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24화 (24/175)
  • 24화 김사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다(1)

    플라잉 타이거즈의 홈구장, 조커 머천트 스타디음.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한 손엔 맥주, 다른 한 손엔 표를 든 두 남자가 마주쳤다.

    “제이, 오늘도 여기서 보네?”

    “그러는 너는 웬일이야? 야구 안 좋아하잖아?”

    평소에도 친한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

    “요새 핫한 루키가 있잖아. 타격도 그렇고 수비도 시원시원해서 볼 맛 나더라고.”

    “하하하, 사붐? 요즘 야구장에 폭탄(BOOM)이 떨어지고 있지.”

    “하하, 뭐야 그 유치한 별명은? 보아하니 곧 메이저에 올라갈 것 같은데 지금 봐둬야지, 사인도 받으면 좋고.”

    “디트로이트 팬도 아니면서 무슨, 그래서, 사인은 받았어?”

    자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두 남자. 점점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직, 그것보다 만약 사붐이 월드시리즈에 나가고 싶다면 알아서 탬파베이로 오겠지. 디트로이트보단 그게 낫지 않아?”

    “탬파베이가? 오늘 날 여러 번 웃게 만드는데?”

    “하하, 내기해도 좋아. 적어도 디트로이트보단 탬파베이가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두 남자의 뒤로, 주심의 경기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 볼!”

    * * *

    [사붐-킴! 또 하나의 아웃 카운트를 늘립니다!]

    [메이저리그였으면 투데이 영상으로 나왔을 만한 수비예요. 텍사스 타구를 놀라운 점프로 잡아냅니다!]

    “나이스 수비, 킴!”

    “캡틴 아메리카야? 도대체 얼마나 높게 뛴 거야!”

    “킴은 코리안이야. 캡틴 코리아라고 해야지.”

    내 아크로바틱한 수비에 팀 동료들이 한마디씩 하며 덕아웃으로 들어간다.

    “사붐, 몸에 이상은 없지?”

    덕아웃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피터의 목소리. 비치된 물을 마시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잠시 바라보다 이내 박수를 쳐준다.

    ‘수비할 맛 나네, 반응들이 좋아.’

    고교야구와는 다르게 쉴 틈이 없는 일정이지만, 나는 오히려 과거의 향수마저 느끼고 있었다.

    ‘돌아오기 전에는 오전에 2군 경기 뛰고 콜업 되어서 저녁에 1군 경기를 뛴 적도 있었지.’

    그저 그런 2군 선수에게 체력 관리는 사치였으니까.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어느새 대기타석으로 나갈 시간이다.

    ‘오늘 수비 맛은 봤으니, 이젠 다른 맛도 봐야지.’

    그리고 잠시 후.

    [SEE-YA! 사붐-킴의 타구가 가운데 담장을 넘깁니다!]

    [1, 2차전 연속경기 홈런을 치고 어제 경기에서 잠잠했었죠! 다시 그의 배트가 폭발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내 홈런을 축포 삼아 팀은 홈 개막 4연전에서 시리즈 스윕을 했다.

    그리고 나는 5할이 넘는 타율과 4개의 홈런으로 내 모습을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경기 후, 짐을 정리하는 내게 팀원들이 다가와 한마디씩 던진다.

    “킴, 오늘도 대단하던데?”

    “이 정도야 뭐, 보통이지.”

    “하하, 그래, 킴에겐 보통이지.”

    원래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유망주가 시즌 시작 전 트레이드된 후,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나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쾌적한 마이너리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단 하나, 내 맘에 차지 않는 타격을 제외하고.

    ‘5할의 타율로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욕심인가?’

    다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하기 전 많은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마이너리그를 얕게 본 잘못된 판단이었다.

    ‘생각보다 수준이 더 높아. 왜 이 레벨에 있는지 모를 투수들도 많고.’

    나를 놀라게 하는 투수들의 공과는 별개로, 첫 4연전을 치르면서 나도 몰랐던 내 단점들이 나타났다.

    일단,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플레이가 격해질수록 경기 후반에 쌓이는 몸의 피로다.

    ‘내구가 너무 낮아서 그런가. 힘의 배분에 신경 쓰지 않으면 경기 후반에는 만족할 만한 힘이 타구에 실리지 않는다.’

    아직은 별로 티가 안 나지만 근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운동생리학 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라커룸으로 가는 길, 내 눈에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걸어가고 있는 한 선수가 보인다.

    제이슨 폴리, 팜에서 주목받는 강속구 유망주지만 미래 어느 순간에 트레이드되는 선수.

    폴리는 4연전 3번째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해서 3과 2/3이닝 동안 5실점을 해 강판 당했다.

