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27화 (27/175)
  • 27화 김사범, 그리고 신고식(2)

    “그게 아니지. 타이밍을 느리게 가져가는 게 밀어치는 게 아니라 임팩트에서 두 팔을…….”

    “외야 수비는 잘 모르지만, 스타트 할 때 첫 스텝이 잘못된 것 같은데? 이리 와 봐.”

    “백핸드로 잡으면 편하지, 근데 충분히 한 발 더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왜 백핸드로 잡는 거야?”

    나는 그날부터 유치원 교사가 되어 버튼햄 및 떨거지 원투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누가 너한테 코칭해 달랬어? 저리 꺼져!”

    물론 처음엔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노력하다 보니, 이젠 그들도 내 맘을 알아줬다.

    “필요 없……. 후, 됐다. 그래, 뭐가 문제라고?”

    내 진심이 그들에게 닿은 거 같아 즐거웠다.

    한편, 그라운드 한쪽에선 베이커 감독이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참 그라운드를 둘러보다 같이 있던 코치에게 묻는다.

    “그래, 특이사항 있나?”

    “지금은 없습니다. 아, 킴과 버튼햄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베이커 감독은 그라운드로 시선을 다시 돌려 킴과 버튼햄을 확인한다.

    “같은 포지션 경쟁자끼리 신경전이 있는 게 당연하지.”

    베이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코치.

    “그게 아닙니다.”

    “그럼?”

    “사이가 좋습니다. 킴이 버튼햄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는 거 같습니다.”

    그라운드를 향하던 시선을 코치에게 돌리는 베이커 감독.

    “루키가 버튼햄에게?”

    “저도 이상해서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들어 보니까 보통 기본기에 대해 많이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동양권 야구가 그쪽을 많이 강조하니까요.”

    “그렇긴 하지. 흠, 버튼햄은 따로 반응하진 않나?”

    베이커 감독도 이미 베이커의 성격을 알고 있었는지 코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상하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성격이 아닌데…….”

    잠시 생각에 잠긴 베이커 감독이 이내 코치에게 지시를 내린다.

    “자네가 계속 살펴보게. 혹여나 킴이 선을 넘는 조언을 하게 되면 적당히 끊고.”

    “알겠습니다.”

    “그래도 킴의 마인드가 돋보이는군, 경쟁자에게 조언을 해 주다니. 승부욕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역시 아시아권 유망주가 대체로 멘탈이 아주 좋아.”

    동상이몽이란 사자성어가 참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 * *

    “투아웃!”

    “집중해!”

    경기가 열리는 그라운드, 1:2로 시울브즈가 앞서고 있지만, 방심할 수 없는 스코어에 팽팽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3회 말, 상대 팀인 리치몬드의 마지막 타자가 투수의 호투에 삼진으로 물러난다.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돌아오는 동료들을 맞아 수고했다며 물을 건네고 있다.

    “이삭, 첫 번째 아웃 멋있던데?”

    “이정도야 뭐, 보통이지.”

    첫 타자의 먹힌 타구를 외야까지 따라가 잡아낸 이삭. 머리 위로 넘어가는 어려운 타구를 반사신경만으로 잡아내는 모습에 관중들도, 우리도, 상대 팀도 감탄했다.

    덜컹, 후.

    그리고 방금 한숨을 내쉰 우리 팀의 ‘주전’ 유격수 버튼햄은 게임 시작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이더니 이젠 벤치에 거의 늘어져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늘어져 있을 거다.

    “버튼햄! 뭐해! 다음 타석이다!”

    “네……. 네!”

    멍하니 벤치에 늘어져 있다 코치의 말에 화들짝 놀라 대기타석으로 향하는 버튼햄.

    그를 보는 베이커 감독의 시선이 매섭다.

    ‘아주 잘 익어 가는군. 보기 좋아.’

    시나리오 작가나 드라마 작가가 관객들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예정된 끝을 향해 가는 모습이 즐겁다.

    “킴, 뭐해?”

    “응? 왜?”

    “방금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잖아.”

    “아, 갑자기 웃긴 일이 생각나서. 슬슬 몸을 풀어야 할 거 같은데, 캐치볼 할래?”

    아마 곧 경기에 나설 것 같거든.

