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면 공간에서 힘과 길을 잃다 -- >
세진은 토굴을 조금 더 깊게 만들 생각을 했다.
그 때문에 어리가 다시 세진을 보조해야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세진은 허탈한 감정에 빠지고 말있다.
토굴을 더욱 깊게 만들고 통로 사이에 몬스터를 차단할 수 있게 통로를 무너뜨리는 장치까지 만들었는데, 울렉치가 부하들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울렉치는 약속대로 자신의 마을에 갔다가 여분의 말을 끌고 곧바로 다시 달려 온 것이다.
울렉치는 구릉 위에 올라왔다가 넓게 파헤쳐지고 문이 달린 토굴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가 뭐라고 했어? 이런 곳에 있을 정도면 뭔가 있어도 있다고 했지?"
울렉치는 곁에 있는 부하에게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자랑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세진 일행을 불렀다.
세진은 토굴 공사를 마치고 마침 휴식을 취하려던 참이었다.
이제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오는 때인데, 이런 순간에 손님이라니, 세진은 자넷과 어리를 데리고 입구로 나와서 울렉치 일행을 만났다.
어제 보았던 그대로의 사람들이 몇 마리 늘어난 빈 말과 함께 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멋지군.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해."
울렉치는 토굴 입구로 나오는 세진에게 큰 칭찬을 늘어 놓았다.
"별 것 아니야."
세진은 울렉치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 울렉치는 세진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여기 약속대로 말을 가지고 왔어. 지금 함께 가겠나? 갈 때는 조금 느리게 갈 거 야. 가다가 마가스들이 나타나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천천히 가는 걸로 하자고."
울렉치의 말에 세진은 자넷과 어리를 돌아왔다.
"함께 갈까?"
"그러자. 우리끼리 여기에 머물면서 수련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래도 저 사람을 따라가면 당분간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곳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것이에요. 함께 가는 것이에요. 아빠."
"어머, 아빠라니 그런 또 무슨 소리야?"
자넷의 뜬금없는 어리의 아빠 소리에 깜짝 놀랐다.
"호호호. 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어리는 여동생이 아니라 딸이 된 것이에요."
"절대 안 될 소리다. 넌 내 동생이야. 딸이 아니라고. 갑자기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는 없는 거라고."
자넷이 격렬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뭐 그럼 하는 수 없는 것이에요. 어리는 세진 오빠의 어린 여동생인 것이에요."
결국 어리가 한 발 물러났다.
모두가 세진의 생각을 읽고 하는 행동이다.
자넷도 그것을 알았기에 살짝 눈을 흘겼다.
세진은 모르는 척 다시 울렉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울렉치는 세진이 아내와 딸에게 생각을 물어보고 합의를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자자, 니들 뭐하냐? 말 가지고 와. 저기 꼬마가 탈 말도 잘 챙기고."
울렉치가 소리를 지르자 예비용 말의 고삐를 안장에 걸고 있는 이들이 앞으로 나가서 세진에게 말고삐 세 개를 건넸다.
두 마리의 건장한 말과 한 마리의 조금 작은 말이 고삐에 매인 상태로 세진에게 전해졌다.
"그래도 다행이네. 자넷이 바지를 입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어리는 치마를 입은 것이에요. 이건 불편한 것이에요."
어리가 세진의 말에 칭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리는 어렵지 않게 등자를 밟고 말안장에 올라앉았다. 어리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려던 세진의 손이 부끄러운 상황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세진의 손이 자넷의 허리를 잡았다.
"어머, 도와주려고? 흐응. 고마워."
자넷은 세진이 도와준다니 활짝 웃으면서 말에 올랐다. 허리를 잡고 가뿐하게 말 위로 자넷을 올리는 모습에 울렉치와 그 부하들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세진과 자넷, 어리가 자신들처럼 익숙하게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울렉치 대장님."
"그렇군. 그런데 왜 말이 없었을까?"
"마가스에게 잃은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울렉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마을에 도착해서 시간을 두고 알아보면 저들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될 터였다.
"자, 그럼 출발해도 되겠나?"
울렉치가 물었고, 세진도 말에 오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돌아가자!"
"돌아가자! 끼랴!"
"랴랴랴랴럇!"
"이럇 이럇!"
울렉치의 고함소리에 따라서 말을 탄 그 부하들이 모두 한꺼번에 말머리를 돌려서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울렉치의 말대로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았다.
말을 타고 있는 세진도 자신이 탄 말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달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린다기 보다는 속보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였다. 다만 울렉치의 부하들 몇은 사방으로 퍼져서 넓에 포진했다.
아마도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일 터.
세진은 그런 모습을 보며 이들이 꽤나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무리라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말을 달리는 동안은 별다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울렉치와 그의 부하들은 손짓, 발짓, 눈짓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방인인 세진 일행은 거기에 끼어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달려서 밤을 보내고 아침이 지나고 정오가 지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울렉치를 다시 만나고 꼬박 하루가 될 시간이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곤 식사를 할 때 외에는 없었다.
울렉치와 그 부하들은 심지어는 잠도 말 위에서 번갈아가며 동료에가 고삐를 쥐어 주고 잤다.
참으로 무료한 시간인 것이다. 말을 달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나마 세진은 어리와 정신 연결이 되어 있어서 지금 테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일들을 보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자넷은 그저 계속되는 구릉과 지평선을 보며 내달리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세진은 테멜 안의 상황이 그런대로 안정적이라는 데에 안심했다.
어리는 현실에서 의체를 사용하며 능력이 감소되어 있었지만 테멜 안에서는 여전히 무소불위의 능력으로 테멜 안의 지구 이주민들과 다른 행성 이주민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테멜 안에 있는 폴리몬들과 여러 몬스터들에 대한 방비를 더욱 철저하게 했다.
