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30화 (30/175)
  • 30화 김사범, 더 나은 미래를 향해(3)

    김병헌은 요즘 일어나자마자 볼을 꼬집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부진과 수술, 재활의 늪에서 허덕이던 게 불과 1년 전인데,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유망주 투수가 됐다.

    “헤이, 헌,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팀 동료들의 관심과.

    “오늘 몸 상태는 어떤가? 혹시 이상이 있으면 즉시 말해줘야 하네.”

    코치진의 시선.

    “오늘 공 죽이는데? 저 녀석 봐봐, 꼼짝도 못 하고 덕아웃으로 도망치잖아.”

    상대 팀 타자들의 분노 섞인 눈빛.

    그는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웠다.

    비록 잘 알아들을 수 없고, 잘 말할 수 없어 대답은 늘 같았지만.

    “고마워, 나도”

    타지에서의 삶은 외롭다고들 하지만, 김병헌이 느끼기에 그 이상으로 즐거운 자극이 가득했다. 물론 야구 내적으로.

    석에 선 덩치 큰 흑인, 백인, 히스패닉 타자들이 그의 앞에서 하나둘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의 성적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렇게 매일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을 느끼던 어느 날, 혼자 팀원들과 대화를 해보려 손짓 발짓으로 노력하는 그에게 통역이 다가왔다.

    “병헌 씨, 감독님이 잠시 보자는데요?”

    ‘설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요즘 성적이 좋았던지,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김병헌.

    하지만 그가 통역을 통해 들은 소식은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제, 제가 올스타전에요?”

    “네, 정확히는 퓨처스 게임에요.”

    그의 얼굴이 당황을 넘어 기쁨과 환희로 갈 때쯤,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로테이션상 퓨처스 게임 이틀 전에 등판하게 된다네요, 혹시 조절이 필요한지 물어보는데요?”

    김병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곧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그.

    “아니요, 그냥 던질래요. 중요한 건 리그지 이벤트가 아니니까. 뭐, 내년에 또 나가면 되죠.”

    통역의 말을 들은 감독의 눈썹이 춤을 춘다. 그가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반응.

    그렇게 김병헌과 통역은 감독실을 나섰다.

    잠시 걸어가다 갑자기 우뚝 서는 김병헌을 통역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그래도 너무 좋은 기회인데, 한 60개 정도만 던지면 안 되겠냐고 말해 볼까요?”

    “기껏 점수 따 놨는데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빨리 승격하기 싫어요?”

    “아뇨. 그냥 갑자기, 그냥…….”

    미련이 남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는 김병헌과 그를 끌고 가는 통역.

    계속 뒤를 돌아보는 김병헌을 달래기 위해 통역이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그럼 리그 경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면 되겠네요. 스스로의 힘으로.”

    “아!”

    갑자기 김병헌의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퓨처스 게임 당일.

    “쫄지 말고, 잘 던져라.”

    질긴 악연, 그리고 하루짜리 동료인 김사범과 같은 팀으로 그는 오롯이 혼자 마운드에 서 있다.

    ‘75개 던지고 3일 쉬었으니까, 고교야구 기준으로 딱 알맞게 쉬었네.’

    수술과 재활 후, 부상 관리 차원에서 무리한 등판을 하지 않은 김병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불펜에서 공을 많이 안 던져서 그런가, 피곤함은 덜한데 좀 몸이 안 풀린 거 같기도 하고.’

    원아웃 주자 만루, 만원관중의 앞이라 긴장한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하는 김병헌이다.

    “스트라이크!”

    “스츄라잌!”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그는 첫 타자를 삼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본인이 양키스에서 애지중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몸은 피곤한데 공은 잘 뻗네? 후, 두 타자만 상대하기로 했으니까. 저 녀석이 마지막이네. 아쉽다.’

    경기 전 투수 기용 계획에 없었던 김병헌, 알고 있었지만 내심 실망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닝이 시작되며 바뀐 투수에게 갑작스러운 제구 난조가 찾아왔다. 어이없을 정도로 크게 벗어나는 공에 월드팀의 코칭스태프는 결국 투수 교체를 결정했다.

    시간적 여유가 얼마 없는 급박한 상황.

    “여기 몸이 빨리 풀리는 사람 있나?”

    “제가 몸이 아주 빨리 풀립니다.”

    그때 김병헌은 미국에 온 후 가장 빠른 반응속도와 가장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본인의 몸 상태를 잊을 정도로 흥분되는 무대에서, 약속된 마지막 상대를 앞에 두고 그는 공을 던졌다.

    * * *

    ‘불안한데, 저 자식 설마?’

    김병헌의 고질병. 저 자식은 분위기를 타면 가끔 어이없는 공을 던질 때가 있다.

    정확히 배트 중앙에 맞은 공, 김병헌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 공은 낮은 궤적으로 외야를 향해 뻗어 나간다.

    타구 각은 낮지만, 타구 속도와 코스로 봐선 적어도 2루타 코스.

