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마을 자히알락에 들어서다 -- >
세진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자히알락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기엔 하급의 마가스 몇 마리도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우린 전장으로 가야 할 거야. 하지만 서둘러서 움직이다간 큰일을 당할 수도 있어. 그러니 일단 마스터 정도까지는 능력을 회복하고 전장으로 가는 것으로 하자."
세진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자히알락에도 어느 정도 정착을 했다. 그러니 마을에서 쫓겨날 염려는 없는 상황이었다.
술법사라고 해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마을에 꽤나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세진의 가족이 마을에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 자히알락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니 마을에서 수련을 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세진."
자넷이 세진을 불렀다.
"우리가 라훌이나 로페소에테에서 했던 일 기억나?"
"일이라니? 설마 우리가 익힌 것을 사람들에게 풀어서 가르치자는 소리야?"
"여기 사람들도 특별한 무언가를 익히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익히고 있는 것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세진이 새로 만든 수련법을 가르치는 것은 어때?"
자넷의 제안은 의미가 있었다.
세진의 수련법은 초기 지하 창고라고 하는 곳의 석판에서 얻은 오러 로드 수련법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라훌 행성에서 몇 가지 수련 방법을 얻었고, 이후에는 프락칸이나 깝 딴의 수련법에다가 획기적으로는 에헤로의 석판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련 방법을 얻어서 결합을 시켰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행성들을 여행하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새로운 방법들을 얻어 탐구하면서 조금씩 개량한 것이 지금 세진의 수련법인 것이다.
거기에 디버프를 비롯한 몇 가지의 정신 능력들을 별개로 취급되는 것이지만 그 역시 오러 로드 수련의 경지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디버프의 능력도 커지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유용하게 써 왔던 능력이었다.
"그리고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은 이곳 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해? 어리도 수련을 하면서 프락칸과 깝딴의 능력을 익히고 있는 중이잖아."
"아주 몽땅 털어서 내어 주자는 이야기야?"
"어차피 이곳은 이면 공간이잖아. 그리고 몬스터와 싸우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뭘 가리고 숨기려고? 왜? 이곳 사람들과 언젠가는 적이 될 것 같은 생각이라도 들어?"
자넷의 말에 세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곳 사람들과 적으로 만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물론 인간이란 위기가 지나면 또 다시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들어서 싸우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일을 마치고 나면 돌아간 세진 일행인 것이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일단 자넷과 어리는 여자들을 상대로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 프락칸과 깝딴의 비기를 배우지 못하는 여자들에게는 오러 로드를 가르치거나 정신 능력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울렉치를 꼬드겨서 오러 로드 수련법을 중심으로 가르쳐 볼 테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어리는 좋은 것이에요. 요즈음 어리는 많은 추종자가 생긴 것이에요."
어리는 특히 기뻐했다.
요즈음 마을에서 열살 근방의 아이들은 모두 어리의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남자 아이들고 그랬는데, 말을 타고 나갔다가도 시간만 나면 쪼르르 달려와서 어리에게 함께 말을 타자고 조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어리는 자히알락의 떠오르는 우상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런 추종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멋진 기술들을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자히알락 마을에 새로운 수련법에 대한 태풍이 불었다.
처음 얼마간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들 그들 스스로 수련하는 방법이 있었고, 그것들 통해서 나름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수련법을 세진이 원하면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코웃음만 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몇 달이 지나기 전에 확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진과 자넷, 어리의 성취지만 그건 그들 가족이 이미 술법사 가족이란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어리가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몇 명이 문제를 일으켰다.
간혹 아비가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험한 세상에서 아비가 없는 경우는 흔하다.
그렇게 남자들이 죽어가는 경우가 많은 곳이 이곳이다.
그리고 아비가 없으면 제대로 된 무엇을 배우기가 어렵다.
여자는 어미나 마을 아낙에게 배우면 되지만 남자 아이는 아비나 삼촌, 혹은 대부(代父)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간혹 부모가 모두 없는 아이들도 있다.
남자는 나가서 싸우다 죽고, 엄마는 약탈혼을 당해서 다른 부족으로 끌려간 경우다.
사실 약탈혼의 대상에서 아이가 있는 유부녀는 빠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약탈이 괜히 약탈이 아닌 것이다. 약탈혼에서는 간혹 예기치 않게 집 안에 숨어 있던 과부가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집 안에 숨어 있는 과부는 대부분 아이들이 있는 여자들이다.
그 여자들은 이후에 아이를 낳으면 다시 친정 부족을 찾아와서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남겨진 아이를 마을에서 공동 육아를 한다.
하지만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남의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같을 수가 없다.
당연히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그런 아이들이 어리가 가르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세상을 먼저 안다.
그래서 훨씬 더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어리의 추종자들 중에서 또래의 아이들을 성큼 성큼 추월하는 아이들이 나왔다. 겨우 몇 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그 즈음에 여자들이 집안의 가장들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했다.
여자들이 자넷에게서 새로운 것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면 마가스의 사체를 쉽게 정화할 수 있다고 했다.
마가스의 사체는 대부분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저장을 해 두고, 시간이 흐른 뒤에 에테르가 모두 기화하고 나면 그것의 고기와 뼈 가죽을 이용한다.
