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김사범, 과거와 싸우다(2)
제주공고의 덕아웃.
“감독님, 오늘 진짜 적어도 6이닝은 던져야 해요.”
“안 된다.”
“아, 제발요! 지금까지 감독님 말 어긴 적 없잖아요. 수술도 한 번에 콜 했고!”
“그거랑 그거랑은 별개다, 너 또 수술할래?”
“진짜 느낌이 좋다니까요? 오래 던져서 테스트도 해 봐야 한다고 하셨으면서!”
“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저 팀에 진짜 밟아버리고 싶은 놈이 있어요. 근데 그놈 성격상 한 번 밟았다고 인정할 놈이 아니에요.”
“아, 그러니까 팀도 아니고, 네 몸 때문도 아니고, 그냥 밟아 버리고 싶은 놈이 있어서 던질 거다?”
“네. 저 진짜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제발…… 감독님!”
“80개.”
“네?”
“80개가 상한선이다. 그 이상 던지고 싶으면 왼손으로 던지던가.”
“아자!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김사범의 재능은 동체시력이나 수비가 아니라 적을 만드는 능력인 것 같다.
다시 그라운드, 제주공고의 1번 타자가 준비하고 있다.
“에요, 한수! 오늘 공 좋다! 아주 쫙쫙 뻗는구만!”
아무리 포수가 신나게 말을 걸어도 투수 정한수의 굳은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개 남았다.”
“한수! 그거 해 봐, 그거!”
잠깐 밝아지는 투수의 얼굴.
곧이어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진다.
“좋아! 오늘 아주 좋아!”
“시작하지, 타자 타석으로.”
정협의 말처럼 좋으면 좋겠지만, 상대 팀 투수를 의식한 정한수의 공은 초구부터 날리기 시작했다.
“볼.”
“볼.”
“스트라이크.”
“볼.”
“볼.”
“타자 1루로.”
최악의 결과, 선두타자 볼넷을 내준 투수의 얼굴은 이제 핏기조차 없이 하얗다.
“김 코치, 올라가서 다독이고 오지.”
“아직 첫 타자입니다. 좀 더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놈 성격 몰라서 그러나? 분명 다음 타자쯤에는 성질나서 마구잡이로 공을 뿌릴 거야. 지금 끊어 주지 않으면 게임이 어긋나.”
“네, 알겠습니다. 타임!”
마운드 위. 급하게 나온 코치가 말한다.
“한수야, 너 작년 종무식 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네, 기억합니다.”
“그래. 지금이 바로 그걸 보여 줄 때다. 투수는 각각의 장점이 있는 거야. 넌 너의 장점을 보여 주면 된다.”
“네.”
“한수! 긴장 좀 풀고! 좀만 기다려봐, 쟤 공만 빠르지 별거 아냐! 내가 다음 이닝 때 보여 줄게.”
“후, 알았어.”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코치. 마운드 방문이 효과가 있었는지 투수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진 게 보인다.
‘몸쪽 직구, 깡 하면 정한수지! 어때?’
포수의 리드가 맘에 든다는 듯 끄덕이는 투수, 이내 한결 자신 있는 모습으로 투구를 시작한다.
“흡!”
“스트라이크!”
“좋아! 공 좋아!”
몸쪽에 꽉 차게 들어온 직구에 상대 타자가 움찔하며 물러선다.
“저쪽 투수도 괜찮은데요?”
“그래, 아예 제구가 없는 친구는 아니구나.”
“흔드실 거죠?”
“성격 급한 게 저렇게 티가 나는데, 한번 만들어 봐야지.”
“역시 감독님. 내 팔꿈치 보자마자 째자고 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요.”
“조용히 하고 앉아서 쉬기나 해라. 지금 경기 중이다.”
“넵!”
아직 경기 초반이지만 제주공고의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
‘번트?’
1회 말, 이례적으로 빠른 타이밍의 작전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벌써 번트 사인입니다. 분위기가 대회 결승 같네요.”
“저 감독, 여우 같은 사람이군.”
“팀 자체도 감독에 대한 믿음이 강한 거 같습니다. 연습경기 첫 타석에서 번트 사인을 냈는데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어요.”
“그렇군, 특이해. 아무튼, 우리도 멍군을 불러야지. 번트 대비해서 강하게 압박하라고 해. 긴장 풀지 말고.”
2구.
투수가 공을 던지고 바로 수비자세를 취하는 순간.
‘버스터?’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
일명 버스터를 위해 다시 타격자세를 잡는 타자.
딱!
타구 코스는 2-유간, 낮지만 강한 타구가 투수 모자를 스쳐 지나간다.
‘좋아! 이 타구라면 3루까지도 충분하다!’
