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면초가에 몰린 행성 코어 -- >
행성 코어는 결국 지구의 의지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성 코어가 소멸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지구의 의지는 행성 코어를 봉인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성 코어를 봉인한 지구의 의지는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행성 코어와 싸움을 벌였던 이면 공간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이면 공간의 크기는 족히 지구의 크기와 맞먹는 규모였다.
그 이면 공간을 유지하는 부담을 지금까지 지구의 의지와 행성 코어가 분담해서 지고 있었다.
그런데 행성 코어를 봉인하고 난 후에는 이면 공간의 유지를 오직 지구의 의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 이면 공간은 이제 용도가 다 했다.
지구의 의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도 이면 공간에는 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었다.
지난 수 천 년을 하늘 어머니라는 지구의 의지를 받들며 적인 마가스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인간들, 그리고 그 인간들의 생활환경이 되어 주었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이면 공간에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면 공간을 붕괴시킬 수는 없었다.
만약 이면 공간이 붕괴되면 지구 현실과 이면 공간의 지형이나 생명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충돌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이면 공간에 있던 인간이나 동식물이 지구 현실에 드러나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지금 이제 다시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는 지구 인류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구 인류와 이면 공간의 인류 사이의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승패는 사실 이면 공간 인류의 낙승일 터다.
그랜드 마스터에 해당하는 전사들이 즐비한 이면 공간의 전력을 현실의 능력자들이 감당하긴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지구의 의지는 고민 끝에 해결책을 찾아서 움직였다.
"그러니까 댁이 누구라고요?"
세진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지구의 의지라고 소개하는 여자의 등장에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 지구의 의지. 그러니까 지구라는 행성 자체의 의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행성 코어와 대립하고 있었던 하늘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 그래요. 여기에선 그렇게 부르고 있죠.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아니 그 보다 행성 코어와의 싸움은 이제 끝이 난 겁니까?"
세진은 인간같지 않은 외모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는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세진은 그 여자에게서
'여자구나. 예쁜 여자. 아름다움 여자.'
이상의 의미를 찾지도 붙이지도 못했다.
사실 세진은 외모만으로 어떤 인식의 영역이 아득하게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구의 의지라는 여자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 이상은 전혀 주지 않았다. 대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세진은 눈앞의 존재가 자신과는 격이 다른 존재임을 인정해야 했다.
- 덕분에 승리했어요. 행성 코어라고 부르는 땅의 어머니는 이렇게 봉인이 되었죠. 지구의 의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어서 빛 덩어리 하나를 내보였다.
"이것이 행성 코어 입니까?"
- 맞아요.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죠. 지금 이 모습은 봉인이 되어 있는 모습이니까요.
"으음."
세진은 그저 빛이 뭉친 것 같은 그것을 바라봤다. 어쩌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운 것이에요. 어리인 것이에요. 그리고 이 몸을 갖게 해 줘서 고마운 것이에요."
어리가 지구의 의지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끼어들 틈을 발견한 것이다.
- 나도 반가워요. 그리고 잘 부탁해요.
"부탁? 설마 우리에게 뭔가 부탁할 것이 있는 것이에요?"
어리가 물었다.
"아니, 고맙다고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탁이라니요? 그건 아니잖아요?"
자넷이 듣고 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넷의 눈에 비친 지구의 의지는 그저 평범한 여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세진이 느끼는 정도의 격의 차이를 자넷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세진의 격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넷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세진은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리는 것이니 말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부탁이기도 하지만.
지구의 의지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면 공간에 닥친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댁하고 그 행성 코어하고 둘이서 유지하던 이면 공간을 이제 댁이 혼자서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그게 벅차다는 건가요? 거기다가 당신은 이제 지구 현실로 돌아가서 지구 자체에 신경을 써야 하니 이면 공간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는 거?"
- 맞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이면 공간을 인수하라고요?"
- 이 정도 규모의 이면 공간이라면 어리에게도 큰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서 이 이면 공간의 유지 코어로 그 행성 코어를 준다니까 문제인 거지요. 어리가 그 행성 코어를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어리의 테멜 안에 그 행성 코어가 유지하는 이면 공간을 수용하라는 뜻이잖아요."
- 하지만 이 행성 코어는 봉인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지요. 이 행성 코어와 이면 공간을 어리의 테멜 안에 유치하기만 한다면 어리는 아마 거의 영원히 에너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행성 코어는 수 많은 기운들을 흡수해서 그것을 에테르로 바꾸는 능력이 있어요.
"그게 어쨌다고요?"
-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너지는 평형 상태로 가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에요. 말이 어려운 것이에요."
- 그냥 들어요. 어리.
"아, 알았는 것이에요."
-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뜨거운 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겠죠? 그래요 뜨거운 물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든 사용하게 되면 물이 점점 식어요. 그건 달리 말하면 에너지가 사용하기 어려운 형태, 고정된 형태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지구의 기운들도 그렇죠. 내가 만들어 내는 기운은 생기가 넘치고 활발하지만 그것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요?"
- 그런데 행성 코어는 그 에너지를 에테르로 바꾸는 역할을 하죠. 물론 다른 활발한 기운까지 모두 빨아들여서 에테를로 바꾸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행성 코어는 차갑게 식어서 쓸 수 없는 물을 뜨거운 에테르로 바꿔요.
"그리고 그 에테르를 다시 정화하면 뜨거운 물이 된다는 겁니까?"
세진이 뭔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행성 코어는 행성의 에너지 순환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다르게 이야기하면 어리의 테멜에 지금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를 거의 영원히 순환시켜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예요.
