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김사범, 과거와 만나다(1)
정신을 차려보니 고등학교 운동장이 눈앞에 있었다.
‘한공 고등학교, 내 처지가 비참해서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지.’
프로 선수들은 가끔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에 야구용품 후원이나 일일 코치 등으로 찾아가서 얼굴을 비추지만, 나는 이곳에만 오면 비참함이 몸을 잡아먹는 느낌이라 찾아온 적이 없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따라간 야구부실.
“여~ 김사범? 그만둔다 어쩐다 하더니 결국 왔네?”
“어 진짜네? 회식 때 울면서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나?”
“그만두기도 무서웠나 보지 뭐, 냅둬, 좀 더 하면 쟤 울겠다.”
그리고 날 매섭게 물어뜯는 그때 그 동기들.
사실 이건 내 업보다.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중학 시절, 나는 중학생답지 않은 피지컬과 환상적인 수비, 준수한 타격으로 전국에서 손에 꼽는 유망주였다.
“방해될 거면 저리 꺼지지?”
“나한테 들러붙어서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면 알아서 기어라. 나한테 이런 뒤치다꺼리 시키지 말고.”
“연습 안 해? 내가 말했잖아, 수비는 노력이라고. 내가 그 실력이면 집에 가서 이불 덮고 밤새 울 텐데. 넌 자존심도 없나 봐?”
저들에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역전되어 3학년인 지금에 와선 나는 졸업반인데도 유격수 주전 자리가 위태로운 선수이고, 저들은 당당한 주전이다.
‘후. 애들이라 한 대씩 쥐어박지도 못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개꿈인 거 같은데 한번 해 봐?’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날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이 상황이 꿈이길 빌며 이상한 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 예전에 쓰던 내 배트가 보였다.
‘이 배트를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펑고배트를 연상케 하는 얇은 몸통, 급격히 넓어지는 빵. 극단적으로 탑으로 쏠려 있는 무게중심. 모두 느린 스윙 스피드를 만회하려 한 고민의 산물이다. 어차피 스윗 스팟에 맞지 않으면 유의미한 타구가 나오지 않으니 아예 배트 스피드라도 올려서 배팅 파워를 올리려고 한 얄팍한 수작의 집합체.
‘프로에 가자마자 코치들이 바꾸라고 난리 쳐서 바로 바꿨지.’
내 몸이 홀린 듯 배트로 다가갔다.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쥔 배트.
그 감각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익숙해서, 무의식적으로 스윙을 했다.
띠링!
[스킬의 습득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스킬 ‘휘두르기’를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습득으로 인하여 상태창이 봉인 해제됩니다.]
[이름 : 4번타자
칭호 : 힘이 999인
직업 : 전사
스탯
힘 : 999+(현재 적용 : 200)
민첩 : 10
지능 : 10
내구 : 10
스킬
- 휘두르기 : 둔기를 강하게 휘두를 수 있다. 둔기 사용 시 힘 스탯에 비례하여 추가 공격력 상승
- 힘에 비해 현저히 낮은 내구 수치로 인해 힘 스탯의 대부분이 봉인되었습니다. 내구 수치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어…… 어?
* * *
“자, 그럼 대표님. 스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요. 발렌 사가는 스킬 습득 방식이 특이하기로 유명하죠?”
“하하, 저희 게임의 장점 중 하나죠.”
“NPC에게 배우는 스킬 이외에도 행동 스킬이라는 게 따로 있는데, 이 스킬은 무엇입니까?”
“좀 설명이 길어질 수 있는데,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발렌 사가는 뇌파를 통해 조종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어떤 행동을 오래 하셨을 경우 뇌에서 하나하나 명령을 내리기 전에 신경계통에서 먼저 반응하는 게 있거든요. 그 행동들을 캐치해서 사용자만의 스킬로 만들어 주는 거죠.”
“아,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익힌 동작들이 스킬이 되는 거네요?”
“그렇죠, 거기에 약간의 게임성을 더해서 게임 스킬처럼 가공을 해 주는 거죠”
“그래서 발렌 사가 튜토리얼에서 스킬이 먼저 생성되고 스탯창이 보이는 거군요?”
“시스템에 익숙해지시라는 제작진의 배려입니다. 하하.”
* * *
몇 시간 후, 나는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정말 돌아온 건가? 그것도 게임 상태창을 가지고?’
