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김사범, 메이저리그 캠프에 가다(3)
플로리다, 숙소.
“그래서, 내일 캠프 시범경기에 나와요?”
“4회쯤? 이번에 영입한 조디 머서가 아직 폼이 안 올라온 거 같아요. 이삭과 제가 돌아가면서 나갈 것 같은데요?”
“좋은 일이네요. 이 좋은 술을 나만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말과 다르게 짐이 사온 와인은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
“좋은 술은 없어요, 짐. 운동선수에겐 악마의 피일 뿐이죠.”
“그래서 내가 운동을 관뒀어요. 이 좋은 걸 마실 수 없다니.”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과거 몇 번의 회식에서 강제로 마신 적은 있지만, 다음 날 끔찍할 정도의 두통으로 하루를 날린 경험을 두어 번 하자 자연스럽게 먹지 않게 됐다.
그나저나…….
“짐, 운동선수였어요?”
“제가 말 안 했나요? 대학 때까진 꽤 유망한 외야수였는데.”
“오, 그래요? 혹시 왜 그만뒀는지 물어봐도 되요?”
몸을 숙이며 눈을…….
습관처럼 ‘이야기’ 자세를 취하는 짐. 이런, 실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나름 좋은 성적이었어요. 그대로만 유지하면 드래프트에서 나름 괜찮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할 수 있을 정도로.”
“오, 그 정도면 잘한 거 아닌가요?”
“뭐, 잘했다면 잘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과연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을까.’”
구단은 많지만, 그만큼 선수도 많은 메이저리그니까.
“몇 주를 고민하고 나니까, 확신이 들었어요. 갈 순 있지만, 성공할 순 없다고.”
“아…….”
“그래서 차츰 접었어요. 마치 연인 사이가 천천히 멀어질 때처럼. 그러다 눈을 돌렸는데, 딱! 법전이 보인 거죠.”
아니, 야구를 그만두고 눈을 돌린 곳이 법전이라고?
“그래서 공부하고, 로스쿨에 입학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죠.”
음?
“근데, 그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했는지 깨달았어요. 하지만 다시 도전할 용기는 나지 않고, 그래서 에이전트가 된 거죠.”
“뭔가 중간이 많이 빠진 느낌인데요?”
“하하, 이야기해 봤자 지루해할 거면서. 물론 중간에 에이전트 자격증을 따면서…….”
“아뇨, 알 거 같아요. 힘들었겠네요.”
내가 다급히 뱉은 말에 하하 웃으며 다시 와인잔을 잡는 짐.
“아, 그러고 보니 사범은 여자 없어요?”
“네?”
“고객의 사생활 관리도 제 업무 중 하나니까요. 그런데 몇 주간 지켜보니 사범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던데요. 혹시?”
아, 이 아저씨가.
“아니에요. 아닙니다.”
“뭐, 상관없어요. 비밀만 지켜진다면.”
아…… 이러다가 뭔가 굳어질 거 같아서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여자 좋아해요. 여유가 없을 뿐이지.”
12년, 아니 13년 동안.
“그래요? 흠. 내 눈이 맞는다면, 사범은 슈퍼스타가 될 거예요. 그리고 슈퍼스타 옆에는 언제나 여성 팬들이 존재하죠.”
큼, 큼큼…… 정말 그런가?
“문제는 그 팬이 굉장히 아름다운 셀럽인 경우도 있다는 거죠. 뭐 연애야 자유지만, 연애에 빠져 성적이 하락한 선수들이 많으니…….”
“벌렌더?”
“푸하핫! 난 노코멘트 할게요, 하하핫!”
짐이 빵 터졌다. 그렇게 웃긴가?
“하하, 아무튼 조심해요. 세상엔 마이너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말 그대로의 의미든, 그렇지 않든.”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하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여자라, 그러고 보니 돌아오기 전에도, 그 후에도 여자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네.’
정확히 말하자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모든 생각을 야구에만 집중했으니까.
한번 물꼬를 튼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생각보다 길게.
* * *
다음 날.
“뛰어, 이삭! 뛰라고!”
나는 오랜만에 덕아웃에 앉아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킴. 열정적인데?”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는 이삭을 응원하고 있자, 몇몇 선수들이 와서 말을 건넨다.
“팀이니까요. 당연한 거죠.”
“하하, 그래도 그렇게 응원하는 선수는 많지 않아. 특히 같은 자리를 두고 싸우는 상대에게는.”
“그걸 판단하는 건 내 몫이 아니죠. 아무튼. 전 이게 좋아요. 하하.”
내 말에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몇몇은 이상한 놈을 본다는 눈빛을 보낸다.
그때, 덕아웃에 이삭이 돌아왔다.
“허억, 헉. 아. 힘드네.”
“벌써? 그동안 같이 뛴 게 얼만데. 아무튼 고생했어, 여기.”
내가 건네준 음료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이삭.
“후우, 좀 낫네. 도루하자마자 장타가 나오니 쉴 틈이 있어야지. 몸은 풀었어?”
“당연하지. 아까부터 준비상태야.”
