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92화 (292/298)

< -- 전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다 -- >

"여기는 정말 좋은 것이에요.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 같은 것이에요."

어리는 전장의 환경을 무척 좋아했다.

이곳에선 능력의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수련 효과는 몇 배는 좋게 나타난다.

전장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수련장소로 사용하는 것이 원래 용도가 아닐까 싶은 곳이다.

어리는 이곳에서의 수련으로 벌써 테멜의 크기를 노란색 등급의 테멜 정도로 키워 놓았다.

그리고 테멜이 커진 것과 비례해서 물질의 합성 규모도 커졌다.

이제는 몇 가지의 물건을 한꺼번에 합성하는 복잡한 작업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고,  물건의 크기도 처음 손바닥 크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보시는 것이에요. 어리는 이제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에요."

허공에서 번쩍 거리며 뭔가가 돌아다닌다.

그것은 테멜의 입구를 이용한 순간이동이다.

이전에 어리가 어리 테멜을 이용해서 순간이동을 하던 것을 응용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 이면 공간에서 사용하는 어리의 테멜은 무생물만 수납이 가능해서 생명체의 공간 이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예전 능력을 찾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더구나 스스로 수련을 통해서 하나씩 성장하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된 어리는 한층 수련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이젠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세진이 수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수련장 바닥에는 세진과 어리가 힘을 모아서 심어 둔 마법진이 있었다. 그 때문에 수련장은 전장에서도 또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었고, 수련의 효과도 증가했다.

"그래서 다른 전장으로 가는 교관들을 따라 가려고?"

자넷이 세진의 생각을 짐작하고 물었다.

북쪽 전장에서 크게 우세를 점하게 된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이 세진이 알려 준 수련법들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교관들을 선발해서 다른 전장으로 보내기로 했다.

세진은 그 교관들을 따라서 또 다른 전장으로 가 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할 일이 없으니까 다른 곳에 가서 도움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야 그렇지만, 이제 우리도 이면 공간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자넷이 세진에게 물었다.

"으음. 가능성이야 있지. 에테르 코어는 부탁만 하면 얻을 수 있을 거야. 요즘은 종종 등급이 높은 마가스들이 잡히고 있으니까 말이야."

세진은 이면 공간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들어올 때에도 가능했는데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진은 아직 이면 공간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하늘 어머니가 땅의 어머니를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자넷도 알잖아. 땅의 어머니는 행성 코어가 분명해. 그리고 하늘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 몰라도 지구 본연의 기운을 가지고 행성 코어와 맞서는 존재야. 뭐 따로 이름을 붙이긴 어렵지만 지구 그 자체라고 봐도 될 것 같아."

세진은 하늘 어머니의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해 있었따.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당연히 이곳에서의 싸움 결과에 따라서 지구 전체의 운명이 결정되는 거라고 봐야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서 길고 긴 시간동안 행성 코어와 지구가 싸워 왔다고 보면, 이번 사태로 행성 코어가 궁지에 몰렸잖아. 이 때 몰아붙여서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지."

"굉장히 오래 걸릴 텐데?"

"어차피 지구 문제는 밖에서 해결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여기서 결착을 봐야지."

"이면 공간 밖의 상황은 걱정이 안 되나 봐?"

자넷은 뻔히 알면서 세진의 속을 태웠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지. 결국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서 안에 들어 온 건데 별다른 수확도 없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

사실상 하늘 어머니와 땅의 어머니 사이의 전력 격차를 크게 벌려 놓았으면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세진은 실제로 자신이 벌인 일이 어느 정도로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가스를 밀어 붙여서 조금 승기를 잡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아직도 마가스와 인간들은 끝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고, 전장을 조금 밀고 올라간 이외의 이득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겨우 몇 키로 미터 정도 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린 것 말로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총 동원령 이후에 죽어 나가는 인간의 수가 수십 배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끝도 없이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고, 마가스도 밀려오는 상황이다.

세진이 보기엔 싸움만 격화되고 결국 어느 쪽도 우위에 서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지금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인 인간이 북부 전장을 완벽하게 차지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세진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길고 긴 싸움에서 이토록 큰 변화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솔직히 요즘은 전장 밖으로 나가는 것도 겁이 날 정도야."

자넷이 한풀 기운이 꺾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장의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서 싸움이 벌어지는 쪽을 보면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진다.

차라리 마가스의 사체는 정리가 쉽다.

프락칸의 능력을 지닌 여인들이 마가스의 사체를 정화해서 인간들이 이용 가능한 것만 남기고 없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체는 그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태우려고 하는데,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한 곳에 단을 세우고 쌓아둔다.

매장 문화가 없는 것이다.

하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니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렇다 보니 태우지 못한 사체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그 무더기는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렇게 시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아야 하니 자넷도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걸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연구를 하고 있어. 아무튼 여기 사람들은 너무 고지식해. 에테르 코어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펄쩍 뛰고 있으니 말이야."

세진은 한숨을 쉬었다.

에테르 코어를 이용해서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들이 이미 많이 개발되어 있다.

하지만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은 그 에테르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좀처럼 에테르 코어를 이용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에테르 코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마법진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거 말이야. 마법진."

"응? 마법진이 왜?"

"그거 원래부터 에테르를 이용하는 건 아니었잖아."

자넷이 마법진의 원래 에너지원에 대해서 물었다.

"맞아. 원래는 마나를 쓴다고 했지."

