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37화 (37/175)
  • 37화 김사범, 2020 시즌(vs 크리스 세일)(1)

    어느 날, 이삭이 내게 물었다.

    “킴, 근데 왜 스윙 궤도를 어퍼로 안 바꾸는 거야?”

    그때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었다.

    “라이너로 충분히 훌륭한 타구를 보낼 수 있는데 굳이 어퍼로 바꿀 필요가 있나?”

    “아니 뭐, 일반적인 상황이면 모르겠는데 그린 몬스터라든지 이런 구장에서는 좀 불리하지 않겠어?”

    “밀어치면 돼.”

    그때 나를 바라보던 이삭의 표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메이저리그 첫 선발경기에서 내가 지금 그 표정을 짓고 있다.

    * * *

    경기 전. 신중하게 몸을 풀고 있는 내게 론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보스턴은 처음인가?”

    “네. 탬파와 이리, 뉴욕 그리고 디트로이트가 가 본 곳의 전부니까요.”

    “하하, 그래도 뉴욕은 가 봐서 다행이군. 몸 상태는 괜찮지?”

    “컨디션은 아주 좋아요.”

    “그래, 흠. 보자. 루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으론 이게 좋겠군. 타석에 들어서면 귀를 막고 투수에게만 집중하게. 자네는 그래도 외국인이니 그 정도만 해도 괜찮을 거야.”

    뭔가 의미심장한 충고다.

    오늘의 내 타순은 3번. 이삭-카스테야노스와 미기의 사이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즌 첫 맞대결 중계를 맡게 된 배진경입니다.]

    [김성채입니다.]

    [오늘 양 팀의 대결,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래도 레드삭스가 승리할 가능성이 많은 매치업입니다. 일단 양 팀의 선발투수가 너무 차이가 나요.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인 레드삭스의 크리스 세일 선수와 맷 보이드 선수가 맞붙거든요? 체급 차이가 크죠.]

    [그래도 세일 선수는 부상 이후 첫 등판인데,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손가락 쪽에 작은 상처로 인해 한 번 로테이션을 걸렀죠? 하지만 별 영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타선은 어떻게 보시나요?[

    [2018년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이후 그때 라인업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거든요? 무키 베츠, 마르티네즈 등이 건재하고 작년에 콜업된 바비 달백 선수도 쏠쏠한 활약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디트로이트는 어떤가요?]

    [전체적인 짜임새가 보스턴보다 훨씬 덜하긴 하지만, 한방이 있는 팀입니다. 1번부터 9번까지 빅리그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쳐 봤거나, 칠 수 있는 포텐셜이 있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이에요.]

    [결국, 타선의 짜임새냐, 한 방이냐의 싸움이네요?]

    [꼭 그렇지만…… 아, 네. 맞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활약이 아주 기대됩니다.]

    “플레이 볼!”

    심판이 외치는 플레이볼 소리는 언제나 나를 짜릿하게 만든다.

    타석에 들어서는 이삭. 시선을 돌려 마운드 위의 투수를 살펴본다.

    크리스 세일. 큰 키와 마른 몸만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포심과 슬라이더, 서클 체인지업에 가끔 던지는 커브까지. 유일한 약점이던 체력도 점점 나아져 요즘은 포스트 랜디라는 소리도 종종 듣고 있는 투수.

    그런 세일의 왼팔이 이삭을 향해 휘둘러진다.

    퍼억!

    미트에 박히는 폭력적인 포심.

    나는 그 공을 보자마자 은근슬쩍 미기에게 다가갔다.

    “미기, 세일하고 붙어 봤어요?”

    “한두 번 만났지. 저 녀석이 레드삭스로 간 뒤에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어.”

    “뭐 좋은 소스 없어요? 간단한 거라도. 어제 종일 전력분석실에 있었는데 별로 건진 게 없어요.”

    “음…….”

    미기에게 온건 좋은 판단이었다. 지금 미기의 머릿속에선 온갖 경험과 자료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있겠지.

    “없어.”

    응?

    “네? 없다고요? 아, 그러지 말고 알려 주세요.”

    “아니 진짜 없어. 나도 저 녀석이 레드삭스로 오고 나서 두어 번 붙어봤는데. 제대로 정타를 때린 적이 없거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오기 전에 메이저리그도 관심을 가질걸.

    “뭐, 자료에도 나와 있지만 실제로 타석에서 보면 포심이든 슬라이더든 좌우 움직임이 심해. 포심은 생각보다 멀리 빠져나가고 슬라이더는 가까이 들어오지.”

