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면초가에 몰린 행성 코어 -- >
디퀴피드 왕검은 지구의 의지에게서 에테르를 정화하는 방법을 전해 받았다.
실제로 왕검은 지구라는 행성의 거대한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때에 처음 알았다.
그 동안 에테르 기반 생명체의 근원인 행성 코어와 대립하느라 이면 공간에 갇혀서 지구 현실에 제대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던 의지가, 이면 공간에서 행성 코어에게 우세를 점하는 기회를 타서 왕검과 연결이 된 것이다.
지구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디퀴피드 왕검의 능력을 높이 산 지구의 의지는 왕검에게 에테르 정화의 방법을 일러 주었고, 그것을 왕검이 할 수 있도록 왕검의 본체를 약간 개보수 해 주었다.
거대한 건축물인 왕검은 지구 의지의 도움으로 과거 디퀴피드 종족이 만들었던 완벽한 디퀴피드로 거듭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장 왕검 스스로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서 그대로 동족들에게 알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구의 의지로 변한 부분들은 왕검 스스로 점검을 해 봐도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살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에테르 정화 능력이 생겼고, 그것은 이전에 프락칸이나 깝딴의 도움을 받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다.
적어도 왕검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몬스터도 창궐을 할 수가 없었다.
에테르로 이루어진 에테르 기반 생명체조차도 순식간에 정화를 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왕검에게 생긴 때문이다.
물론 그 영역이란 것이 왕검의 본체인 건물을 중심으로 십여 Km 정도의 넓이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왕검은 충분히 만족했다.
지구 전체를 아울러서 대기 중에 있는 에테르를 정화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막기 위 해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곧바로 에테르로 바꿔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왕검이 지구의 에테르 정화를 시작하면서 지구 전체의 에테르 농도는 점점 낮아졌다.
그렇게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남북 아메리카를 점령하고 있던 폴리몬들이었다.
폴리몬들은 본능적으로 지구의 에테르 농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폴리몬의 수장은 자신이 지구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들어 내는 에테르로 몬스터들을 만들어 내던 것을 중지하고 대기중에 에테르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짓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기에 흩어진 에테르는 곧바로 왕검에 의해서 끌려가서 정화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폴로몬의 수장은 고민에 빠졌고, 결국 처음처럼 다시 자신이 만들어내는 에테르로 몬스터들을 생산하는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몬스터들을 다른 대륙으로 보내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퍼뜨렸다.
폴리몬의 수장은 아메리카 대륙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땅을 지키지 위해서 몬스터들을 풀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이들이 지옥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몬스터들이 폴리몬의 말을 듣는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폴리몬을 제외한 모든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마음 놓고 살던 사람들이 다시 몬스터에게 쫓겨서 무리를 짓게 되고, 또 각성 능력자나 수련 능력자를 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남은 능력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폴리몬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능력자들을 남모르게 해치거나 혹은 억 압했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능력자들이 대거 다른 대륙으로 쫓겨 가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 폴리몬들이 인간들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 능력자들 대부분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텐데, 폴리몬들은 인간들에 대한 공격적인 성향이 없었다.
그 덕분에 폴리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능력자들은 대부분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폴리몬의 수장이 아메리카 대륙에 몬스터들을 풀어 놓으면서 폴리몬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평화를 노래하던 이들은 재앙을 맞이했다.
사실 인간들이야 죽어가거나 말거나 폴리몬들이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결국 지구는 폴리몬과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이 주를 이루는 아메리카 대륙과 인간들이 주도권을 찾은 다른 대륙으로 양분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구의 에테르 농도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인간들의 과학 문명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전기 전자를 바탕으로 한 인간들의 과학은 그 동안 에테르 때문에 쓸모가 없었지만, 디퀴피드 왕검의 힘으로 에테르가 정화되면서 다시 활용이 가능한 문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테르 코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원정 사냥을 떠나기 시작했다.
폴리몬의 수장이 탄생 시켜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뿌려 놓은 몬스터들은 폴리몬을 지키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인간 능력자들을 끌어 들이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몬스터 사냥을 통해서만 에테르 코어를 얻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능력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냥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폴리몬의 수장은 자신이 이제 지구의 인간들을 위해서 에테르 코어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인간들과 교섭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사냥터를 제공하고 그곳에 몬스터를 배치하기도 한 것이다.
대신에 인간들이 다른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을 맺기를 원했다.