"그 마나라는 거, 실제론 행성 본연의 에너지와 다른 거야?"

"그건..."

세진은 설명을 하기 위해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좀, 달라. 행성들이 가진 에너지의 근본은 거의 같은데, 그것이 또 행성의 환경에 따라서 갈라지고 나눠지고 합쳐지고 뭐 그렇게 되다보니까 행성들마다 다들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되지. 그런 중에서 마법진은 그 마법진이 만들어진 행성의 기운에 특화되어 있는 거야."

"그 행성의 기운?"

"정확하게는 그 행성의 기운 중에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지. 그 마법진이 들어 있는 석판에 따르면 그렇게 되어 있어."

"그게 지구에는 없는 거야?"

"지구의 기(氣)가 비슷하기는 하지.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야. 그래서 억지로 쓰자면 못 쓰진 않지만 효과가 굉장히 떨어지는 뭐 그런 거지."

"그렇다면 여기서도 쓰긴 쓸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 하지만 좀 더 나은..."

"일단 쓸 수 있는 거면 쓰고 보자. 그 후에 개량을 해도 하면 되잖아."

자넷이 세진의 말을 끊었다.

늘어만 가는 시체 더미에 학을 떼는 자넷이다.

"조금만 더 하면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알았어. 일단 지휘부에 이야긴 해 볼게."

세진은 격한 자넷의 태도에 한 발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인 것 같지만, 그렇게 해서 자넷의 마음이 좀 편해 질 수 있다면, 못 들어 줄 바람도 아니다 싶은 것이다.

남쪽과 서쪽으로 일단의 전사들과 여자들이 움직였다.

세진식의 수련법과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을 배운 이들로, 남쪽과 서쪽 전장에서 교관 역할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세진은 동쪽 전장으로 향하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마차에 탄, 자넷과 어리를 위해서 이번에는 마부 노릇을 자청한 세진이다.

북부 전장으로 함께 왔던 초원 부족의 어린 전사들은 대부분 세진식 수련법을 가르치기 위한 교관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북부 전장의 길이는 수 백 킬로미터에 이른다. 그곳에 일정한 간격마다 수련관을 세우고 전사들을 수련시킨다. 거기다가 여자들은 따로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을 배우도록 한다.

북부지역 전체가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라서 전장으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마치 강둑을 따라서 가옥들이 늘어서는 것처럼 인간들의 마을이 열을 지어서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숲과 들을 개척해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또 전사들을 키워서 전장 너머의 북쪽 싸움터로 보내는 것이다.

세진은 그렇게 형성된 인간들의 터전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 중에는 멀리 초원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주한 초원 부족의 집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이전까지 살아오던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싸움에 동원된 이들인 것이다.

'행성 코어를 제압하지 않는 이상, 저 싸움은 멈추지 않겠지.'

세진은 말의 고삐를 슬쩍 흔들어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동부 전장에 간다고 해서 특별히 세진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부 전선에선 애초에 전선으로 나가서 마가스를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세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휘부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가르칠 것을 다 가르쳐 놓은 세진으로선 그런 배려가 고맙기도 하지만, 실제로 할 일이 없이 개인 수련 시간만 늘어나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 다른 전장으로 떠나는 교관들 틈에 끼어서 함께 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당장 할 일을 찾지 못하는 답답함이 세진을 동부 전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검은 연기가 덜 피어오르니 그나마 숨을 좀 쉴 것 같아."

자넷이 움직이는 마차의 문을 열고 곡예를 하듯이 앞쪽 마부석까지 와서 앉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화장으로 생기는 검은 연기가 요즘은 덜 피어 오른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들이 덜 죽는 것은 아니다.

세진이 전장을 떠나기 전에 완성한 마법진 덕분이다.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을 순식간에 잿가루로 만드는 그 마법진은 프락칸의 도움이 있어야 작동을 한다.

에테르 코어를 정화하면 그 정화된 기운으로 작동하는 마법진인 것이다.

에테르가 아니라 에테르가 정화된 기운을 사용하니 이곳의 인간들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죽은 전사들의 주검을 화장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에테르 코어의 정화 의식과 함께 화장이 이루어지니 일을 두 번 하지 않아서 좋게 되기도 했다.

이번에 다른 전장으로 떠난 교관들 편에는 그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는 기술자들도 함께했다. 비록 어리가 만드는 것 만큼의 효과는 없겠지만 거의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쪽 전장에는 세진과 자넷, 어리가 가서 보급을 하기로 했다.

"하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자넷이 이면 공간의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여느 지구의 하늘과 다름이 없는 하늘이다.

그러면서도 지구와는 다른 공간이라는 것이 새삼 놀랍다.

"때가 되면 만날 수 있겠지. 이번에 북부 지역에 총동원령을 내린 것도 하늘 어머니라고 했으니까. 뭐 우리는 듣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들 하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니 맞겠지."

"우린 이방인이라고 무시한 걸까?"

"뭐 우리에겐 하늘 어머니의 목소리를 수신할 능력이 없는 모양이지."

"나하고 어리는 그렇다고 해도, 세진은 지구에서 태어난 지구인인잖아."

"이면 공간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

"흐응, 그렇구나. 하긴."

자넷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이 나아가는 지평선으로 시선을 던진다.

"또 먼 길을 가야 되겠네."

"그렇지."

세진은 자넷, 어리와 함께 그렇게 동부 전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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