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89화 (289/298)

< -- 자히알락을 떠나 전장으로 향하다 -- >

분명히 어디선가 마가스를 지휘하는 폴리몬이 있을 것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세진이지만 싸움이 끝날 때까지 폴리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른 마리의 중급 마가스에 수 백 마리의 하급 마가스의 사체만 들판에 가득 남았다.

"아, 어리가 힘을 써야 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양이 무징무징 많은 것이에요."

어리는 전사들이 끌어 모으는 사체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초원 부족의 여자들은 전장에 오지 않았다.

당연히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을 익힌 이들이 있을 수가 없다. 그나마 어리가 유일하게 프락칸의 능력과 깝딴의 능력을 동시에 익혀냈다.

어리가 의체인 몸을 정교하게 컨트롤 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어리가 엄청난 마가스의 사체들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홀락치는 그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마가스의 사체들이 정리가 되면서 에테르가 아닌 부분만 남는다.

며칠 동안 쌓아둬야만 이루어지는 현상인데 순식간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 저건 땅의 어머니 기운을 하늘 어머니의 기운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오?"

하지만 홀락치의 놀람은 에테르가 지구 본연의 기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정점을 찍었다.

"이미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초원 부족의 여자들에게는 또 다른 것을 가르쳤다고 말입니다."

"그럼 그 또 다른 것이 바로 저거란 말이오? 어떻게 이런 일이!"

홀락치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운을 바꾸는 것은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점점 땅의 어머니 세력이 강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 기운의 양 때문이란 것을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이 이면 공간에서 하늘 어머니와 땅의 어머니로 불리는 지구의 의지와 행성 코어의 세력 비율은 곧 기운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도 했다.

행성 코어의 에테르가 지구 본연의 기운을 억누르기 시작하면 당연하게 이면 공간에서도 마가스의 우세가 되는 것이다.

사실 벌써부터 이면 공간에서 조금씩 지구의 의지가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차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급격하게 그 틈이 커지게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진 일행이 이면 공간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일.

벌써부터 초원 부족에게 전해진 수련법과 프칵칸, 깝딴의 능력은 이면 공간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힘이 드는 것이에요. 어리는 정말 힘드는 것이에요."

어리는 아직도 많이 남은 마가스의 사체를 바라보며 칭얼거렸다.

그려면서도 정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어리는 정화 작업 자체가 좋은 수련이 되는 것이어서 하며 할수록 능력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 엄살을 부리면서도 실제로는 어리도 해야 할 일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어리의 능력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면 한 번에 합성할 수 있는 물건의 크기나 양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면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뿐인 테멜의 규모도 커진다.

한마디로 어리가 의체를 잘 키우면 곧바로 합성 능력과 테멜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쉴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 알았다. 언니가 저녁은 맛나게 해 줄게."

어리를 달래는 것은 자넷이다.

어리는 원래부터도 식탐이 심했다.

물론 먹을 수 있는 것이 고작 에테르 밖에 없어서 거기에 집착을 보인 면도 있었지만.

그런데 이번에 이면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온전하게 의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전과는 또 다르게 직접 먹는 음식에도 식탐을 보였다.

자넷은 그런 어리의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음, 어리는 저기 저걸로 오늘 맛난 것을 만들어 먹고 싶은 것이에요. 언니."

어리는 조금 전에 정화가 끝나고 나서 싱싱한 살코기와 뼈, 뿔, 가죽만 남아 있는 사슴 계열의 마가스, 아니 마가스였던 고깃덩어리를 가리켰다.

자넷도 그런 종류의 마가스가 고기맛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어리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조금만 더 수고하자."

"어리는 수고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언니도 수고를 하는 것이에요. 맛난 고기구이를 만드는 것이에요. 찜은 싫은 것이에요."

"휴우, 알았다. 이것아. 어째 점점 까탈스러워진다니."

"원래 시누이는 미운 법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호호홋."

자넷과 어리가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정화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에 전사들은 전투 이후의 수습에 힘쓰고 있었다.

어차피 곧바로 전장으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전장에 배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큰 정공이랄 수 있는 승전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 승전을 증명할 마가스의 사체와 코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리를 하려면 오늘은 더 이상 이동이 어렵겠소."

홀락치는 그렇게 말하고 이른 시간에 이동을 멈추기로 결정을 내렸다.

인솔자는 홀락치이니 그의 계획에 따라서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홀락치는 힘들게 싸운 어린 전사들에게 선심을 베푼 것이다.

다음날 오전이 다 지나서야 전장 정리가 마무리 되었다.

사실 사망자가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큰 부상자도 몇이나 생긴 싸움이었다.

아무리 일방적인 승리라도 희생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마가스의 사체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하늘 어머니의 기운으로 되돌리는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재촉을 할까.

홀락치는 어리가 일을 마무리하고, 전사들의 치료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어리와 자넷이 타고 있던 마차 뒤에 새로 수레를 만들어서 부상자들을 태운  후에야 홀락치는 다시 전장으로 길을 재촉했다.

전장은 겨우 이틀도 걸리지 않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 언덕에 올라서서 놀라지 않기를 바라겠소."

홀락치는 낮은 언덕을 앞에 두고 세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진은 언덕 너머의 광경을 어느 정도 눈에 그리듯이 떠올리고 있었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는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언덕 사이의 거리가 넓어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로 끝도 없는 내리막이 있다.

그 내리막 끝에 작은 개천이 흐르고 거기서부터 다시 경사가 생겨서 위로 올라간다.

그렇게 마주보는 경사면에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과 땅 어머니의 자식들이 서로 대립을 하고 있다.