    구위나 제구의 문제보다 자신의 직구를 믿지 못해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다 얻은 결과다.

    이런 패턴이 계속된다면, 그는 메이저에 올라가지 못하고 트레이드 당할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누구 좋으라고.’

    자연스럽게 속도를 높여 어깨동무하며 그에게 말을 건다.

    “이봐, 폴리. 왜 이렇게 축 쳐져 있어?”

    “킴, 선발 등판 다음 날이니까 당연하지. 아니, 공도 몇 개 못 던졌으면서 엄살인가?”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게 보인다.

    “워워, 진정해 폴리. 공 좋았잖아? 변화구야…… 뭐 어쩔 수 없지만, 직구는 타자들이 건드리지도 못했다고.”

    “아, 80마일 후반대도 겨우 나오는 직구? 그 정도의 공은 내 사촌 동생도 칠걸?”

    “구속에 비해 무브먼트는 좋던데? 기운 내, 원래 수술 후에는 인내심 싸움이야.”

    내 위로를 듣고도 한숨을 푹 내쉬는 폴리.

    “그래, 킴. 고마워. 난 먼저 버스로 갈게.”

    전혀 위로가 안 된 것 같다. 흠.

    라커룸으로 향하는 길, 축 처진 폴리의 어깨가 계속해서 생각났다.

    ‘알아서 하겠지. 결국 성공할 녀석인데. 후, 집중하자. 지금 남을 챙겨 줄 때가 아냐, 나만 생각하기에도 벅차다.’

    * * *

    [그래서, 지금 필요한 자료가 뭐라고요?]

    “말했잖아요, 짐. 제이슨 폴리의 예전 경기 기록이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은 얼마 안 되더라고요.”

    내 코가 석 자지만, 지금 나는 전화로 짐을 닦달하고 있다.

    아무리 요즘 야구가 데이터화 돼서 클릭 몇 번으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지만, 데이터에도 없는 고교 시절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사범, 지금 본인을 제일 신경 써야 할 때 아니에요?]

    퉁명스러운 짐의 목소리. 귀찮은 일을 할 때 나오는 목소리다.

    “그 녀석은 잘 성장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녀석이에요. 일종의 투자죠.”

    [하, 이젠 스카우터까지?]

    “내가 맘먹고 스카우터로 활동하면, 적어도 10년간은 구단에서 왕 대접을 받을걸요? 아무튼, 해 줄 수 있어요?”

    내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로 코웃음 소리가 들린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해 줄 거죠?”

    [……후, 그래요. 알겠어요. 논-드래프터라고 했죠?]

    “출신 고등학교가 깡촌에 있는 학교였대요. 그래서 아무도 뽑지 않은 거죠. 그땐 구속도 잘 안 나왔으니까.”

    [난리군요. 알겠어요. 아, 사범. 저번에 그 타격 인스트럭터 기억나요?]

    타격 인스트럭터…… 아. 기억난다. 내 흑역사도 같이.

    “기억나죠. 아주 잘.”

    [네? 뭐 아무튼. 알아봤는데 그 바닥에선 꽤 인정받는 인스트럭터라고 하던데요? 선수를 가려 받아서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흠. 그래요?”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들었어요. 뭐. 좋은 기회니까 생각 있으면 말해요. 내가 선은 이어 놨으니까.]

    내 폼에 문제라…….

    잠시 고민하다 짐에게 말했다.

    “아직은 생각 없어요. 내 타격 폼은 제게 최적화되어 있거든요. 벌써 이리저리 휘둘려서 바꾸긴 싫어요.”

    [좋은 판단이에요. 시즌도 시작했으니 이미 늦었긴 하죠. 알겠어요. 요청한 자료는 구해지는 대로 바로 보낼게요.]

    “고마워요 짐.”

    [별말씀을.]

    짐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는 다시 자료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며칠 뒤, 클리어워터와의 3차전, 홈경기.

    나는 내 자리에서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각자 글러브와 미트로 입을 가리고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폴리와 포수.

    ‘4회, 노아웃 1, 3루라.’

    경기 전, 결의를 다진 얼굴로 마운드로 향한 폴리는 1회부터 3회까지 볼넷 하나를 제외하고 단 한 명의 타자도 내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4회가 시작하고 상위타순을 상대할 때, 다시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다 연속안타를 맞으며 실점 위기.

    수술 후유증인지 이닝이 지나갈 때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직구 구속이 문제였다.

    “거기까지, 이제 내려오지.”

    심판의 제지에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는 포수, 폴리는 고개를 몇 번 흔들며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하는 것 같다.

    땅을 고르는 척 스파이크에 묻은 흙을 털고 있는 폴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한테 보내, 공 하나로 아웃 2개를 만들어 줄게.”

