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면 공간에서 힘과 길을 잃다 -- >
세진은 언덕 위에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었다.
사실 그것은 세진의 힘이 아니라 어리를 부려먹은 것이다.
어리는 원래 능력을 상당부분 잃기는 했지만 그것은 규모의 문제지 능력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리는 테멜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거나 또 원레 테멜에 무언가를 넣거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제일 작은 테멜 하나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일종의 물건 수납공간으로 활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니 어리가 만들어준 삽으로 흙을 파면 어리가 그것을 그대로 그 소형 테멜 안에 넣어 버린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 흙은 옮기거나 할 필요 없이 파면 파는 대로 굴이 만들어졌다.
거기다가 어리는 합성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해서 토굴의 벽과 천정 바닥을 단단하게 보완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입구에 문까지 달아 놓은 토굴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에는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별자리는 지구의 것과 같아."
자넷이 하늘의 별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고, 세진은 이곳이 지구과 같은 공간에 있는 이면 공간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어리가 고생을 좀 해야겠다. 우리는 어리에게 의지를 해야겠지. 그리고 당연히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세진은 그렇게 말하고 토굴 안에서 지내면서 수련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먹고 마시는 것도 어리가 해결을 했다.
사실 맛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영양분만 따진다면 어리는 흙에서도 충분히 음식과 물을 마련할 능력이 있었다.
합성 능력은 거의 만능에 가까운 능력인 것이다.
하지만 수련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 날, 새벽이 밝기 전에 세진과 자넷, 어리는 울렉치가 말했던 마가스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가스는 바로 세진이 잘 알고 있는 에테르기반 생명체였다.
물론 울렉치가 그것이 마가스라고 말을 해 준 것도 아니지만, 세진은 그것들을 보는 순간
'저것이 울렉치가 걱정하던 마가스란 것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어렵게 토굴을 만들고 저녁부터 잠들기 전까지 세진식의 수련법으로 수련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세진의 능력이 대단하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넷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반인과 다를 것이 별로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세진과 자넷은 의체를 사용하는 중이고, 기본적으로 에테르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는 몸이었다. 더구나 짧지만 에테르를 몸 안에서 운용한 경험도 있는 몸.
그러니 일반인처럼 맥없이 마가스란 몬스터에게 당하진 않았다.
토굴의 좁은 입구를 세진이 막아서고 뒤에서 자넷이 보조를 하면서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크읏, 이것들 빨간색 등급은 될 것 같은데?"
"아니야. 1등급 정도 될 거야. 별로 강하지 않아."
"그런가?"
통로가 좁으니 한 마리 이상은 좀처럼 덤비지를 못한다. 그러니 흉흉한 싸움 중에서도 세진과 자넷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테멜 안에 넣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에테르 저항 때문에 안 되는 것이에요. 이러면 어리가 사용할 수 있는 테멜에는 에테르 유동이 없는 것만 넣을 수가 있는 것이에요."
어리가 세진에게 덤비는 늑대 형태의 마가스를 테멜에 넣어 버리려다 실패하곤 앓는 소리를 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그냥 상대할 수 있어. 수련이라고 생각하지 뭐."
세진은 그런 어리를 억지로 위로했다.
하지만 약한 몬스터라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좁은 통로와 자넷의 보조까지 어우러져 합공을 하고서도 다섯 마리의 마가스를 처리하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세진이 영구 회복 캡슐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면 어쩌면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르는 싸움이었다.
털썩!
"아아, 나도 힘들어."
세진이 바닥에 주저앉자, 자넷도 세진에게 다가와 세진의 등에 자신의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옛날 생각이 나네."
"응? 무슨 소리?"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말이야. 그 때도 이렇게 땀을 흘리면서 죽어라고 운동을 하곤 했었잖아."
"그랬어? 난 기억에 없는데?"
"후훗. 그래. 그렇다고 하자. 읏차!"
세진은 어느 정도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몸을 일으켰다. 그 덕분에 세진에게 등을 기대고 있던 자넷의 균형이 무너지며 뒤로 넘어질 뻔 하다가 겨우 몸을 바로 잡았다.
"아앗, 뭐야. 말이라도 좀 하고 일어나지."
자넷이 투덜거리며 엉덩이를 털고 있을 때, 세진은 시체가 되어 있는 마가르를 살폈다.
"신기하네. 이것들은 몬스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세진이 마가스의 사체를 이리저리 굴려 보며 말했다.
"뭐가? 딱 봐도 몬스터 패턴도 있는 것이 몬스터 맞는데 뭐."
"어리야."
세진이 어리를 불렀다.
"어리 여기 있는 것이에요."
어리는 세진의 부름에 안쪽에서 서둘러 걸어 나왔다.
체구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어리는 몬스터와의 싸움에 직접 나설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제일 안쪽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좀 살펴 봐. 분해도 해 보고."
"알겠는 것이에요."
어리는 세진의 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죽은 사체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몬스터는 에테르 기반 생명체인 것이에요. 그래서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에테르인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들은 조금 다른 것이에요. 에테르 기반 생명체외 지구 생명체의 합성인 것이에요. 약 20% 정도가 섞여 있는 것이에요."
"뭐?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자넷은 어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 여기 이게 증거인 것이에요. 분해를 하면 에테르는 날아가지만 이것들은 남는 것이에요. 음, 오늘 아침은 이걸로 만들면 좋겠는 것이에요. 순수한 탄수화물 단백질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에요."