    * * *

    디트로이트의 더블 A 계약구단 이리 시울브즈는 꽤 단단한 팀이다.

    작년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인 케이시 마이즈로 시작된 선발진은 맷 매닝, 프랭클린 페레즈, 알렉스 파레도로 이어지는 유망주 선발들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점점 나아지고 있다.

    선발 유망주들이 제 역할을 하는 와중에 마무리로 급부상한 폴리까지. 타자들의 득점 지원만 원활하게 돌아간다면 더블A 수준에선 찾기 힘든 강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원활하게 돌아간다면.

    그리고 방금 3명의 선수가 원활하지 못한 타선의 문제점으로 지명되어 감독과의 면담을 마쳤다.

    아마 내려가거나, 떠나가거나. 둘 중 하나겠지.

    “흠, 뭔가 이상해.”

    말없이 자신의 짐을 챙겨 라커룸을 떠나는 3명을 보며 이삭이 내게 말했다.

    “뭐가 이상해?”

    “저 녀석들, 요즘 이상하게 축 처져서 삐걱거리더니 결국 저렇게 됐잖아. 그렇다고 실력이 부족하거나 마이너에 오래 있던 녀석들도 아닌데.”

    “그래? 뭐 개인 사정이 있나 보지.”

    “흠, 버튼햄도 그렇고, 3명 다 그때 그 녀석들이긴 한데…….”

    전혀 찔리지 않는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하필 또 그러네? 난 그 이후에 친해지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다 헛수고였군.”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자꾸 이상하단 말을 되뇌는 이삭. 촉이 좋은 녀석이다.

    “혹시 사범 네가…….”

    “오늘 경기, 중요하댔지? 디트로이트에서 스카우터가 온댔나?”

    “응? 그럴걸? 요즘 팀 사정이 말이 아니잖아. 미기가 반등한 거 빼고는. 그래서 이리저리 올릴 선수들 없나 보고 있는 거지.”

    단순하긴.

    디트로이트가 절박한 상황인 건 맞다.

    짐머맨은 작년에 이어 마운드에서 공이 아닌 똥을 던지고 있고, 그나마 공다운 공을 던지는 맷 보이드도 썩 훌륭한 투수는 아니다.

    점수를 많이 주고, 간혹 터지는 타선으로 가끔 역전하는. 팬을 희망 고문하는 악랄한 팀 컬러를 가지게 됐다.

    “아마 바로 올리진 않을 거야. 서비스 타임도 있고. 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겠지?”

    “물론이지. 나가자.”

    어깨에 걸친 유니폼을 제대로 입고, 장비를 챙겨 라커룸을 나선다. 복도 끝의 환한 빛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제부터 내딛는 발걸음이 내 야구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복도를 지나 덕아웃으로 나가기 직전, 이삭이 말한다.

    “사범, 이럴 때 쓰는 말이지?”

    “뭐가?”

    “어그라드다. 이제부터 같이 정말 어그라드다.”

    아…….

    “……그래, 너도 어그라드다.”

    경기 시작 후.

    오늘따라 팀의 분위기가 조용하다. 모두 떠들 에너지조차 아껴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것 같다.

    투수의 온 힘을 다한 투구.

    야수들도 유니폼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몸을 던지기 바쁘다.

    물론, 선수들도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의 성적과 발전 가능성, 능력은 수치화돼서 문서로 올라갔으며, 이런 허슬 플레이는 그 수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도 마치 오늘만 사는 것처럼 그들은 또다시 몸을 던진다.

    “사범, 나이스 캐치!”

    “보통이지, 나만 믿고 던져.”

    슬라이딩으로 더러워진 유니폼과 벨트 사이에 낀 흙을 툭툭 털어 내며 말한다.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슬라이딩을 안 했으면 잡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이닝이 끝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길. 이삭이 다 안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이왕이면 잘 보이는 게 좋으니까.

    다른 의미는 없다.

    지금 내 성적 정도면 무리하지 않아도 내년, 혹은 빠르면 9월에도 메이저에 올라갈 수 있으니까.

    진짜로.

    * * *

    뉴욕. 짐의 사무실.

    “안녕하세요. 짐 맥킨입니다.”

    “안녕하세요. 제시 모리슨입니다.”

    짐이 타격 인스트럭터인 제시 모리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앉으시죠.”

