‘이대로라면 들킨다!’
급한 마음에 버킷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앞으로 펼쳐질 재미있는 광경이 기대되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그녀. 폴리와의 거리를 티 안 나게 벌리는 게 프로답다.
그리고 곧 폭격이 시작됐다.
“아푸! 푸아아!”
이미 방아쇠를 당긴 이상 공격이 끊기면 안 된다. 덕아웃의 제조반은 땀까지 흘려가며 무기 제조에 한창이고, 이삭은 빠른 발로 계속해서 폭탄을 조달하고 있다.
폴리의 손발이 부르틀 때까지, 이 폭격은 끝나지 않는다. 난 디트로이트의 ‘붐(폭격기)’이니까.
폭격과 그 이후의 추격전이 끝나고. 이삭을 폴리에게 던져 준 뒤 덕아웃으로 도망쳤다.
덕아웃 앞에는 금발머리의 아나운서가 살짝 젖은 머리를 닦고 있다.
“아, 죄송합니다. 우리가 너무 흥분했나 보네요.”
“아니에요. 저 혹시…….”
“잠시만요, 이삭! 조심해! 야! 폴리!”
아무리 그래도 팀원 허리를 접으려고 하면 안 되지.
나는 주변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분노한 폴리를 진압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아까 들이댈 땐 언제고? 후…….”
홀로 남겨진 아나운서는 음료수에 젖은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 * *
디트로이트, 알의 사무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계획, 지금부터 시작하지.”
“지금 유망주들을 콜업 하면 나중에 슈퍼 2조항에 걸릴 가능성이 큽니다.”
“돈은 신경 쓰지 말자고. 6월은 너무 늦어. 디트로이트시가 개혁의 단계에 접어든 지금이 기회야. 연고지와 함께 성공을 위해 달리는 팀. 드라마를 만들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게 아냐.”
“하지만…….”
“구단주도 콜 했어. 적어도 5년간은 돈에 구애받지 말고 일을 진행하라더군.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알겠습니다. 진행하겠습니다.”
디트로이트가 잔뜩 웅크려 있던 몸을 펴기 시작했다. 도시도, 그리고 잠들어 있던 호랑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