‘도대체 왜? 누가 이런 거지?’
‘진짜 꿈이 아니라 현실인가?’
짧은 비행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감독님의 주관 아래 회의실로 모였다.
“모두 반갑다. 뭐 일주일 만이지만 그새 살이 붙은 녀석들도 있고, 도대체 얼마나 먹어 치운 거지?”
몇몇 찔리는 녀석들과 그걸 보며 빵 터지는 녀석들.
“어차피 체력 훈련이야 몇 주 전까지 신나게 했으니 크게 할 필요 없을 것이고, 당장 내일부터 청백전으로 시작해서 시뮬레이션 경기, 연습시합이 줄줄이 잡혀 있다. 제주도라고 해도 아직 꽤 쌀쌀하니 감기 걸리지 않도록 몸 관리 잘하길 바란다. 그럼 이만 해산.”
“아, 그리고 김사범은 끝나고 잠시 나 좀 보자.”
감독님의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랐다. 내 자존심이었던 유격수를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던 날. 그날이 오늘이다.
“그래, 몸은 잘 만들었나?”
“네, 1주일 동안 쉬지 않고 운동했습니다.”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다시 그 상황을 겪기는 싫다.
“그래? 어쩐지 눈빛이나 이런 게 좀 달라진 거 같기도 하군.”
“……하실 말씀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음, 그래, 그렇게 말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난 내년에 유격수로 종일이를 쓸 계획이다.”
2학년 유격수, 수비는 나보다 뒤처지지만, 그 외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낫다. 지금까진.
“그럼 저는 후보입니까?”
“아니, 마침 2루수인 현석이가 족저근막염으로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너를 그 자리에 돌아가며 쓰려고 한다.”
2학년과 로테이션이라. 지금 들어도 굴욕적이다.
“감독님, 만약 제가 전지훈련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까?”
“응?”
“1주일 전 저와 지금의 저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니 내일 청백전이라도 유격수로 나가고 싶습니다.”
“……좋아. 난 자신감 있는 선수는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내 성격 알지?”
“네.”
“그래, 내일 넌 유격수로 나가게 될 거다. 이만 가 봐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종협 감독, 한공 고등학교 야구팀 창설 때부터 감독직을 맡아 몇 년 만에 전국대회 결승전까지 올려놓은 능력 좋은 감독이다. 대범한 선수를 좋아해 선수들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만 그만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예외 없이 바닥으로 처박아 버리는 냉혹함을 가지고 있다.
‘내일 보여 주지 못하면, 전지훈련에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할 거다.’
상관없다. 이게 현실이고, 내가 본 모든 것 또한 진짜라면, 난 그를 만족하게 할 수 있다.
다음날.
고교 야구에서 드물게 타격 코치와 투수 코치, 피지컬 코치까지 가지고 있는 한공고답게 체계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몸 잘 풀어라! 설렁설렁 뛰지 말고!”
“아프면 너희 손해지 내가 손해냐? 스트레칭 제대로 안 해?”
이 나이대의 대부분 선수는 이런 소리를 잔소리로 여긴다. 스트레칭을 꼼꼼히 안 해서 몸이 좀 뻐근해도 자고 일어나면 낫는 나이니까.
‘본격적으로 웨이트를 하기 전의 몸이라 좀 어색하네. 코어는 약하고 유연성도 부족해. 최대한 빨리 몸을 풀고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경기 때 제대로 뛸 수 있겠어.’
신고선수로 입단해 1년 만에 겨우 2군 소속 선수로 계약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털어 피지컬 코치를 고용해 몸을 만들었다. 심폐와 협응력을 위한 크로스핏, 코어를 좀 더 질기게 만들기 위한 필라테스, 유연성을 위한 요가까지. 물론 부상이 줄어든 거 빼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몸을 풀었으면 청백전 시작하자. 투수들은 팀을 안 나누고 A팀, B팀 모두에게 공을 던질 거다. A팀부터 부른다. 포수 정협, 1루 이한길, 2루 김현석 3루 김준섭……. 다음은 B팀! 포수 김정한 1루 최원표 2루 홍탁 3루 김원영 유격수 김사범…….”
노골적으로 주전, 비주전으로 나누어진 팀 배정에 몇몇 아이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팀이 나뉘진 않았던 거 같은데, 내가 어제 한 말 때문인가?’