“다음 이닝부터지? 우리 승부, 1:0, 아니 득점했으니까 2:0이야, 루키. 명심해.”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의미 없을걸? 예비 메이저리거?”
아쉽다. 참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인데.
그때 덕아웃 한쪽에서 누군가 날 부른다.
“킴! 이번 수비부터 교체야, 준비해!”
“네!”
4회 말. 내 미국 무대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팀의 공격이 끝나자, 나는 글러브를 챙겨 자리로 향했다.
‘마이애미라. 유명한 선수들은 없네?’
예전 최희서 선수가 뛰어서 익숙한 구단이다.
“헤이, 루키! 긴장하지 말고!”
잠시 땅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는 게 긴장한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덕아웃에서 이삭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번 씩 웃어 주고는 주심의 손짓에 수비자세를 취한다.
심하지 않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맴돈다.
‘긴장은 내가 아니라…….’
딱!
공이 배트에 맞고, 내 쪽으로 향한다.
잘못 맞았는지, 애매한 속도로 굴러오는 공. 첫 번째 바운드를 본 순간, 이미 내 몸은 대시하고 있었다.
“마이!”
습관적인 콜. 다가오던 3루수가 속도를 줄이는 게 느껴진다.
충분히 느려진 공은 투수 옆을 지난다. 글러브로 잡아 처리하면 늦는다.
굴러오는 공을 맨손으로 잡아, 몸을 굽힌 탄성으로 강하게 뿌린다. 마치 언더핸드 투수처럼.
펑!
“아웃!”
“나이스 수비!”
1루를 향해 달려가던 주자가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3루수가 잡았으면 더 안정적이었겠지만.
뭐, 내 수비범위 안쪽이었으니까.
짐짓 여유롭게, 손가락 하나를 들고 외친다.
“원아웃!”
* * *
수비가 진행되는 도중, 덕아웃.
경기를 보며 해바라기씨를 씹는 이삭에게 큰 덩치의 흑인이 다가간다.
“이삭. 긴장되겠어?”
“네? 아, 요한. 뭐가요?”
“강력한 라이벌이야. 방금 수비는 자신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플레이라고.”
“뭐, 그렇죠? 저라면 안전하게 3루수에게 맡겼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이삭의 옆자리에 앉는 요한.
“팀을 옮기고, 이제야 메이저가 보이는데 불안하지 않아?”
“음, 글쎄요. 분명 킴은 좋은 선수지만…….”
이삭은 말을 하다 옆자리의 음료수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아직 덜 익었죠. 여긴 쉽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잖아요?”
* * *
2타수 1안타 1삼진.
루키에게는 괜찮은 성적표다. 삼진도 파울팁 삼진이니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은 몹시 우울하다.
“루키, 괜찮아! 아직 사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이삭이 위로해 주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7회 초.
상대방 투수의 투심을 걷어 올려 담장을 맞춘 타구를 날릴 때까지만 해도 난 자신감에 차 있었다.
바로 다음 수비에서 사인을 미스하여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기 전까지.
현대 야구를 주도하는 메이저, 야구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론이 하루에도 수 개씩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프트’이다. 타자의 타구를 분석해서 수비 위치를 능동적으로 바꾸는 방법.
이 이론은 현대 야구에 큰 영향을 줬다.
5명의 내야수, 2-3루 간 전체를 수비해야 하는 3루수 등, 가끔 극단적인 수비가 나와 야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수비 전략이다.
문제는, 이제 메이저에서는 시프트가 기본이고. 수비를 하는 선수가 외워야 할 사인 패턴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시즌이 시작하면 전날 상대 시프트에 대한 자료를 받는데 뭐. 시범경기니까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야.”
물론 사인은 곧 익숙해질 거다.
하지만 나는 실수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다른 것이 아닌, 그 옛날 쓰러져가는 나를 지탱해주던 수비니까.
그렇게. 첫 연습경기가 끝났다.
* * *
“하하, 또 왔나?”
그 이후, 난 수비 코치를 물고 늘어졌다.
“아직 상황에 따른 시프트 사인 변화 패턴이 어색해서요. 2-B 패턴에서…….”
물론 내 가장 절친한 동료, 이삭에게도.
“아니 그러니까 1-A 패턴하고 C 패턴이 다른 게 뭐냐니까?”
“중간에 페이크 사인이 들어간다고!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
조금 사이가 멀어질 뻔했지만, 흠흠.
그렇게 공부하고, 훈련하고, 가끔 연습경기에 출전하고 있던 그때.
운명적인 만남 또한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여기가 어딜까요? 뜨거운 태양, 그리고 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입니다!”
누가 봐도 이쁜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보며 발랄한 멘트를 던진다.
“저는 오늘! 2018년 고교야구를 상징하는 타자! 디트로이트의 김사범 선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사범 선수!”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방금 건 편집해 주겠지?
“작년 말에 김사범 선수와 김병헌 선수의 이야기로 한참 인터넷이 뜨거웠죠.”
“아……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속 159km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 김병헌 선수와 5연타석 홈런을 친 김사범 선수의 대결! 기대해 볼 수 있나요?”
의자에서 길쭉한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투구자세와 타격자세를 따라 하는 아나운서. 음…….