    “거기다 빠르게 카운트를 잡는 성격이고?”

    “그렇지, 예전부터 체력에 대한 지적을 하도 받아서 그럴 거야. 구위가 좋으니 일단 넣고 보는 거지. 붐? 이제 나가야 할 거 같은데?”

    미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이삭이 덕아웃으로 되돌아왔다.

    “이삭, 어때?”

    “후, 슬라이더를 조심해. 바깥쪽 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파고들어 와.”

    “포심은?”

    “말해 뭐하겠어. 세일인데.”

    “오케이.”

    내 배트를 챙겨 대기타석으로 나간다. 처음으로 상대해보는 에이스급 투수의 공. 경기를 쥐락펴락하는 그들의 공을 드디어 볼 수 있다.

    2번 카스테야노스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투구 수 관리에 예민한 세일로서는 굉장히 짜증 나는 상황일 거다.

    결국, 몸쪽을 파고드는 97마일의 포심으로 카스테야노스를 셧아웃 시켰다.

    그리고 이제 내가 세일과 상대할 차례다.

    타석에 들어서서 심판에게 가볍게 목례한다.

    전처럼 도발로 결과를 얻을만한 투수가 아니니 손해 볼 짓은 하지 말아야지.

    타석에서 마운드를 본다. 큰 키, 각진 얼굴이지만 키에 비해서 몸은 평범하다.

    짧은 사인 교환 후에 공을 던지는 세일.

    “흡!”

    [김사범 선수의 첫 번째 타석, 세일이 공을 던집니다!]

    [아! 김사범 선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같은데요? 몸쪽 포심에 타석에서 물러났습니다.]

    [세일선수가 좌완에다가 사이드암이거든요? 거기다 숨김 동작도 좋아서 공이 늦게 보인다고 해요. 그런 공이 90마일이 넘는 구속으로 몸쪽 꽉 차게 들어오니 저럴 수밖에요.]

    “스트라이크!”

    리그 탑 클래스 선수들의 공은 역시 다르다. 공이 보였는데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구위와 궤적.

    이런 완벽한 몸쪽 공을 던졌는데도 세일의 눈은 평정 그 자체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

    재미있다.

    팀 사인을 보고, 다시 타격자세를 잡는다. 포심은 봤고…….

    2구째. 세일이 공을 던진다.

    바깥쪽으로 향하는 공. 끝까지 기다린다.

    살짝 걸칠까? 아니면 밖으로?

    펑!

    “볼!”

    거의 끝에 와서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며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 미기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휘둘렀을 거다.

    [아! 잘 봤습니다.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고 있는 김사범 선수!]

    [방금 바깥쪽 공은 잡아 줘도 어쩔 수 없는 공이었어요. 이제 이럴 때 심판이 잡아주면 그게 루키 존이 되는 거거든요. 추신서 선수가 메이저리그 초반에 고생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아직 1회 초지만, 구심이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거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공을 돌려받자마자 바로 투구자세를 잡는 세일. 변화구가 들어올 타이밍이다.

    배트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한다.

    [아, 4구도 파울입니다.]

    [지금까지 변화구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거든요? 오직 포심으로 김사범 선수를 상대하는 크리스 세일입니다.]

    [김사범 선수도 대단한 게, 세일 선수의 포심에 바로 적응해나가고 있어요. 조금 전 파울은 3루 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파울입니다. 거의 타이밍이 맞는다는 이야기죠.]

    크리스 세일. 그는 남자다.

    이제 이 타석은 암묵적인 룰이 지배한다.

    남자와 남자의 승부. 그의 포심과 내 스윙.

    오직 하나, 힘과 힘의 승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6구. 남자가 던진 공이 남자를 향해 다가온다.

    잠시 후, 덕아웃.

    차분한 걸음으로 숨을 고르며 들어온 나를 이삭이 반겨준다.

    “킴! 엄청난 스윙이었어! 저 세일을 상대로 그런 스윙이라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덤덤하게 대꾸하는 나.

    “난 절대 그런 스윙을 하지 못했을 거야. 확실해.”

    [아쉬운 타석이었습니다. 김사범 선수. 스윙으로 봐선…….]

    “그 세일 상대로 패스트볼만 보고 풀스윙이라니. 덕분에 덕아웃이 아주 시원하긴 했어. 아직 한여름이 아닌 게 아쉬웠긴 해도.”