그나마 마가스의 고기와 뼈, 가죽이 쉽게 상하지 않고 또 질기고 튼튼했기 때문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모두 썩어서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마을 아낙들이 한 순간으로 줄어버린 것이다.
정화를 하게 되면 에테르만 사라지고 마가스를 이루고 있는 나머지 부분이 남는다. 당연히 고기와 가죽, 뼈의 질이 좋다.
고기가 특히 맛이 있다.
그러니 남자들이 혹하지 않을 수가 없고, 또 배우지 말라고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런 기술도 배울 수 있는 여자가 있고 아닌 여자가 있어서 정화 하는 것을 못 배운 여자들은 다른 것을 배웠다는데 힘이 세지고 민첩해지고 몸에 탄력이 생긴다.
딱 봐도 점점 예뻐지고 젊어지는 모습이다.
당연히 남자들은 열광한다.
원래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수련을 하긴 한다. 하지만 시집을 가게 되면 남의 가족이 되기 때문에 비기를 가르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런데 집안의 비기 따위는 가볍게 씹을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자히알락의 남자들이 슬슬 세진의 곁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세진은 모르는 척 하면 그들에게 세진류의 오러 수련법을 가르쳤다.1년에 한 번, 초원의 전사들이 모두 모여서 하늘 어머니의 전사를 뽑는 행사를 가진다.
이 행사는 세진도 참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을의 손님으로 있는 것이지 마을의 구성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전사를 뽑는 행사에서 자히알락의 전사들이 꽤나 좋은 성과를 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영광이기는 했지만 자그마치 반 수 가까운 전사들이 전장으로 향했다.
마을의 전력이자 일꾼의 수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었다.
자히알락은 마을 이주를 시작했다.
전사를 많이 보내는 마을이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을의 전력이 그만큼 약해진 것에 대한 소소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만약 이대로 가다간 이후에 자히알락에는 남아나는 전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런 정도로 어린 아이들의 성취기 뛰어났다.
몇 달을 배운 것으로 열에 다섯이 전사가 되었다.
그럼 1년을 더 배운 후에는 열에 열이 어머니의 전사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다음 해에 전사 시험을 치를 아이들의 수가 스물이 조금 넘는다. 그 아이들이 모두 어머니의 전사가 되어서 마을을 떠나고, 또 다음 해에도 그렇게 떠나게 되면 결국 자히알락에는 지금 나이가 든 이들과 여자들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을 통째로 뜯어서 옮기는 중에도 원로들과 족장은 수시로 모여서 쑥덕거렸다.
그들은 당장 최고의 땅을 차지한 것에 만족할 정도로 머리가 둔하지 않았다.
물론 족장은 신이 나서 의기양양했지만 현명한 원로들이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나씩 이야기를 정리하다가 결국에는 세진 가족의 비기를 다음 전사 시험에는 모든 부족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기 위해서 특별히 다음 전사 시험을 칠 아이들은 세진에게 맡겨서 특별 수련을 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보내야 할 아이들이라면 최대한 실력을 키워서 보내는 것이 생존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아이들을 키워낸 수련법이라고 모든 부족들에게 증명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증명을 해야 모든 부족들이 앞다퉈서 수련법을 배울 것이고 그래야 전사로 차출되는 비율도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부족 전체가 전사를 배출하다가 말라죽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세진은 그런 계획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수련법을 익히게 하는 것은 세진의 목적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늘 어머니의 전력이 상승하는 것은 마땅히 반겨야 할 일이니 말이다.
자히알락은 이전보다 풀이 많고 작은 개울도 흐르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가축들은 며칠 사이에 털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새로운 땅은 좋은 땅이었다.
세진도 새로운 마을에 블럭집을 짓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련에 힘썼다.
물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가축을 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풀을 뜯기기 때문에 세진과 오랜 시간 함께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 전사 시험을 치를 아이들 23명은 언제나 세진과 함께 움직이며 수련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세진의 집 곁에 새로운 합숙소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오로지 전사 시험에만 대비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세진은 열일곱 나이의 아이들을 데리고 끊임없는 수련 정진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수련장에는 어리가 고생해서 만들어 낸 기(氣) 집적진이 심어져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에테르를 사용하지 않았다.
무슨 능력을 사용하건 모두가 어머니의 기운을 사용했다. 그러니 세진도 오러 로드를 수련하면서 에테르를 이용하지 않았고, 자넷과 어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정신 능력의 경우에는 에테르를 이용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은 그 방법이 제일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디버프는 그 기반을 에테르로 하지 않으면 몬스터의 체내에 흘러 들어갈 수가 없었다.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에테르를 이용한 능력은 하늘 어머니의 자식들이 질색을 하며 익히기를 거부한다는 것인데, 그것만은 세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디버프 능력은 어쩔 수 없이 세진과 자넷의 특기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술법사라고 불리는데 정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쪽이라고 둘러 대면 되겠지. 쩝."
세진은 그렇게 정신 능력을 가르치려는 시도는 깨끗하게 포기하고 오러 로드 수련을 혹독하게 시켰다.
"너희들은 전사 시험을 보기 전에 익스퍼트가 되어야 한단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아무렴."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배워서 익스퍼트가 되라는 어이없는 세진의 요구. 하지만 그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