“크흠, 아직 맞대결을 하진 않았습니다. 전지훈련지가 같아 시범경기에서 붙을 수도 있겠네요.”
갑자기 앞에 앉은 PD의 눈이 빛난다.
“단도직입적으로, 이길 자신 있으신가요?”
아. 낚였구나.
……
“이상으로 김사범 선수와의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MBT 스포츠, 박시윤이었습니다.”
클로징멘트를 끝으로 인터뷰가 끝이 났다.
그리고 각종 유도질문에 내 멘탈도 끝이 났다.
“김사범 선수, 오늘 인터뷰 재미있었어요. 사범 선수는 어떠셨어요?”
“하하하…… 처음이라 정신없긴 했는데,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입으론 자연스럽게 멘트가 나가지만, 사실 정신이 없이 그저 멍하다.
“쿡쿡, 아닌 거 같은데요? 나중에 보충 인터뷰도 할 겸 연락처를 받고 싶은데. 주실 수 있나요?”
어라?
갑자기 앞의 아나운서, 박시윤이 확대되어 보인다. 배시시 짓는 눈웃음, 작은 머리,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 목선…….
“네? 아, 물론이죠.”
뭐가 물론이냐. 이건 너무 쉬운 느낌이잖아.
그렇게 내 번호를 받은 그녀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 * *
“헤이 루키, 정신 차려! 저기 미기가 부르는데?”
이삭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오늘은 그토록 기대하던, 미기와 같은 케이지를 쓰는 날이다.
“킴, 준비됐어?”
“네, 준비됐어요.”
“시작해 볼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배팅을 한다. 꿈같은 시간이지만, 오늘따라 내 신경은 라커룸에 가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전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시즌 중에도 운동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1~2년의 노력이 15년을 결정하니까.”
“아, 그렇군요. 에이전트를 통해서 알아봐야겠어요.”
그렇게 오전의 배팅 세션이 끝나고 오후, 시범경기를 위해 이동하는 도중,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오늘 시범경기 상대가 양키스인데, 알려 주는 게 좋겠지?’
손은 생각보다 빠르다. 이미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내 손.
띵동!
답장이 왔다. 그것도 바로!
[그래요? 감사해요! PD님한테 물어봐야겠네요. ^^]
메시지 속 웃는 이모티콘. 내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그려졌다.
시범경기가 펼쳐지는 구장 안, 많이 널널해진 라커룸에 짐을 풀고 화장실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유니폼. 설마…….
“김사범, 오랜만이다?”
녀석이다. 김병헌.
“오랜만이네. 잘 던지고 있냐?”
“나야 뭐, 항상 잘 던지지. 잘 지내냐?”
한국어가 그리웠는지, 오늘따라 다정하게 내 안부를 물어보는 녀석. 그때.
띠링!
[마침 오늘 스케줄이 비었다네요! 야호!!]
야호? 그렇게 좋은가? 흠흠.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핸드폰을 보는 내게 김병헌이 다가온다.
“뭐야? 여자친구? 아니, 네 얼굴 보니 무조건 여자친구네. 이쁘냐?”
“큼…… 아냐.”
여자친구라니. 아직은 아니다.
내 반응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녀석.
“썸이구만? 좋겠다. 난 여기 오느라 다 정리했는데. 연락하는 여자라곤 엄마하고 박시윤? 맞나? 그 아나운서분 말곤 없다.”
알아 인마. 너 은퇴 전까지 결혼 못 해.
어……?
“누구라고?”
“엄마밖엔 없다고.”
“아니 말고, 그다음.”
“박시윤 아나운서? 팬이냐? 하긴, 실물 보니까 진짜 이쁘긴 하더라. 인터뷰 하고 나서 연락처 교환하는데 설레 죽는 줄.”
아.
“그래…… 알겠다…… 힘내라…….”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라커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게 김병헌이 외친다.
“야! 너 오늘 나오냐? 난 나갈 거 같은데! 기대해라! 그때의 내가 아냐!”
“그래…… 화이팅…….”
“아, 사람 말을 듣고 있는 거야? 내가 잘해 보려고…….”
라커룸에 도착해, 핸드폰을 본다.
[그래요? 감사해요! PD님한테 물어봐야겠네요. ^^]
[마침 오늘 스케줄이 비었다네요! 야호!!]
두 통의 메시지를 잠시 보다가 곧 삭제 버튼을 눌렀다.
옆에 보이는 배트. 손을 뻗어 손잡이를 꽉 잡는다.
우드득.
내게는, 야구밖에 없다.
심기일전하고 그라운드 적응을 위해 나가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린다.
띠링!
띠링!
무시하자. 내겐 야구밖에 없으니까.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멈춘 발걸음을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문자메세지(1)
[사범선수, 오늘 경기 끝나고 짧게 인터뷰 가능할까요? 김병헌 선수와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
문자메세지(2)
[안녕하세요. 타격 인스트럭터 제시 모리슨입니다. 김사범 선수의 타격자세를 우연히 보고 연락드립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현재 김사범 선수의 타격 폼으로는 높은 레벨의 공에 대처할 수 없을 겁니다.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에이전트나……]
내 인생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