    [포심을 노리고 스윙했던 거 같죠? 스윙을 마치고 배트를 거둔 후에야 공이 들어가는 느낌이네요, 하하.]

    남자라고 했던 말들은 취소다.

    비겁한 크리스 세일. 낭만을 모르는 녀석.

    * * *

    아주 바쁜 경기다. 분명 우리 팀 선발인 멧 보이드의 구위는 나쁜 편이 아니지만, 상대 타선이 보스턴 레드삭스인 게 문제다.

    [아, 이제 2회 말인데 이미 투구 수가 40개를 넘겼네요. 멧 보이드 선수. 그래도 아직 실점은 하지 않고 있거든요?]

    [1회에도 주자를 2, 3루까지 내보냈다가 야수들의 호수비로 어찌어찌 버텼죠? 오늘 보이드 선수는 본인이 해결하기보다 수비를 믿고 던져야 합니다. 집중력이 아주 좋아요.]

    [말씀드린 순간 볼넷으로 주자를 1루에 내보내는 보이드 선수, 투아웃 상황이지만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여기서 또 내보내면 바로 상위타순입니다.]

    나는 내 촉을 신뢰하는 편이다. 특히 이렇게 같은 팀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등줄기를 싸하게 타고 올라가는 촉은 대부분이 맞다.

    딱!

    역시나. 레드삭스의 9번이 때린 공이 3루수 키를 넘겨 외야에 떨어진다. 펀웨이 파크의 왼쪽 구석으로 공이 빠르게 굴러간다.

    2아웃 상황이라 공이 맞는 순간부터 내달리기 시작한 주자는 공이 외야에 떨어졌을 무렵 2루를 통과했다.

    우리 팀의 좌익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나쁜 어깨는 아니지만, 외야 가장 깊은 곳에서 홈플레이트까지 바로 전달할 만큼 강한 어깨는 아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공을 잡았습니다. 홈은 늦었어요. 2루로 던……. 어?]

    [김사범 선수가 언제 저기까지 갔죠?]

    [스튜어트가 공을 잡자마자 바로 김사범 선수를 향해 던집니다. 아, 이거 설마?]

    [공을 받은 김사범 선수, 홈을 향해서 뿌립니다!]

    [이미 늦었어요! 2루로 던졌어야죠!]

    전력 질주를 한 뒤, 또다시 전력으로 공을 던진 대가는 참혹했다. 호흡이 가라앉지 않는다.

    “나이스 송구, 킴.”

    씨익 웃는 스튜어트가 손을 내민다.

    “보통이죠. 쉬운 플레이에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 덕아웃으로 향한다.

    [와,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이 나왔어요.]

    [이게 기록상으로 보면 평범한 플레이입니다. 좌익수가 공을 잡아서 유격수에게, 유격수는 홈으로 공을 던지는 간단한 중계 플레이였거든요?]

    [보기 드문 장면인 이유는 유격수인 김사범 선수의 위치 때문이죠. 다시보기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거의 좌익수의 정상 수비 위치까지 달려 나왔습니다.]

    [정말 빠르네요, 김사범 선수. 스튜어트가 가까이 다가온 김사범 선수를 보고 놀라면서도 바로 공을 던진 것도 영향이 있겠죠?]

    [아무래도 스텝을 밟을 필요 없이 바로 중계가 이뤄졌으니까요. 그 후 김사범 선수의 송구도 아주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하하, 이 정도면 강한 어깨로 유명한 추신서 선수나 이치로 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맞습니다. 경기 후 송구 속도가 나오겠지만, 눈으로 봐도 엄청나게 빠른 송구였어요. 굉장한 플레이로 팀의 실점을 막은 김사범 선수입니다.]

    [챌린지조차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송구로 이닝이 마무리됐습니다. 잠시 후. 3회 초에 뵙겠습니다.]

    “좋은 플레이였어. 고맙다.”

    덕아웃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맷 보이드가 글러브로 내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씨익 웃어 줬다.

    “나이스 플레이 사범. 또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겠는데?”

    보이드와 덕아웃에 들어서자 들리는 론의 말.

    “그런가요? 수비로는 아직 장식한 적이 없어서 부끄러운데, 이왕이면 몇 번 실려 본 타격이 더 좋을 거 같아요.”

    결국, 점수를 내는 쪽이 이기는 게 야구니까. 호흡을 가다듬으며 세일의 공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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