어리가 뭔지 모를 기괴한 덩어리를 들고 그렇게 말했다.
"차, 차라리 흙을 먹고 말겠어!"
자넷이 소리를 질렀다.
어제 저녁 흙에서 뽑은 영양소를 죽을 듯한 표정으로 삼켰던 자넷은 다시는 그런 것은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 어리의 손에 있는 것을 보니 차라리 아무 맛도 없었던 그 가루를 마시는 쪽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기가 이면 공간이 분명하다고 해도 뭔가 이상한 곳은 분명해. 몬스터도 이상하고, 더구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충격이야."
세진이 다시 한 번 지난밤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이곳이 이면 공간이고, 여기에 행성 코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밤하늘의 별들이 지구에서 관찰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다만 그 별자리를 보면서 지금 세진 일행이 있는 위치가 바다 위라는 점은 좀 묘했다.
별자리들의 모습을 툴틱으로 확인하고 달의 위치까지 맞춰서 따져보니 지금 세진 일행이 있는 곳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의 북쪽지역이었다.
지금 그 위치에 있는데 세진 일행은 낮은 구릉이 펼쳐진 초원에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구와 같은 좌표에 있다는 것은 세진 일행이 지구를 덮고 있는 이면 공간 안에 있다는 믿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이면 공간은 지금까지 세진 일행이 경험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규모 자체가 가늠을 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도 분명해 보이고, 이 안에 이미 만났던 것처럼 사람들이 살고 그들이 부족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몬스터도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에테르 기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와 섞여 있을 수가 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행성 코어는 어디 있을까?"
자넷이 제일 궁금한 것이 그것이라는 듯이 말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 한 질문은 아닌 것이다.
"몬스터들이 많은 곳에 있겠지. 제일 강력한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겠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뭘까? 그럼 그 사람들 중에서도 그 엄청난 몬스터들과 겨룰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까?"
자넷이 그렇게 물었을 때, 세진은 정말 인간들 중에서 본래의 자신보다 더 강한 인간 이 있을 수도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뭔가 배울 것이 많을 것도 같았다.
"여기 에테르 코어가 하나 나온 것이에요."
그런데 세진이 그렇게 자넷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다섯 마리의 마가스를 모두 분해한 어리가 작은 에테르 코어를 하나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응? 이게 어디서? 아까 다섯 마리 모두 확인했는데 코어는 안 보였는데?"
세진은 자신이 그걸 놓쳤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닌 것이에요. 이건 몬스터 패턴 안쪽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에테르 코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 있는 것이에요. 죽은 몬스터의 몸 안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
"그럼 코어를 얻으려면 몬스터 배를 갈라 봐야 하는 거야? 아니구나 패턴이 있는 곳 을 갈라서 확인을 해 봐야 하는 거네? 패턴이 머리에 있으면 머리를 쪼개고?"
자넷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그런 생각을 해? 어리가 나서면 그럴 이유가 없는데. 어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분해를 해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코어가 몸 안쪽에 남는다니 신기하네."
자넷이 죽은 몬스터 몸 안에 코어가 남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고, 세진고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라서 적응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세진은 손에 들고 있는 에테르 코어에서 에테르를 느껴보려 했다.
그런데 에테르 코어도 일반적인 에테르 코어와는 달랐다.
"이거, 에테르가 훨씬 단단하게 결속이 되어 있는데? 쉽게 에테르가 풀려 나오지 않겠어."
"응?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예전 에테르가 그냥 물에도 잘 녹았다고 한다면 지금 이 에테를 펄펄 끓는 물에 넣어야 녹는 그런 거라고 할까? 비유하자면 그런 것 같아. 자 한 번 느껴봐."
세진이 에테르 코어를 자넷에게 줬고, 자넷도 에테르 코어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에테르를 느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모양이네. 밖으로 풀려 나오는 에테르가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에테르 코어가 몸 안에 있으면 찾기도 쉽지 않겠어. 참, 어리야 이 정도면 테멜에 넣어서 보관할 수 있지?"
세진이 어리에게 물었다.
"가능한 것이에요. 에테르의 유동이 거의 없으니 지금처럼 약해진 어리도 테멜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에요."
어리는 이곳에 도착한 후로 자기 비하적인 발언이 입에 붙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전의 능력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지금 상황에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리도 수련을 하는 것이 어때? 어쩌면 어리도 의체로 수련을 하게 되면 능력이 커질지도 모르잖아. 그 의체로 지금은 수련이 가능하지 않을까?"
자넷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
원래 어리가 테멜 안에서 사용하던 의체는 비록 어리의 몸으로 사용하긴 했지만 인형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의체를 제 몸처럼 사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그 의체를 테멜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쓸 일이 없으니 굳이 수련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의체가 이면 공간 밖으로 나와 있고, 더구나 의체를 실제 몸처럼 쓰고 있으니 자넷 생각대로 오러 수련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러 로드 수련을 하면서 실제로는 에테르를 수련하면 어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세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고, 세진의 생각을 알아차린 어리도 수련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이제 문을 다시 닫아걸고 수련을 시작해 보자. 아무래도 이대로라면 2등급 몬스터만 나타나도 그대로 끝장이겠어. 그럴 수는 없잖아?"
"맞는 말씀인 것이에요. 열심히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어리도 노력할 것이에요."
"그래. 그래. 나라고 혼자 놀 수는 없지. 열심히 해 보자고.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