몇 겹으로 테멜 외부와의 소통을 막아 버린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벌써 어리에게 일이 생겼다. 그것은 분명 어리 테멜 안쪽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였다.
그게 뭐가 되었건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어리 테멜 안쪽에 있는 여러 몬스터나 폴리몬 등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더 테멜의 보안을 철저하게 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 모두를 몇 단계의 테멜을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어리에게는 사실 모든 하위 테멜이 자신의 몸과 같은 상황이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몇 겹 테멜을 뚫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곳이 된다.
물리적으로 뚫을 수도 없는 테멜이고 보면 그 정도 보안이라면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미스터리한 것은 어떻게 어리의 의체가 밖으로 나오고 세진과 자넷의 능력을 없애버린 것인지 하는 문제지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한 세진이었다.
'여전히 소형 테멜 하나만 이곳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이에요. 제 테멜과는 완전히 독립된 것처럼 연결이 되지 않으면서 그저 이곳에서 창고처럼 쓸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에테르 로드 수련을 어떨 것 같아? 어리 너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하던데?'
세진은 토굴에서 잠시 어리가 에테르 수련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어리는 만능인 것이에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더구나 어리는 작은 테멜이지만 그 테멜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에테르를 이용하는 것은 무지무지 쉬운 것이에요.'
'다행이네. 이거 어리에게 신세를 많이 지게 생겼는데?
;'
'어리는 세진님을 도울 수 있게 되어서 기쁜 것이에요. 그렇다고 세진님과 자넷 언니가 힘을 잃은 것이 기쁘다는 것은 아닌 것이에요.'
'알아. 내가 너를 모르면 누가 알겠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어리는 세진님의 영원한 어리인 것이에요. 에헷.'
말을 달리는 중에도 그렇게 세진과 어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니 다행이긴 한데, 지구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실망하진 않을까?'
'지금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의논하는 중인 것이에요.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에요. 물론 특별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지구 이주민과 타행성 이주민들 중에서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대책 위원회를 꾸리고 있는 것이에요.'
'머리가 많아지면 좋은 생각이 나오기도 하겠지. 그래봐야 여기 있는 우리가 최종 결정을 하게 될 테지만. 그나저나 지구는 어떤가 모르겠네? 테멜 안에서 몬스터 사냥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에테르 코어를 얻을 방법이 없어질 텐데? 며칠 지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겠어.'
'프락칸과 깝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두고 혼란을 겪을 것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문제잖니. 천공기도 다시 만들기 어렵고 말이다. 다시 천공기를 만들려면 그 어마어마한 몬스터 코어를 어디서 구할 수가 있겠냐? 여기도 몬스터가 있고 에테르 코어가 있다곤 하지만 성질이 조금 다른 코어라서 활성화 시키려면 또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다.'
'세진님도 생각하시잖아요. 꼭 우리가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미 그 정도 코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 걱정하지 말라니. 그렇게 하마. 하하하. 어떻게든 되겠지. 긍정의 힘으로 화이팅!'
'그런 것이에요. 긍정의 힘으로! 화이팅인 것이에요.'
"우랴랴랴랴랴랴!"
"끼랴랴랴랴."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세진! 뭔가 나타난 모양이야!"
울렉치와 그 부하들의 움직임이 급해지고,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말의 속도를 높이는데 자넷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세진은 어리와의 정신 대화를 멈추고 사방을 둘러 봤다.
그리고 저 멀리 한쪽 방향에서 어제 봤던 늑대들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마가스, 하찮은 것들이다. 걱정 없다. 조금 빨리 달리다보면 모두 잡을 수 있다. 히랴랴랴!"
울렉차가 세진 곁으로 다가와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다시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울렉차와 그의 부하들은 슬며시 곡선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휙!
말을 달리면서 고삐를 놓고 상체를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울렉치의 부하들이 보였다.
세진은 그 모습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마상 생활에 익숙한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케엥! 켕!
더구나 화살이 빗나가는 것도 거의 없는 모양인지 한 방에 늑대들을 죽이지는 못해도 상처를 입혀서 뒤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게 하는 울렉치의 부하들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울렉치와 그의 부하들은 늑대들을 뒤에 끌고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간 달린 후에 울렉치와 몇몇이 칼을 꺼내서는 그것을 또 다른 봉과 연결을 해서 긴 날이 달려 있는 창을 만들었다.
그것도 말을 달리는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세진은 혼잣말을 하며 울렉치를 포함한 열 명 정도의 무리가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울렉치와 열 명의 창수들을 말의 속도를 높여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즈음에는 더 이상 뒤에서 쫓아오는 늑대는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에 말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 일행들 앞에 죽은 늑대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때에야 세진은 깨달았다.
이 늑대들은 처음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날린 활에 맞은 놈들이었다. 이제 세진 일행과 울렉치 일행은 말을 타고 거대한 원을 한 바퀴 돌아서 처음 늑대들과 추격전을 시작한 곳에 도착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나간 울렉치를 비롯한 창수들은 화살에 맞아서 기동성이 떨어지고 지친 늑대들을 뒤에서 몰아쳐서 잡고 있는 것이다.
"굉장하네. 이런 방법으로 늑대들을 잡네?'자넷이 곁으로 말을 몰아오며 감탄을 했다.
세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서 동감을 표시했다. 말이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에 울렉치의 부하들은 죽은 늑대들을 하나씩 안장의 뒷자리에 끌어 올려 묶고 있었다.
세진 일행 셋은 말을 탄 상태로 그들의 움직임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울렉치와 그의 부하들이 뒤쪽에서 다시 나타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