    타구를 본 순간 반사적으로 웅크린 몸을 튕긴다. 타구 방향이 내가 있는 방향이라 할 수 있는 시도.

    하늘이 가까워지는 느낌과 함께 왼손의 글러브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턱.

    ‘잡았……나?’

    하지만 정점을 넘어 떨어지는 와중에 느껴지는 왼손의 감각이 잡지 못했다는 걸 알린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나를 향해 거구의 몸을 던지는 게레로 주니어.

    쿵!

    그리고 내 몸은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아웃!”

    우와아아아아아!

    다행히도 내 시도가 헛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황해서 어버버 하는 김병헌의 엉덩이를 가볍게 차준 뒤,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덕아웃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픈데, 외야수들은 펜스 플레이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제 하이라이트 프로에서 외야수들의 호수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플 것 같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나와 게레로 주니어의 호수비 덕택에 5회가 지난 지금, 스코어는 2:0으로 월드 팀이 이기고 있다.

    미국 팀으로서는 지난 이닝의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린 게 못내 아쉬울 거다.

    “나이스 플레이, 킴.”

    움찔.

    “좋은 수비였어, 너도.”

    1번 킴은 태연하게 대꾸하고, 2번 킴은 깜짝 놀란다.

    “오늘 뉴스에 나오겠는데? 그걸 잡아 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나도 그 타구를 건드릴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무슨 캥거루처럼 점프하던데?”

    서로를 칭찬하며 씨익 웃는 게레로 주니어와 나. 코드가 통하는 녀석이다.

    6회 초, 1번부터 시작되는 타선.

    위기 뒤에는 기회. 쐐기를 박을 시간이다.

    선두타자가 초구를 때려 안타를 쳐냈다.

    대기타석의 게레로 주니어는 고개를 한번 끄덕거린 뒤 타석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스트라잌! 아웃!”

    9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아쉽게 삼진. 그의 여유로운 얼굴이 마지막 스트라이크 콜에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 타석.

    쉬운 승부가 들어오지 않을 건 예상했었다.

    그래도 명색이 퓨처스 게임인데. 5구 연속 바깥쪽 공이 올 줄 생각도 못 했지만.

    “베이스 온 볼스!”

    1사 주자 1, 2루. 5회 말의 상황과 비슷하다.

    ‘결과도 비슷하면 안 될 텐데.’

    다행히도, 한 명의 주자는 베이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6회 말부터 시작된 시소게임.

    6회 말, 미국 팀의 반격으로 3:2

    7회 말, 기어코 한 점을 더 낸다. 3:3

    8회 말, 소강상태.

    그리고 시작된 마지막 이닝, 이제 선수들의 얼굴이 모두 진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바라지 않는 선수는 이 자리에 걸맞지 않으니까.

    9회 초, 월드 팀의 공격.

    이닝 시작과 같이 교체된 투수의 공이 심상치 않다.

    “100마일은 나오겠는데?”

    “나와, 최고 102마일까지 던지는 놈이야.”

    “구종은 뭐가 있는데?”

    “직구, 커터, 체인지업. 체인지업은 버려도 돼, 폼이 느려지거든.”

    선두타자가 나선 순간부터 유격수 땅볼로 되돌아올 때까지, 여기저기서 목격담과 데이터가 쏟아져 나온다.

    덕아웃에서 영어만 들리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야, 쟤 구속이 얼마쯤 된대? 마일 마일 거리는데 잘 안 들려.”

    아직도 영어가 서툰 김병헌에게 대충 설명을 해 주는 사이, 그라운드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예! 좋아! 투아웃!”

    기세가 오른 투수가 다음 타자도 잡아냈나 보다.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타석에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1번.

    오늘 경기 중 교체되지 않은 건 타석의 타자와 게레로 주니어, 그리고 나뿐이다.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나가는 1번.

    그리고 게레로 주니어가 타석에 섰다.

    타격을 준비하는 와중에 대기타석의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입 모양으로 뭐라 말하는 녀석.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데…….’

    비록 그의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몇 분 후에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끝낸다’, ‘잘 봐’ 뭐 이런 말이었겠지.

    초구에 시원하게 담장을 넘기고, 웃으며 베이스를 도는 모습이 조금 멋있다.

    2점 홈런, 9회 초에 월드 팀이 다시 앞서나간다. 이미 시소는 부서졌고, 별다른 위기 없이 경기는 끝났다.

    5:3, 월드 팀의 승리. 그리고…….

    경기 MVP

    -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5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9회 홈런의 임팩트 덕분인지, MVP는 게레로 주니어가 가져갔다.

    * * *

    “그럼 다음엔 메이저에서 보자고, 친구.”

    “그래, 이 100달러는 내가 잘 쓰도록 하지.”

    “푸핫! 점점 맘에 드는군. 빨리 올라와. 다음엔 상대 팀으로 붙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잘 쓴다고 한 건데. 그걸 농담으로 이해했는지 웃음과 함께 게레로 주니어가 떠난다.

    “아깝네, MVP 네가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다고 너한테 밥 안 사준다.”