그것이 전장의 모습인 것이다. 싸움은 개천을 사이에두고 끝도 없이 벌어진다.

언덕 위에 올라서서 시야가 트인 세진 일행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 언덕을 실감했다.

"이렇게 올라서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오. 거기다가 다시 이 자리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오. 이제 전장에 합류하면 그 후로는 전장의 지휘체계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오."

"그 지휘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요?"

세진의 곁에 다가와 있던 자넷이 물었다.

홀락치는 뜻밖에도 자넷이 당당하게 질문을 던지자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턴 나도 싸워야 해요. 그러니 당당한 전사의 신분으로 당연히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죠. 그래서 대답은요? 믿을 수 있나요? 무능하지 않은가요? 자기 보신에 연연하거나 공을 탐하지는 않나요?"

자넷의 질문은 차갑고 날카롭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우리의 승리는 하늘 어머니께 영광스러운 일일 뿐, 개인의 영달과는 상관이 없소. 우리는 어차피 전장에서 싸우다가 전장에 묻힐 어머니의 자식들인 것이오. 그런 우리에게 무슨 욕심이 있겠소?"

"글쎄, 그거야 모르죠. 사람은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마련이거든요. 어렵게는 자아 실현의 욕구라고 하던가요? 욕심 없는 인간이 과연 있기는 할까 모르겠네요."

자넷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어리가 있는 마차 쪽으로 가버렸다.

"크음. 우리 하늘 어머니의 전사들을 무시하는 말이오. 방금 그대의 아내가 한 말은."

초원 부족 출신이라서 여자에게 화를 내는 것을 치욕으로 아는 홀락치는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세진에게 항의 아닌 하의를 했다.

"내리막길로만 근 1키로미터, 반대쪽으로 오르막길로만 또 그 정도. 한마디로 반대쪽을 공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곳이군요."

세진은 슬쩍 말을 돌렸다. 자넷의 행동을 이해하니 홀락치에게 사과를 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홀락치에게 자넷이 뭘 잘못했냐고 따지기도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려는 것이다.

홀락치도 그런 세진의 의도를 읽었는지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일단은 참기로 한 모양이었다.

"지형이 저렇지 않았다면 어느 쪽이건 승리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몇 번은 있었다고 들었소. 하지만 결국 저 지형 때문에 우리가 밀려날 위기에서도 간신히 버틸 수 있었고, 또 저 지형 때문에 우리가 승리를 어머니께 바칠 기회를 다 잡았다가 놓치기도 했다고 하였소."

"공격하는 쪽이 불리하게 되어 있긴 하군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능력이 뛰어난 몬스터, 아니 마가스들이 나오면 이 정도 거리는 금방 뛰어 넘을 정도는 될 텐데요?"

세진은 그것이 이상했다.5등급 몬스터만 되어도 실제로 저런 정도의 거리는 크게 부담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스터 경지에 이르기만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진은 그 정도의 능력은 하늘 어머니의 진영에도 적잖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싸움이 조금은 더 넓은 지역에서 격렬하게 지저분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하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오. 이럇."

홀락치가 세진에게 묘하게 불편한 웃음을 지어주곤 천천히 말을 몰아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삐친 건가?"

언제 왔는지 자넷이 다가와서 홀락치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말에 올라탄 홀락치의 무게 균형이 살짝 흔들린 것을 세진은 보았다.

"자, 그럼 우리고 가 볼까? 모두 조심해서 따라와라."

세진은 제자이자 부하들인 어린 전사들의 선두에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윽, 이건 뭐야?"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이상을 느꼈다.

"이건?"

세진은 그것이 묘하게도 몸 안에 들어 있는 기운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나 이게 뭐야? 결계 같은 건가? 평소보다 능력이 반의 반 정도 밖에는 안 남은 것 같은데?"

"이래서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실력이 있는 이들도 쉽게 나서질 못하는 모양이군."

"그냥 훌쩍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게 되겠어? 아마 저 사이의 허공에도 이런 준비가 있을 거야. 까딱하다간 그냥 추락하는 꼴불견을 보이게 되겠지.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이야."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에 홀락치가 데리고 온 신입 전사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의 시선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세진은 초원의 전사들과 함께 홀락치가 안내하는 지휘본부로 향했다.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은 매 해, 한 번씩 전사를 뽑아서 전장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것은 각 도시와 마을, 부족들의 사정에 따라서 각지 정해진 날짜가 다르다.

그러니 이즈음 초원 부족의 전사들이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지휘관들은 없었다.

홀락치가 인솔자로 출발을 했을 때부터 초원 부족의 전사들이 오면 어디에 배치를 할 것인지 이미 계획까지 잡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진 일행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안쪽에서 홀락치의 보고를 들은 지휘관들은 쉽사리 초원 부족 전사들의 배치를 결정하지 못했다.

교관으로서의 세진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함께 곁다리로 따라온 세진의 여동생, 어리의 능력은 그야말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지휘부에선 일단 세진과 초원 부족 전사들을 본부의 임시 거처에 머물게 하고는  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그리고 홀락치는 다시 초원 부족으로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전사들이 아니라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을 배운 여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물론 홀락치는 그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초원에서 사는 부족들이 절대로 다른 곳으로 내어주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고 초원 부족의 족장들을 모아서 의자 회의라도 열어서 전장 지휘부의 결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세진이 전장에서 기대볼 언덕으로 만들어 놓았던 홀락치는 다시 전장을 떠났고, 세진이 전장에 도착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세진과 그 일행 전체는 후방 지원 부대라는 이름으로 전사들의 재교육을 담당하는 신설 기관에 배치가 되었다.

그렇게 세진 일행의 전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