“이상, 각자 덕아웃으로 들어가서 준비해라.”
B팀의 덕아웃.
“선배, 세게 던진다고 무리하지 마세요. 어차피 살 사람 죽이지도 못하잖아요?”
“크크큭, 쟤 말 무시해도 되요. 넌 선배한테 그런 말을 하냐?”
“아니, 선배기 전에 지금은 팀 동료잖아. 이 정도는 해도 되죠?”
아, 죽여 버리고 싶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놈한테 무시당할 정도로 내가 허접스럽게 살았구나.
‘최원표? 넌 내가 기억했다. 좀 이따 보자.’
“플레이볼!”
코치님의 우렁찬 콜이 들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B팀의 선공.
‘8번에 유격수. 여기부터 시작이네. 왜 내가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이 자리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절대.’
전지훈련 첫 청백전이 언제나 그러하듯, 추운 날씨에 몸이 덜 풀린 투수로 인한 난타전이 되었다.
“한수가 몸이 덜 올라왔나?”
“네, 아무래도 작년에 좀 많이 던져서 천천히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래, 올해 마운드 기둥이 될 녀석이니 잘 관리해야지. 그래도 3학년 됐다고 멘탈은 좀 괜찮아진 거 같은데?”
“저번 대통령기에서 마운드 넘긴 게 분했나 봅니다. 마인드 컨트롤에 대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다고 하던데……. 아시다시피 그게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저 정도면 만족하네. 그 욱하던 성격이 저 정도로만 컨트롤 되면.”
‘2사 2, 3루. 5번이라. 정한수 저놈 성격상 한 방 터지면 나까지 올 수도 있겠네.’
프로에서 10승 이상을 할 수 있는 솔리드한 선발투수라고 평가받으며 입단했지만, 저 성격 때문에 그저 그런 땜빵 선발-불펜 추격조를 오가던 놈이었다.
딱!
침착하게 던지려고 한 것 같지만 3-0에서 제구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몰린 직구를 타자가 제대로 맞췄다.
“우와와악! 저걸 잡아?”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는 라이너성 타구를 어느새 튀어나온 유격수가 몸을 날려 잡는다.
“역시, 이번 시즌 유격수는 종일이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수비가 몰라보게 늘었군요.”
“흠, 나도 그럴 생각이네만, 일단 지켜보지.”
좋은 타격은 아직 내게 먼 이야기지만, 멋진 수비는 내 피를 끓게 한다.
‘진짜 수비가 뭔지 보여 주지.’
1회 말, B팀의 수비.
‘오랜만에 반대편에 있으니까 좀 어색하긴 하군’
근처의 땅을 고르며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힌다.
‘어차피 수비, 그거 공 오는 거 잡고 잘 던지면 된다. 쉽게 생각하자.’
1번 신민수, 좌익수. 빠른 발과 준수한 타격 능력이 돋보이는 타자다. 단점은 프로에 가서도 고쳐지지 않은 공격본능, 그리고…….
‘초구 성애자.’
큰 경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경기에서 초구에 휘둘러 대는 공격성이 저 녀석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포수의 사인은 바깥쪽 슬라이더.
확실히 빠지지 않는 이상 타자는 무조건 휘두른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그 공이 타자의 배트에 맞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조금 짧나? 겨울에 슬라이딩은 위험한데.’
마운드에서 한 번, 2루 앞에서 한 번. 그리고 세 번째 바운드는 슬라이딩한 내 글러브 안으로.
차가운 바닥에 몸이 조금 쓸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관성을 이용해서 몸을 튕긴다.
불안정한 자세, 하지만 공의 실밥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쉬이익, 펑!
“으앗!”
그리고 ‘뻗어 나간’ 송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건방진 1루수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뭐, 뭐야 저 송구?”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거 아냐? 저기서 왜 저렇게 세게 던져?”
“아니 그것보다 던진 사람이 김사범인데?”
“운 좋게 공이 잘 잡혔나 보지, 운이야 운.”
안타성 타구를 걷어 낸 수비를 보고도 아무도 환호하지 않는다.
“원아웃! 두 개 더!”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훈련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힘’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았다.
아직은 자제해야 한다. 하지만.
“건방진 새끼, 오늘 미트 터질 줄 알아라.”
말 싹수없게 하는 후배 한 놈에겐 참교육이 뭔지 알려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