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93화 (293/298)
  • < -- 사면초가에 몰린 행성 코어 -- >

    이면 공간의 싸움은 곧 행성 코어와 지구의 의지 사이의 힘의 우열을 나타낸다.

    행성 코어가 더 많은 기운을 빼앗아서 에테르로 만들어 내면, 이면 공간의 마가스 세력의 커지고, 지구의 의지가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면 이면 공간의 인간 세력이 커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구의 의지가 아무리 많은 기운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행성 코어가 일정량의 에테르를 만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구의 의지가 할 수 있는 공격 방법은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서 에테르를 희석 시키거나 혹은 행성 코어가 만들어 낸 여러 이면 공간과 몬스터들이 에테르를 더 많이 소비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면 공간 안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격 수단이 생겼다.

    새로운 수련법으로 인간들의 실력이 월등하게 발전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으로 에테르를 지구 본래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지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지구의 의지가 그 방법에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행성 코어가 결사적으로 지구의 의지와 지구 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면 공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면 공간은 행성 코어나 지구의 의지가 함께 만들어 놓은 공간. 당연히 그 공간에 대한 지배력은 동등했다. 때문에 지구의 의지는 에테르를 본래의 기운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것 하나로 사실상 행성 코어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인간들의 힘으로 에테르를 정화하는 것은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아직 그 수도 많지 않고, 또 그 효과도 미비했다. 하지만 지구의 의지는 그런 정화 능력을 새롭게 변형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에게 그렇게 변형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지구의 의지가 선택한 그는 현실 지구 전체를 아우르며 에테르 정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 일을 사양하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자 이면 공간이 아닌 지구 자체에서 에테르 밀도가 급속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이면 공간에서 마가스의 세력의 약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세진이 동쪽 전장으로 향하는 몇 달 사이에 일이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때문에 세진은 전장에 도착해서야 이면 공간에서 마가스의 세력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단지 몇 달 사이에 이면 공간에서 마가스의 세력이 급격하게 꺾이고 새로운 수련법을 익힌 인간들과 프락칸 깝딴들이 엄청난 기세로 전장을 유린했다. 결국 세진이 동부 전장에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동서남북 네 방향의 마가스 수장들이 모습을 감춘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지휘부를 잃고 이리저리 흩어진 마가스들 뿐이었다.

    "결국 또 도망을 간 거야?"

    자넷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땅의 어머니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네 방향의 마가스 수장들이 모습을 감췄다는 것은 전쟁이 하늘 어머니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마가스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것들의 구심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를 이야기했고, 당장 축제라도 벌일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진과 자넷은 이번에도 행성 코어를 잡지 못한 것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마도 하늘 어머니가 있는 곳에 땅의 어머니도 있겠지. 사실 그런 존재들이 숨고자 한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찾겠어?"

    세진이 덤덤한 음성을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행성 코어라는 것은 거의 신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세진은 그런 것을 상대할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초월적인 존재는 초월적인 존재들끼리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거야?"

    자넷이 세진에게 물었다.

    "일단 이면 공간 밖으로 나가야지. 여긴 우리가 더 할 일은 없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직 여기도 완전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잖아. 혹시라도 전세가 뒤집어 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넷은 밖으로 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 입장이었다.

    이전에는 밖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빨리 나갔으면 했지만, 지금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때에는 도리어 이곳에서 일이 마무리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장 나가겠다는 것은 아니야. 어느 정도 결착이 지어질 때까지는 지켜봐야지."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그래도 에테르 코어는 어떻게든 마련을 해 둬야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마가스들이 모두 잡혀 버리고, 그걸 정화해 버리면 결국 밖으로 나갈 천공기를 작동시킬 에테르 코어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에요."

    그 때, 어리는 에테르 코어를 얻어 둬야 한다고 말하며 끼어들었다.

    "음, 그 문제는 내가 전장의 지휘부에 이야기를 해야지.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변하고 있어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이에요. 여기도 나쁘지 않지만 어리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에요. 지금은 꼭 두 집 살림을 하는 것 같은 것이에요. 테멜 안쪽을 관리하면서 이 몸으로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 그런 것이에요."

    어리는 꼬마 여자 아이의 모습을 한 제 몸의 팔 다리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어리는 자신의 몸을 좋아했다.

    실제 인간과 같은 모든 생체 활동이 가능한 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진이나 자넷과 같은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능력의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불편하고 갑갑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면 공간을 벗어나면 아마도 모든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꼭 부탁을 해 놓을 테니까."

    세진은 그런 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우리 어리가 열심히 수련을 해서 어리 테멜을 이곳에서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때, 자넷이 어리에게 심술궂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리를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리에겐 무리인 것이에요. 여전히 그건 안 되는 것이에요. 이걸 보면 어리를 이렇게 만든 힘은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인 것이에요. 그게 하늘 어머니인지 땅의 어머니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무시무시한 것이에요."

    어리는 적어도 어리 테멜 안에서는 무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공간과 그 공간 안에 들어 있는 많은 테멜들은 모두가 어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곳 이면 공간에 떨어지면서 단 하나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이 어리가 현실에 관여할 수 있는 힘을 거의 완벽하게 빼앗아 버렸다.