"엄청난 것이에요. 음, 대단한 것이에요.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여기 행성 코어는 무서운 것이에요. 다른 행성에 있는 행성 코어들은 자의식이 없는 것이에요. 지구의 행성 코어만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에요."
어리가 행성 코어의 역할에 대해서는 감탄을 하면서도 지구의 의지가 가지고 온 행성 코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이 무섭다는 말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 그래요. 나도 알아요. 나 때문이죠. 행성 코어라는 이 존재가 처음 지구에 왔을 때에는 지성이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지닌 권능이 이 행성 코어를 일깨웠죠.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관여하는 내 권능이 말이에요.
"그럼 지구의 행성 코어가 다른 행성의 그것과 다른 이유가 지구의 의지 당신 때문이라는 겁니까?"
세진이 확인하듯 물었다.
- 맞아요. 그리고 어리도 비슷하죠. 어리도 제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변했으니까요.
"저도 그런 것이에요? 저는 다른 이면 공간 유지 코어를 흡수하면서 성장을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에요?"
- 그 코어들이 모두 내 영향을 받은 것이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흡수하는 과정에서도 지구에서 흡수를 할 때에는 내 힘의 영향을 받았죠.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지금과 같은 온전한 지성체가 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지구의 의지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세진이나 어리도 할 말이 없었다.
세진은 적어도 지구의 의지라는 저 엄청난 존재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까도 어리가 말했듯이 행성 코어는 위험해요. 우리 어리가 그것을 제어 할 수는 없어요."
자넷이 다시 한 번 지구의 의지가 가지고 온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했다.
- 너무 그렇게 잘라 말하지 말아요. 내가 준비한 것이 또 있어요. 지금 봉인된 행성 코어는 쉽게 이야기하면 유아라고 할 수 있어요. 미안한 일이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행성 코어는 죽고 여기 있는 행성 코어는 그 후손이라고 할까요? 그런 존재죠. 그러니 어떻게든 제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입니까?"
- 행성 코어의 부모가 되세요. 어리의 예가 있으니까 이 행성 코어도 두 사람이 잘 키우면서 가르치면 될 것 같아요. 원래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 그게 무슨?"
세진은 지구의 의지가 하는 말에 기겁을 했다.
행성 코어를 자식으로 삼아 키우면서 가르치란 소리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흐응, 그럼 여기 이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그런 것이에요?"
어리가 급격히 관심을 보였다.
"어리야, 너 어쩌려고?"
"흐으응, 어리는 오션이란 모랜이랑 시티, 팜, 연구소, 실버타운, 호수, 마운틴, 초원, 창고1.2.3.4 등등등의 아이들이 있는 것이에요. 그 아이들도 어리가 전부 교육을 시킨 것이에요. 그러니까 조카가 생기면 어리는 정말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에요."
어리는 뜻밖에도 행성 코어가 어린 아이가 되었다는 말에 반색을 하고 겁이 없어졌다.
"힘이 쎈 아이라도 아이는 아이인 것이에요. 사랑과 관심을 주면 되는 것이에요. 어리는 누리를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이에요."
"누리는 설마 저 행성 코어의 이름이냐?"
"땅의 어머니였으니까 세상인 것이에요. 한 누리, 온 누리 할 때의 누리인 것이에요. 누리는 세상이란 뜻인 것이에요."
- 그럼 결정이 된 것인가요? 지구의 의지는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하지만 세진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행성 코어가 어리의 테멜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 곤란합니다. 그 행성 코어가 어리의 테멜 안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그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 흐음.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하지요. 내가 테멜 중에 하나에 이, 그래요 누리를 안치하도록 하지요. 어리가 테멜 안에 여러 테멜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 중에 하나에 이 누리를 심는 거예요. 그럼 누리는 그 테멜에서만 힘을 쓸 수 있게 될 거예요. 아, 뭐 조금 더 힘을 쓴다면 지금 어리가 테멜 밖에서 힘을 쓰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어리도 그런 것처럼 자신의 테멜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과 테멜 밖에서 쓸 수 있는 힘의 격차는 커요. 그 정도는 어리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지요. 어떤가요? 그 정 도라면?
"결국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그 테멜을 어리의 테멜 밖으로 내보내서 독립을 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우주 어딘가에 테멜을 방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세진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물었다.
- 괜찮아요.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이면 공간의 마가스들은 온전히 에테르를 기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제 힘이 보태져서 태어난 거죠. 앞으로 지구의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도 그렇게 태어나게 될 거예요.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게 되겠죠. 그리고 누리 역시 그렇게 될 거예요. 너무 오래 이면 공간에서 저와 함께 있다보니 그렇게 변했죠. 누리는 다른 행성 코어들과는 다른 존재가 된 거예요.
"뭔가 큰 짐을 지게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리의 테멜에서 영원한 에너지 순환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니 마냥 거부하기도 어렵군요.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 좋아요. 아주 좋아요. 어쩌면 이후에 어리는 수 많은 공간을 지닌 새로운 세상의 주관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누리 역시 어리와 함께 그 세상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겠죠. 축하해요. 지구의 의지는 세진과 자넷, 어리에게 그렇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 이제 여러분을 이면 공간 밖으로 보내 줄 거예요. 그리고 여기 이면 공간을 그대로 어리 테멜 안의 순둥이 테멜로 넣어 주겠어요. 원래 순둥이 테멜은 의지가 없는 테멜 코어이니 도구로 써도 될 거예요. 그곳에 누리를 안착시키고 여기 이면 공간을 거기 펼쳐 주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럼 이만.
지구의 의지는 그렇게 용건을 마치고 사라졌고, 얼마 후에 세진과 어리, 자넷 앞에는 이면 공간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