    “하하, 오케이.”

    오케이는 무슨, 이미 눈이 죽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

    따아악!

    3구째, 폴리가 던진 한가운데로 몰린 직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 * *

    경기 후.

    4회에 교체된 폴리 이후 줄줄이 맞아 나간 투수진 덕분에 7회에 교체되어 나온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장비를 챙긴 후 타이밍을 보고 있다.

    투수 코치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터, 그리고 아이싱을 끝낸 뒤 그 옆을 어슬렁거리는 폴리.

    ‘이 자료를 전해 줘야 하는데…….’

    “사범, 뭐해요? 라커룸으로 안 가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나를 보고 이상한 듯 보는 데니스.

    “아뇨, 가야죠. 가죠!”

    나는 결국 타이밍을 못 잡은 채 라커룸으로 향했다.

    라커룸.

    “오늘 경기는 안타까웠다. 투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비진도 집중력이 떨어진 게 눈에 보였어. 적어도. 적어도 홈에서는 이런 플레이를 하지 마라, 이상.”

    피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동료들은 하나둘 라커룸을 떠나기 시작한다.

    ‘내일 줘야 하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텐데’

    그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삭의 말.

    ‘팀에서 주목하는 유망주면 몰라도, 하위 드래프터들은 잘 못 먹지. 아마 고기 사 준다고 하면 좋아서 날뛸걸?’

    음. 설마?

    “폴리! 오늘 뭐 약속 있어?”

    “아니…… 집에 가서 쉬려고…….”

    “기운 내,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오늘 스테이크 쏠게. 갈래?”

    애도 아니고 고기에 넘어가진 않을 거 같은데, 만약 거절당하면 그냥 손에…….

    “고기?”

    “어? 어! 기운이 없어 보여서. 가자! 내가 오늘 쏠게. 대신 운전은 네가 하고.”

    “후, 그래. 기분은 별로지만, 킴에게 탬파를 구경시켜 줄 겸 가지 뭐.”

    아니, 고기라고 외치며 눈을 빛내던데? 역시 마이너는 마이넌가?

    그렇게, 나는 쉽게 폴리를 낚을 수 있었다.

    조금 허무하다.

    * * *

    탬파 시내의 음식점.

    “맥주?”

    “아냐, 난 시즌 중에는 술 안 먹어.”

    음식을 주문하고, 자연스레 묻는 폴리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다.

    “나도 잘 안 먹어.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 먹고 싶네.”

    “음, 내가 투수가 아니라 쉽게 위로할 수 없네. 미안.”

    “미안하긴, 내가 못 던진 건데. 아무튼, 여기 스테이크가 정말 죽이게 맛있어. 좀 가격은 나가지만.”

    아까 메뉴판에서 본 스테이크는 정말 과장 조금을 보태서 웬만한 사람 머리만 했다.

    “비쌀 만하던데? 얼마나 큰 거야?”

    “꽤? 배부르게 먹을 만해.”

    상식적인 수준에서 운동선수가 배부르게 먹을 만한 크기의 스테이크가 ‘꽤’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건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도 알 수 있다.

    어느덧 음식이 나오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아야 했다.

    좀 창피하니까.

    “그나저나, 폴리. 넌 논-드래프트로 입단했지?”

    “응. 고등학교가 깡촌에 있어서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거든.”

    동료애가 싹트는 기분.

    “음, 폴리.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자료 수집하고, 분석하는 게 취미거든?”

    그런 취미는 없다. 살기 위해 하는 거지.

    “응?”

    “상대 팀 투수를 분석하다가, 그냥, 그냥 궁금해서 자료를 뒤져 봤는데…….”

    주머니에서 꺼낸 USB를 테이블 위에 놓는다.

    “뭔가 있더라고. 그래서 혹시 알고 있나 해서 주는 거야. 시간 날 때 가서 살펴봐.”

    날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폴리.

    나도 알아. 이상한 상황인 거. 근데 내 머리에선 이 상황이 최선의 상황이다.

    같은 투수였으면 차리라 나았을 거다. 대놓고 말하면 되니까.

    투수 코치의 눈을 피하는 게 좀 귀찮긴 해도 여긴 그런 상황을 그렇게 많이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차라리 직접 조언할 수 있기만 했어도, 후, 스킬 하나 잘못 배워서 이게 뭐지?’

    “그래? 한번 볼게, 뭔진 모르겠지만.”

    휴, 아마 상대 팀 타자들의 분석자료라고 생각한 듯, 별 반응 없이 USB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폴리. 다행이다.

    그렇게 폴리와 함께한 저녁 식사가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폴리는 어제보다 심각한 얼굴로 덕아웃에 앉아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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