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2화 (12/175)
  • 12화 김사범, 날개를 펼치다(4)

    마운드를 중심으로 각 루를 밟으며 빠르게 홈플레이트로 향한다.

    3루 코치님과의 하이파이브는 간결하게, 크게 하면 멋없다.

    욱씬.

    홈런을 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오만하게 뛴다. 그게 포인트다.

    ‘완벽하군, 완벽한 산책이야.’

    홈플레이트를 밟고, 내 배트를 들고 기다리던 김태연과 가볍게 하이파이브. 좋아.

    덕아웃으로 들어와서 다시 축하를 받는다.

    윽, 누가 주먹으로 때리는거야?

    조금 험한 축하를 받은 뒤, 보호장구를 벗어 정리하며 생각했다.

    ‘일단 기선제압은 했다. 이제 나머지는…….’

    그때, 조용히 자신의 보호장구를 챙기며 내게 말하는 이한길.

    “좋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니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래, 이 녀석이라면 이럴 것 같았다.

    “얼마나 팀원들을 못 믿으면 고의사구 상황에서 스윙을 해?”

    짜증을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내는 녀석의 얼굴.

    할 말이 없다. 감독님에게 미리 말하긴 했지만, 뒤의 타자를 무시한 건 맞으니까.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

    그때, 코치님이 외친다.

    “이한길! 다음 너다! 정신 차려!”

    불만스러운 눈, 이한길은 자신의 보호장구를 착용하며 다시 한 번 내게 말한다.

    “6번 타자는 나가서 열심히 하고 올게, 어디의 4번 타자와는 다르게 내 맘대로 할 수 없거든, 나는.”

    “이한길!”

    한층 커진 코치님에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이한길.

    야구를 시작하고 지난 20년 동안, 항상 혼자였다.

    처음엔 내가 너무 잘해서, 후엔 내가 너무 못해서.

    갑자기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옥죄어 온다.

    어느새 공수 교대다.

    “김사범.”

    글러브를 끼고 수비 위치로 향하려는 나를 감독님이 부른다.

    “네?”

    “그것 또한 팀플레이다.”

    “……네?”

    “어떤 선수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적으로 팀을 위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크게 보면 팀플레이야.”

    상대 팀 덕아웃을 보며 말을 잇는 감독님.

    “그리고 보통 오해를 받지. 하지만 그와 함께 야구를 하는 사람 중 몇몇은 반드시 진실을 안다. 넌, 너의 플레이를 하면 된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독님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라운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 * *

    [위기 뒤에는 기회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 야구입니다.]

    [맞습니다. 지금도 보시면 2점 홈런을 맞고 나서 바로 다음 공격에 역전주자까지 나왔거든요? 양 팀 모두 집중해야 합니다.]

    [한공고 선발 정한수 투수의 공이 좀 날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맞습니다. 제구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공이 낮게 낮게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지금은 높아요. 타자가 너무 쉽게 공을 고르게 하고 있어요.]

    [제주공고의 5번, 장철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포수인데도 타격이 좋죠? 거포형 포수의 잠재력이 있는 타자입니다.]

    [투수 셋포지션, 던집니다!]

    따악!

    [타자 초구를 노립니다! 공은 유격수에게, 유격수 공을 잡고 2루 베이스 직접 밟은 뒤, 1루로! 어어!]

    [송구가 부정확해요! 이런 선수가 아닌데요?]

    [1루수 이한길 선수가 점프해서 공을 잡긴 했는데요, 1루 베이스를 터치한 타이밍이 거의 동시입니다.]

    “아웃!”

    [아, 1루심은 아웃을 선언합니다. 참 어려운 판정이었습니다.]

    [타구가 빨랐고, 2루 베이스를 바로 터치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거든요? 김사범 선수, 결승전이라 긴장했나요?]

    [그렇지 않을까요? 공수 교대, 잠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미안, 공이 좀 빠졌다.”

    “괜찮다. 잡았으니 됐어.”

    덕아웃 앞에서 날 기다리던 한수에게 미안함을 표시한다. 던진 나도 놀랐는데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어땠을까.

    글러브와 모자를 정리하고 이한길을 쳐다본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자, 집중! 결승전이다. 좀 더 집중해서 수비하자! 공격할 땐 좀 더 소리 내고!”

    욱씬.