    즉, 어리 테멜에서 외부로 입구를 여는 것을 금지당하는 순간, 어리의 모든 힘은 오직 어리 테멜 안쪽에서만 사용 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데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저 테멜의 입구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이잖아."

    "하긴 그렇기는 하지. 따로 어리의 테멜 내부에 간섭하는 것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어리는 절대 어리에게 간섭하게 두지 않을 것이에요. 어리는 결사적으로 항전을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승리할 것이에요. 어리의 몸은 어리가 지키는 것이에요."

    "뭐 마지막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 어쩌면 어리 테멜 안에 있는 어리는 행성 코어나 그에 준하는 존재와도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리 테멜은 곧 어리 그 차제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뭐 세진은 어리와 정신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나보단 더 잘 알겠지."

    "어리는 행성 코어도 무섭지 않은 것이에요. 헹!"

    "그래. 그래. 그럼 그렇지."

    세진은 어리의 호기로운 허세를 그냥 받아들여 주기로 한다. 사실 행성 코어에 비하면 어리는 아직 많이 모자랐다.

    테멜 코어로 친다면 이제 지역 코어 정도에 해당하는 어리다.

    물론 일반적인 지역 코어와는 달리 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라서 의미가 전혀 다르지만 능력을 놓고 보면 대륙 코어에도 비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세진이 어리를 두둔하는 것은 실제로 테멜 입구를 닫아걸고 지키자고 하면 어리 역시 하나의 세상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롯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다곤 하지만 어리는 실제로 어리 테멜과 그 하위 부속 테멜들을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테멜 안에 있는 많은 인류들을 대상으로 신으로 추앙받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약간의 우민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로 도착한 동부 전장에서 한동안 지낼 집을 짓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어리가 부지런히 만들어 내는 건축 자재들을 쌓고 끼우고 조이는 일이 세진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행성 코어는 지구의 의지와 오랜만에 맞대면을 하고 있었다.

    - 변수가 생겼고, 나는 그 변수를 이기지 못하였군.

    행성 코어는 지구의 의지에게 자신의 패배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소멸로 이어질 것임을 알기에 쉽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가? 땅의 어머니여?

    -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는 땅의 어머니가 아니다.

    - 나는 지구의 의지다. 그런데 나와 대적해 온 너는 무엇이냐? 지구의 의지는 언젠가 지구에 나타나서 조금씩 세력을 키워서 결국 지구 자체에게 위협이 되었던 존재에게 물었다.

    초기에 지구의 의지는 에테르라는 새로운 기운에 대해서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지구의 의지가 만드는 기운의 변형에 불과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운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만들어지면서 지구의 의지는 그것, 에테르와 에테르를 만드는 코어가 일종의 기생 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숙주를 죽이고 말, 그런 기생 생물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의지는 원래부터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돕는 의지.

    무언가를 죽이고 소멸시키는 것은 지구의 의지가 가진 힘이 아니었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기생 코어 역시 그런 지구의 의지에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태어나게 되지 않았던가.

    스스로 부족한 것이 많았던 코어가 스스로 생각하고 또 판단하는 오롯한 존재가 된 것도 바로 지구의 의지가 지닌 그 힘 때문이었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돕는 힘.

    행성 코어는 지구의 의지가 '너는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를 지구의 의지에게 말했다.

    - 나는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의 근원이다.

    -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구의 의지가 다시 물었다.

    - 내게서 난 것들의 번성. 행성 코어는 지구의 의지의 물음에 답하면서 점점 더 확고한 의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 너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지구의 의지는 행성 코어가 이미 자신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인정하고 있 었다.

    이번에도 변수가 없었다면 행성 코어가 승리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나는 너에게 지고 말았다. 이제 나는 소멸하고 내 자식들은 사라질 것이다.

    행성 코어는 에테르가 점점 희박해지는 지구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에테르가 사라지면 결국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도 사라지게 된다. - 그것은 네가 자초한 것이다. 나는 네게 기회를 주었다. 이면 공간의 마가스가 그 예다.

    - 내 자식들을 변종으로 만든 것이 기회란 말이냐? 행성 코어는 화가 났다.

    순수하게 에테르로만 이루어진 생명, 그것이 행성 코어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이면 공간에서 태어나는 것들은 지구의 의지가 개입해서 약간씩 다른 것들이 끼어들었다. 심지어는 이면 공간에서 태어난 폴리몬들 조차도 그랬다.

    그 때문에 폴리몬을 포함한 이면 공간의 마가스들은 온전하게 행성 코어의 자식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 그럼 그 생명들이 내게서 난 것이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너와 내가 함께 탄생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공존을 모색했다. 그럼에도 너는 독존을 고집했지.

    행성 코어는 지구의 의지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 결국 소멸을 택할 텐가? 공존의 의지는 없는가?

    지구의 의지가 물었다.

    - 마지막까지 나는 내 길을 갈 것이다. 행성 코어는 그렇게 선택했다. 그리고 지구의 의지는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