    짐의 말에 소파에 앉는 모리슨.

    “제 고객 때문에 오셨다고……?”

    “네, 정확히는 사범 킴 때문에 왔습니다.”

    “저번에 아직 생각이 없다고 답변 드렸는데요? 그 후에 시즌이 1/3밖에 안 지났는데 그 이야기를 다시 논하는 건 이른 것 같네요.”

    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모리슨.

    “압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킴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했어요. 하지만 저와 제 분석팀 모두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요?”

    “킴을 더 깊이 있게 관찰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정식으로 분석 장비를 통한 스캔도 하고 싶고요.”

    컵의 물을 마시며 빤히 모리슨을 바라보는 짐.

    그 시선에 지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모리슨이 말한다.

    “제 명성보다 제가 너무 젊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음…….”

    “제가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이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끊임없는 분석. 전 코치보다 학자에 가까워요. 그리고 전 지금 무엇보다 킴의 타격을 분석하고 싶습니다.”

    짐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제 고객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건 그의 타격과 타격 폼을 분석한 자료입니다. 같이 보여 주시면 킴도 저와 이야기하고 싶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짐의 사무실을 나서는 모리슨에게 그의 동료가 묻는다.

    “왜 그렇게 킴에게 집착하는 거야? 백만 달러 조금 넘는 금액을 받는 루키일 뿐이잖아?”

    “집착이라. 그래. 집착할 만한 이유가 있지.”

    “뭔데 그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짓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리슨. 왼손은 완만한 기울기로, 오른손은 가파른 기울기를 그린다.

    “내 왼손이 킴의 타구 발사각도고, 오른손이 일반적인 장타자의 발사각도야. 어때?”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

    “많이 차이 나지. 최대 10도 가까이 차이가 나니까. 왜냐하면, 킴의 스윙은 기본적으로 다운컷, 혹은 레벨 스윙이거든.”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다급하게 묻는 동료.

    “잠깐, 킴이라는 선수, 싱글A에서만 홈런을 20개 가까이 쳤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더 알아보고 싶은 거지. 심지어 홈런 중에서 타구 각도가 14도짜리도 있어. 점점 궁금해지지 않아?”

    “그러네.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겠어.”

    “가자고. 자신의 타격 폼에 그 정도 신경을 쓸 선수면 내가 준 자료를 보고 분명 연락을 줄 거야. 그때가 그를 설득할 마지막 기회야. 한 방에 끝내야 해.”

    * * *

    201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는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한다. 트랙맨으로 불리는 이 레이더가 야구공을 정확히 추적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그동안 추측,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추론하던 여러 이론을 증명해 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뜬공 혁명’이다.

    요약하면, 빠른 타구 속도, 그리고 26~30도의 타구 발사각도를 만들어 내는 타자일수록 더 높은 득점 생산력을 가진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주목받지 못하던 터너와 같은 타자들이 어퍼 스윙으로 타격자세를 수정했고, 그렇게 타구 발사각도를 높여 리그를 호령하면서 점점 다른 타자들의 스윙도 어퍼 스윙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라이너성 타구로 담장을 넘길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짐, 그 인스트럭터를 만나보라는 거예요?”

    [뭐, 손해 볼 건 없겠던데요?]

    “제 폼은 문제없어요. 정말 많은 자료를 보고, 오래 가다듬은 폼이라니까요?”

    [폼의 수정이 목적이 아니라 연구 및 발전이 목표래요. 일단 그쪽에서 사범의 타격 폼에 대해 정리한 자료를 보내 줄 테니 보고 결정해요.]

    “알겠어요. 끊어요. 곧 경기예요.”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라커에 던진다.

    어제의 연장전이 몸에 무리가 됐는지,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해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 * *

    다행히 오늘도 경기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오늘따라 땅볼유도가 많은 투수 때문에 수비에서 꽤 격하게 움직여 조금 지쳤지만, 세 번째 타석에서 직구를 노린 스윙으로 홈런을 기록하며 체면치레도 해서 나름 기분이 괜찮았다.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1루를 밟는 순간.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 없었다면.

    [스킬 ‘전투속행’이 발동됩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지금의 컨디션이 유지됩니다!]

    오늘따라 너무 이질적인 시스템의 음성, 난 바로 벤치를 향해 교체 신호를 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