물론 그런 협정은 쉽게 맺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인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물론 디퀴피드 왕검이 폴리몬들의 대척점에 있기는 하지만, 왕검이 인간을 대표해서 조약을 맺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왕검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왕검은 오로지 지구 대기에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도록 정화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나머지 시간에는 동족들에게 자신이 지구의 의지로부터 얻은 것을 전수하는 것에 열중했다. 언제 그 모든 것을 파악해서 동족들에게 온전한 디퀴피드로서 에테르 정화까지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디퀴피드는 거의 영원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어서 조급할 것이 없었다.
폴리몬의 수장과 지구 인류 사이의 협약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상 지구 인류의 힘은 폴리몬과 에테르 기반 생명체와 전면전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했다.
폴리몬의 수장은 대륙 코어를 흡수한 존재였고, 스스로 지구의 기운을 에테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구에 남아 있고, 사용 가능한 모든 핵폭탄을 퍼부어도 폴리몬의 수장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폴리몬의 수장이 직접 나서서 인류와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은 당연히 디퀴피드 왕검의 존재 때문이었다.
폴리몬의 수장은 왕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아니 디퀴피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세진과 자넷, 어리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디퀴피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어리 테멜과 함께 이면 공간에 있으니 누구도 디퀴피드 종족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디퀴피드의 비밀이 지켜진 덕분에 폴리몬의 수장은 자신의 영역만 공고히 하고 어떻게든 폴리몬이라는 동족들의 멸종을 막으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폴리몬의 수장은 인간들에 대해서 별다른 적개심이 없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에 대해선 조금 불쾌하지만 그것도 몬스터의 수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에테르를 이용해서 끝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몬스터들이었다.
그럼에도 폴리몬의 수장은 자신이 만들어낸 몬스터에 대해서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폴리몬의 수장은 자신이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조립식 완구를 만드는 것과 비 슷하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애착이 없었다.
폴리몬의 수장이 애착을 느끼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같은 폴리몬들 뿐이었다.
폴리몬은 오직 어머니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자신과 함께 태어난 형제였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자신에게 힘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폴리몬의 수장은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땅을 폴리몬들의 것으로 하고, 대신에 몬스터들을 인간들에게 내어 주며 공생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머니인 행성 코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인간들은 조금씩 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기 전자 제품의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가능해지고, 정보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몬스터는 아메리카 대륙에만 존재하며, 그 외의 곳에는 없었다.
지구 대기의 에테르는 완전히 정화되었고, 앞으로도 디퀴피드 왕검에 의해서 정화될 것이다.
인류에게 필요한 에테르 코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으로 수급을 할 수 있다.
폴리몬들의 수장은 인간들이 폴리몬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은 아메리카 대륙의 허락된 장소에서 몬스터 사냥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
디퀴피드 왕검은 한반도의 서울시를 특별 구역으로 지정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왕검은 자신들 디퀴피드에 대한 인류의 간섭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도 대기 중의 에테르를 정화하는 일은 계속 될 것이지만, 인간들은 디퀴피드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예외는 오직 디퀴피드를 건설한 프랜드에만 적용될 뿐이다.
대충 이런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 후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과거의 국가, 혹은 민족 단위로 뭉쳐서 하나의 세력이 되려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마을이나 도시 단위의 공동체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집시처럼 자유롭게 떠돌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고, 무정부주의를 내세우며 간섭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또 다시 과거 모습으로의 회귀였다.
나라와 민족으로 결집된 힘은 개인이나 소수의 무리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나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최초 이면 공간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만 인구의 수가 그 때의 20%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한반도의 경우에는 더 심각해서 전체 인구가 1천만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새로 건국된 어떤 나라도 한반도에 대해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디퀴피드들의 수장인 왕검이 있고, 왕검의 짝인 곰녀가 있는 탓이다.
속으로야 왕검이 하필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겉으론 간이라도 빼 줄 듯이 호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감도 마땅한 대상이 없었다.
한반도는 왕검의 땅이어서 따로 정치 세력이 나타나지 못했다. 한반도에선 여전히 마을과 도시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간혹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그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큰 권력을 지닌다고 해도, 왕검을 넘어설 수가 없는데, 왕검은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한반도가 하나로 묶인다면 그것은 반드시 세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믿는 왕검이었다.
당연히 그런 뜻이 은연중에 한반도 전체에 퍼져 있어서 다른 세력들이 득세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왕검은 세진 일행이 이면 공간에서 지구의 의지와 행성 코어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진 일행이 돌아올 것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디퀴피드에게 시간은 넘치는 자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