작전에 의해 빠른 스타트를 끊은 주자는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바로 그때.
텁.
갑자기 튀어나온 유격수가 놀라운 점프로 타구를 잡고, 그라운드에 내려오자마자 1루를 향해 송구한다.
“아웃!”
완벽한 안타가 병살타로 변한 순간.
한공고의 유격수가 조용히 두 손가락을 펼쳐 올리며 말한다.
“투아웃!”
* * *
‘몸이 굳었어. 타자로서는 땡큐네.’
“타자 1루로.”
역시나 흔들리는 녀석, 이럴 때는 경기 초반이라도 포수가 나와서 다독여 주는 게 좋은데, 움직일 생각조차 안 하는 모습이 한심하다.
‘나라도 한마디 해 줘야 하나?’
내 성격상 분명 역효과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할 무렵, 다행히 벤치에서 먼저 움직였다.
몇 마디 말을 나누자 곧 진정되어 가는 투수.
‘말 한마디에 저렇게 바뀌는 것도 재능이지. 아니 재주인가?’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듯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꽉 찬 직구.
‘경기 중 반만 저렇게 던져도 정말 훌륭한 투수가 됐을 텐데.’
미래를 안다는 것이 처음으로 조금 씁쓸해졌다.
그 사람의 한계치를 보고 온 거니까.
‘내가 누굴 신경 쓸 때는 아니지만.’
2구째.
벤치의 사인을 바라보던 타자는 이내 번트 모션을 취한다.
‘벌써? 흔들기인가? 너무 이른데?’
등줄기를 타고 맴도는 싸늘한 감각. 벤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계속해서 찝찝하다.
곧이어 2구가 포수의 미트를 향해 가는 순간.
집중력을 끌어올린 내게 타자의 무게중심이 뒤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버스터다!’
2구는 직구, 존 중앙에서 상단을 향해 가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공.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결대로 밀어 쳐서 적어도 주자만큼은 살리려 할 거다.
딱!
예상대로, 오는 공을 결대로 받아치는 타자.
‘2루 베이스 위쪽! 잡는다!’
다행히 번트 수비 때문에 2루 베이스를 커버하러 가는 도중이라 역동작에 걸리진 않았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허벅지가 나조차 놀랄 만큼 내 몸을 높게 띄워 올렸다.
텁.
글러브 안에 공이 느껴진다.
원아웃.
주자는 당연히 안타라 생각하고 2루로 향하다 공중에서 공을 잡은 내 모습을 발견했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
다급하게 제동을 하는 다리.
그리고…….
펑!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
그 표정들이 내가 최고의 수비를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역시, 짜릿하다.
* * *
공수교대를 준비하는 제주공고의 덕아웃.
큰 덩치의 포수가 포수 장비를 걸치며 투수에게 말한다.
“아깝네, 아까 작전이 통했으면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그러게. 좀 아쉽긴 한데, 어차피 쉽게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서.”
“그래? 아, 저 유격수랑 아는 사이랬지?”
“응, 이런 장면마다 항상 저런 플레이를 하는 놈이었거든.”
“야, 그런 정보가 있으면 미리 말을 해 주던가.”
“쟤 존나 잘하니까 찬스 때마다 피해서 치라고?”
“뭐 그래도…….”
“필요 없어, 이제는 상관없거든.”
“왜?”
“쟤가 존나 잘하든 말든 이제 내가 더 쩔게 잘하거든. 가자.”
투수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마운드를 향해 걸어간다.
“새끼, 재수 없기는.”
말과는 다르게 실실 웃음을 흘리며 포수는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 * *
‘좋아, 좀 걱정했는데 이제 이 정도의 플레이는 크게 부담이 가지 않네.’
좋은 플레이 하나로 들떠 있을 나이는 지났다. 수비는 끝났고 이제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 난 이제 반쪽짜리 선수가 아니니까.
4번 1루수 이한길.
외야에 김태연이 있다면 내야에는 이한길이 있다. 출루율은 다소 떨어지지만, 타율과 장타율은 높은 타입.
하지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선수는 마운드 위, 저 녀석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스트라잌, 아웃!”
일견 강속구 투수로 보이지만, 사실 속에는 능구렁이가 100마리쯤 숨어 있는 녀석이니까.
“아오, 거기서 3구 연속 변화구? 폼도 비슷해서 공보기 전에는 알아채기 힘들겠다.”
“오케이.”
5번 3루수 김준섭.
수비와 공격 모두 무난한 밸런스형 타자, 딱히 약점이 없는 타자이기도 하다.
‘그 말은 장점이 없다는 소리기도 하지.’
“아웃!”