    ‘너무 불타올랐어, 사범아, 사범아. 그동안 야구를 한 세월을 어디로 먹은 거냐.’

    저번 타석, 김병헌과의 승부 때, 과한 도발을 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

    ‘옆구리인가? 뼈는 아닌 거 같고, 근육이나 인대 쪽인가? 그래도 참을 만하다.’

    순간적으로 힘을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야, 김사범! 넌 언제 거기에 가 있었냐?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야.”

    문제는, 내가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움직임을 내야 한다는 거다. 앞으로 3시간 가까이.

    * * *

    그 시각, 목동구장 관중석.

    “앨버슨, 저 선수 과거 기록 기억나요?”

    “아니, 기억 안 나.”

    “하이스쿨 1, 2학년 통산 타율이 2할 초반대예요.”

    “뭐?”

    “장타율은 뭐, 처참하구요.”

    “흠……. 확실한 거야?”

    부하 직원이 기록지를 보여 줬다.

    “진짜군. 샘,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유망주라고 해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하는 선수는 거의 없어요. 보통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죠. 플루크 시즌, 그리고 약물.”

    “약물이라…….”

    자신의 팔을 톡톡 두드리는 앨버슨.

    고민하는 앨버슨에게 샘이 말한다.

    “여기 한국이잖아요? 아무래도 최신 약물을 검사하는 기술이 좀 떨어지죠. 의심해 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아요?”

    “어차피 계약 후 메티컬 테스트 때 밝혀질 문제라 상관없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녀석을 스카웃했다는 사실이지.”

    “평판 말이죠?”

    “그래 평판, 아무튼. 고민을 좀 더 해 보자고.”

    같은 시각, 목동구장의 화장실.

    메이슨은 손을 씻으며 전화기에 대고 말한다.

    “자료는 다 뿌렸지? 분위기 어때?”

    살짝 휘어지는 눈.

    “좋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나머지는 아직 뿌리지 말고 기다려, 좀 더 무르익길 기다리자고.”

    “그래, 그래. 보라스랑 엮어 버리는 거야. 돈으로 사람 누르는 것들의 주머니엔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 있는지 알아보고 싶지 않아?”

    “머니 게임, 의미는 다르겠지만. 즐거운 구경이 되겠군.”

    * * *

    [김병헌 선수. 이렇게까지 제구가 좋았나요?]

    [현장의 평가는 구속과 구위는 좋지만 그걸 받쳐 주는 제구가 떨어진다는 평가였는데, 지금 보면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속 또한 꾸준하게 150대 이상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1회에 김사범 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그 공, 그 공이 시속 158km 정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158이요? 하하, 구속 자체가 비공인 기록이긴 하지만 토종 한국인 투수 구속 타이기록 아닌가요?]

    [맞습니다. 김병헌 선수가 던지기 전에 두 명의 선수가 기록했었죠?]

    [대단하네요, 아직 신체성장이 완벽하지 않은 고등학생이 158이라, 관중석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스카우터들이 이해가 갑니다.]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김병헌.

    ‘이상하다. 평소보다 힘을 적게 쓰는 거 같은데 공이 왜 더 잘 나가지?’

    장철우도 공에 실린 힘을 느꼈는지 김병헌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뭐냐?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몰라. 야, 장비 벗지 말아 봐. 몇 개 더 던져 봐야겠다.”

    “미쳤어? 아직 2회야!”

    “지금 왔을 때 잡아야지, 놓치면 안 돼. 몇 개 던진다고 팔 안 부러져. 따라와.”

    질질 끌려가는 거구의 사내, 곤란한 얼굴로 감독을 바라본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 어차피 경기 끝나면 내가 직접 죽일 거다.’

    눈빛으로 통하는 사제의 대화. 장철우는 어쩔 수 없이 불펜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불펜.

    “야, 너 원래 제구가 이 정도로 좋았냐? 아니면 나 몰래 연습한 거야?”

    “미쳤냐? 아무튼, 느낌 왔어,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잡힌 거 같다. 이제 존 넓게 쓰자.”

    “네가 제구만 좋았으면 진작 넓게 썼지. 구위만 안 좋았어도 넌 배팅볼러였어.”

    “아무튼, 넓게, 넓게! 특히 그 녀석한텐 더 넓게!”

    “알겠다. 어깨 식는다. 돌아가자.”