    “야 너는 좀! 나도 돈 많거든? 내 에이전트가 보라스야!”

    내일 나는 진짜 올스타전이 열리는 이곳을 뒤로하고 복귀한다. 내년엔 다르겠지만.

    오늘 하루쯤은 즐겨야지. 마침 데리고 놀기 좋은 녀석도 있고.

    * * *

    [김병헌. 퓨처스 게임 2/3 이닝 무실점 완벽투! 메이저가 보인다!]

    [김사범의 성장은 어디까지? 전문가들, ‘앞으로 10년 뒤, 동양인 타자의 상징은 김사범이 될 것.’]

    “야, 벌써 기사 떴다. 난 곧 메이저 가고 넌 리그를 씹어 먹는단다.”

    클리블랜드를 이 잡듯이 뒤져 찾은 한식당, 김병헌이 내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준다.

    “기사도 보냐? 여유 있네? 싱글A?”

    “아씨, 나도 곧 더블A로 간다니까? 적응 중이라 그런다고!”

    놀리는 맛이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이런 재미로 하는 거구나.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괜히 정신만 사나워지지. 넌 입을 조심해야해.”

    지나친 솔직함과 생각 없이 내뱉는 말로 여러 번 구설에 오르는 김병헌이다.

    아, 여자 문제도 있구나. 그래도 친군데, 이것도 말해 줘야지.

    “아 참, 그리고 너 여자한테 인기 없으니까 괜히 오해해서…….”

    “어차피 시윤 씨하고 연락하다 보면 다 알게 되는데 뭐, 그렇다고 연락을 안 할 수도 없고.”

    누구?

    “시윤 씨? 여자친구냐?”

    “응, 얼마 전에 사귀기 시작했다. 시즌 끝나고 한국 돌아가서 부모님께 보여 드리려고…….”

    “내가 아는 그 사람이야?”

    아니어야 한다.

    “아, 너도 알지? 박시윤 아나운서? 예전에 스프링캠프에서 만났잖아.”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 이후에 가끔 연락하다 보니까 말도 잘 통하고, 나이 차가 좀 나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순진하더라고, 그렇게 썸 좀 타다 고백했지.”

    “고백…….”

    “하하, 시윤 씨 이상형이 도전하는 사람이래, 덩치 크고 듬직하면 더 좋고. 딱 나 아니냐?”

    도전하고, 덩치 크고, 듬직한 사람.

    “그래, 너다. 잘됐네. 가자. 배부르다.”

    “야, 아직 반도 안 먹었어! 평소엔 냄새나서 잘 먹지도 못하는데 오늘이라도 좀 먹자!”

    “배불러. 먹든지 말든지. 난 먼저 일어선다.”

    오랜만에 매운 걸 먹어서인지 땀이 많이 난다.

    훌쩍.

    콧물도 나오고.

    집에 가자. 내 집, 그라운드로. 하루라도 빨리.

    헐레벌떡 나오는 김병헌. 우리는 빛나는 도시를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 * *

    제리 우트 파크.

    지금 막 운동을 끝낸 것 같은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삭, 요즘 킴이 이상하지 않아? 퓨처스 게임 이후에 날카로워진 느낌이야.”

    “너도 느껴? 말도 마. 넌 그래도 투수라 괜찮은 거야. 같이 수비하다 보면 더 살벌하다.”

    한 손에 든 쉐이커를 열심히 흔들며 대답하는 폴리.

    “경기 성적도 좋던데, 왜 그러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게, 아, 안 되겠다. 가서 물어보자.”

    “직접? 그러다 예민한 문제면 어떡하려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그렇게 둘은 사범을 찾아갔다.

    제리 우트 파크의 웨이트 룸.

    사범의 승모근 위에 얹혀 있는 바벨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인다.

    쿠웅!

    바벨의 하중 한계치를 시험하는 듯한 격한 스쿼트.

    한 세트를 끝내고 잠시 쉬는 김사범에게 이삭과 폴리가 다가간다.

    “킴, 시간 있어?”

    “후, 있어. 1분 30초.”

    “아니, 하. 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괜찮지?”

    그제야 이삭에게 시선을 돌리는 김사범.

    “물어봐. 50초 남았어.”

    “무슨 문제 있어? 요즘 너무 날카로워.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고.”

    “이삭 말대로 말 걸기도 힘들어. 혹시 뭔가 걱정거리가 있다면 말해봐, 들어줄게.”

    잠시 고민을 하던 김사범의 입이 열렸다.

    “별거 아냐, 그냥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치고는 대답이 늦는데? 어서 진실을 말해.”

    “그런 거 아냐, 나 다음 세트 들어가야 해, 일단 운동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팀 동료가 있다는 게 감동적인지, 김사범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그래, 저녁에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그래도 다행이네, 난 여자 문제라고 생각했거든.”

    “설마, 여자 문제겠어? 겨우 그거 가지고 이러면 X신이지.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김사범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눈을 거쳐 턱으로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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