제법 공을 보며 5구까지 갔지만, 바깥쪽으로 꺾이는 슬라이더에 손이 나가 아웃.
이제 내 차례다.
“안녕하십니까.”
구심에게 가볍게 인사한다. 적어도 손해가 될 행동은 아니다.
“아, 유격수. 병헌이의 짝사랑 상대 아냐?”
“……?”
“너 본다고 신나서 방방 뛰던데? 원래 항상 신나 있는 애인데 오늘은 더 감당하기 힘들어.”
“반겨 주는 거 같진 않던데?”
“그래? 뭐 그건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시고, 아무튼 조심해. 내 생각엔 공도 신나서 방방 떠서 들어올 거 같거든.”
“그만, 타자. 타석에 들어와라.”
심판의 제지에 상대 팀 포수는 하던 말을 멈춘다. 그리고 1구.
씨익.
타격 자세를 잡고 놈을 바라보자, 날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녀석.
초구. 매서운 직구가 존 안으로…… 이 새끼가!
펑!
몸을 향해 사정없이 꽂히는 직구를 가까스로 피한다.
“미안하다. 공이 빠진 거 같은데?”
재빨리 사과하는 포수, 말리는 시누인가? 짜증이 더 심해진다.
‘분명히 저놈 저거 일부러 그런 거야.’
나는 은근히 멋있는 재회와 불타오르는 진검승부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었지.’
“경고야, 다음에 한 번 더 이런 공이 나오면 조치를 취할 거다.”
“아, 죄송합니다. 진짜 공이 빠진 거 같아요. 가끔 저러거든요.”
잠시 심판과 이야기를 하던 포수가 자리에 다시 앉는다.
뭐가 됐던 1구는 볼.
이어지는 2구는 바깥쪽 꽉 찬 직구. 스트라이크.
3구, 몸쪽 슬라이더. 위협용으로 보이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볼.
4구째, 존 상단을 노리는 포심. 맘먹고 휘둘러 보지만 앞의 녀석들이 말한 대로 높게 들어오는 공에 파울.
카운트는 2-2가 됐다.
잠시 타석에서 나와 장갑을 다시 조인다.
‘저 녀석이라면 분명 승부할 거다. 미래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절대 피하지 않던 녀석이야.’
하나만 노린다. 직구.
다시 나만의 루틴으로 타격 자세를 만든다. 심호흡,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의 발.
“크핫!”
공을 던지는 오른손은 끝까지 몸통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채찍을 휘두르듯 갑자기 나오는 오른손. 그리고 순식간에 존을 향해 다가오는 공.
“흡!”
끝까지 본다. 보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다.
타자에게 가장 먼, 바깥쪽 아래로 향하는 직구, 배트가 돌아간다.
빠악!
즐거운 산책 시간이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났다. 최종 스코어 7:4. 한공고의 승리.
2회의 내 홈런을 마지막으로 6회까지 점수를 내지 못했지만, 그 후 올라온 투수를 두들겨 6점을 더 뽑아냈다.
“김사범!”
“하아. 또 왜?”
“오늘은 내가 졌다. 완패야. 근데 다음에 만나면 지금처럼은 안 될 거다.”
“요즘 티비에서 스포츠 드라마 하는 거 있냐?”
“……?”
“아냐, 다들 이상하길래. 공 좋더라. 대회에서 만나자.”
내가 자기 공을 칭찬할지 몰랐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한 녀석.
사실 이 대결은 내 패배다.
두 번째 타석에서 자신이 가진 변화구를 모두 보여주며 나를 몰아붙였고, 끝내 몸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커터에 배트를 내지 못했으니까.
‘더 성장하기 전, 지금 밟아서 기를 죽여 놔야 나중에 편할 텐데.’
경기를 마치고 짐을 싸는 내내 마지막 커터의 잔상이 나를 괴롭혔다.
연습경기 [vs 제주공고]
4타수 3안타 1홈런 1삼진.
* * *
고교야구왕 : 까나리 가즈아!
아붹 : 까나리 코인 떡상!
MJ : 입 털다 망하죠? 뻔하죠? 까나리죠?
축구왕김홈런 : 이번엔 북극에서 야구중계 ㄱㄱ?
고교야구왕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BJ 구라왕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하루 되시고 제 방송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라 : 도망가는 거예요?
MJ : 구라왕 튄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 깔끔하게 패배 인정할게요. 저걸 친단 말야? 운이네 운. 아까 그 유격수 얼마나 잘될지 두고 봅니다.”
“아무튼, 나 약속 지키는 거 알죠? 내일 밤 8시. 방송 켜자마자 먹습니다. 알아서 들어와요. 그럼 뿅!”
김사범, 자기도 모르는 새 또 한 명의 적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