    * * *

    야구는 흐름의 경기다. 그래서 야구에 관련된 격언은 흐름에 관련된 말이 많다. 바로 지금처럼

    ‘수비는 짧게, 공격은 길게 하라.’

    지금 우리 팀의 상황과는 정반대다.

    이닝이 시작되자마자 장타 2방에 1점을 주고, 이어지는 주자 2루 상황에서 우익수 앞 단타, 발 빠른 주자가 들어와서 동점.

    그리고…….

    “뛴다!”

    투수가 이미 폼을 뺏겨 도루를 막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2루를 향해 들어간다.

    “세잎!”

    다시 스코어링 포지션이다.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전광판을 보니 3회, 2:2. 아직 갈 길이 멀다.

    [유격수 잡아서 1루에……. 아웃! 이제 상황은 투아웃입니다.]

    [한공고 입장에선 다행이네요. 1회에 2점을 내고 아직 꽁꽁 묶여 있거든요?]

    [김병헌 선수, 4회에 김사범 선수에게 내준 볼넷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위기조차 없었어요.]

    [결국, 키는 김사범 선수가 쥐고 있네요. 오늘같이 투수가 긁히는 날은 똑같이 미친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렵거든요.]

    [말씀드리는 순간, 초구 타격! 내야 플라이로 아웃됩니다. 5회가 끝이 나고, 경기는 중반을 달리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5회가 끝난 후 클리닝 타임.

    멍하니 있는 나에게 김태연이 와서 말을 건다.

    “야, 뭐하냐?”

    “뭐, 그냥.”

    “공유 좀 해 봐. 첫 타석에서 안타 쳤다고 죽일 듯이 달려든다.”

    “뭘 공유해?”

    갑자기 속삭이는 김태연.

    “아니, 뭐 혼자 알고 있는 쿠세 같은 거? 나만 알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말 안 했을 거 같냐?”

    “……했겠지. 됐다.”

    싱거운 녀석.

    음…….

    “잠깐!”

    “왜?”

    “너, 나 좀 도와주라.”

    “응?”

    잠시 후, 원정팀 화장실. 김태연이 소리친다.

    “야, 미쳤냐?”

    “소리 죽여, 듣는다.”

    “이 꼬라지를 하고 뛴다고? 야, 그냥 접자. 후반기에 우승하면 돼.”

    “싫어.”

    압박붕대와 파스를 든 나와, 고개를 젓는 김태연의 대치상태.

    “너도 눈이 있으면 봐, 이미 푸르딩딩하게 부어올랐는데 여기서 뭘 뛰어!”

    “참을 만해.”

    “됐고, 나 지금 코치님한테 말한다. 일단 병원부터 가라.”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양손을 내밀 뿐.

    “아, X발! 어쩌라고! 안 해! 못 해!”

    생각보다 완고하다. 설득하기엔 시간이 없는데…….

    “가라 그럼. 비밀은 지켜 주고. 부탁한다.”

    불쌍하게, 최대한 불쌍하고 담담하게 말하며 혼자 스프레이를 뿌리고 붕대를 천천히 감는다.

    “아……. 진짜 넌……. 죽일 수만 있으면 죽이고 싶다 정말. 후.”

    내 손의 붕대를 뺏어 가는 녀석. 역시 착한 놈이다.

    “내 포지션 어딘지 알지.”

    “머리는 멀쩡하다.”

    “다 보여, 정말 다 보인다고. 네가 수비를 하든, 공격하든, 조금이라도 움찔하면 바로 말할 거다.”

    “그래.”

    뻑!

    내 머리를 때리는 녀석. 이젠 머리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구라 아냐 새꺄. 그땐 나 원망하지 마라.”

    “나도 안다. 고맙다.”

    “꺼져, 남자한테 그딴 더러운 말 듣기 싫어.”

    고맙다는 말이 어디가 더러운 거지?

    잠시 후, 덕아웃.

    “김 코치, 지금까지 김병헌이 던진 공이 몇 개지?”

    “62개입니다.”

    “슬슬 한계가 올 거야, 다음 이닝부턴 최대한 오래 지켜보라고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감독님과 코치님의 이야기가 들린다.

    ‘120개를 던져도 끄떡없는 녀석입니다. 심지어 여우 같은 녀석이고요.’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알았냐는 말에 대답할 수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다.

    ‘후, 답답하군. 정말 답답해.’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아무래도 압박붕대를 너무 세게 감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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