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면 공간에서 힘과 길을 잃다 -- >
세진과 자넷, 어리는 언덕에 몸을 엎드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생명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거 도망도 못 갈 것 같은데?"
세진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들이 있는 곳이 주변에서 제일 높은 언덕이었다.
서둘러 도망을 간다고 하더라도 이 언덕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다른 언덕의 구릉의 뒤쪽으로 숨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저 쪽에서 달려오는 이들이 더 빠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람들인 것이에요."
어리가 지평선에서 달려오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네?"
자넷도 한 마디 보탰다.
세진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몽골인들을 떠올렸다. 다만 황인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피부나 갈색 피부, 회색 피부까지 다양한 피부색을 지니고 머리카락도 검은 색과 갈색, 검붉은 색 등으로 여러 색을 지닌 이들이어서 몽골인이란 느낌은 좀 덜했다.
다만 그들의 복장이 털가죽 옷이나 채찍, 거기에 말의 안장 옆구리에 칼이나 활 등을 달고 있는 모습이 기마병을 닮아 있었다.
"저들은 병사들인 건가?"
세진이 중얼거렸다.
"깃발은 없지만 군인일 것 같기는 하네. 아마 저 사람이 우두머리 아닐까?"
자넷이 선두에서 제일 큰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검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를 가리켰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제일 잘 만들어진 물건으로 보였고, 투구나 가슴의 호심경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이 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어쩌지?"
"일단 이것을 쓰시는 것이에요."
슬쩍 걱정을 하는 세진에게 어리가 검을 하나 건네준다.
"응? 이건?"
"지금 만든 것이에요. 시간이 없어서 하나밖에 만들지 못한 것이에요. 어리는 초라한 능력에 서러운 것이에요."
"세진, 저들이 우릴 알고 오는 것 같지?"
"글쎄? 이곳이 제일 높은 곳이라서 이곳을 목표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것일 수도 있지. 원래 초원에 사는 사람들이 시력이 좋다잖아. 3.0이 나 4.0은 우습다고 하던데?"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에요. 익스퍼트의 실력자가 몇 명 있는 것이에요. 능력을 따져 볼 때, 세진님과 자넷 언니, 그리고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무지 높은 것이에요."
어리가 그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 서른 가까이 되는 인마가 언덕 아래쪽까지 달려와서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워워!"
"워어. 쯧쯧쯧쯔"
"타하오! 랴랴랴! 랴랴."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능숙하게 다루며 언던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말을 세웠다.
그리고 자넷이 지휘관일 거라고 말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
"거기 있는 셋, 일어나서 모습을 보여라!"
세진 일행은 그 사내의 고함소리를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있었다.
"뭐지? 우리가 쓰는 말이 아닌데?"
"그러게. 그런데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에요. 하지만 들을 수는 있는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툴틱이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화도 할 수 있을 거야. 저들의 말이 곧바로 머리에서 해석이 되고 있으니까 이 걸 실시간으로 툴틱에서 분석하게 하면 어렵지 않에 해결이 되겠지. 일단 나가자."
세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곁으로 자넷과 어리가 함께 일어나 세진의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군. 너희는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세진은 지휘관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리도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우린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뭔 가 이상이 생겼다."
하지만 세진의 대답에 지휘관은 인상을 썼다.
"뭐냐? 뭐라고 떠드는 것이냐? 너희는 판겐의 말을 모르냐?"
"판겐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너희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다."
"젠장,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먹을 수가 있나. 어이 저 말 알아드는 놈 있나?"
그는 뒤에 기다리는 부하들에게 물었지만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부하들이 알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역시나 아무도 나서는 부하가 없다.
"이건 어쩌지?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데 그냥 여기에 두고 갈 수도 없고 말이지."
"일단 부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고민이지 않나. 저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걱정이지. 우리가 강제로 어쩌러고 하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까? 저기 칼 들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래봐야 수련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일 것입니다. 저기 보십시오. 얼굴이나 손이나 고생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이도 우유에 씻어 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예쁘지 않습니까. 일단 부락으로 데리고 갈 때에는 강제로 데리고 가도 도우려고 하는 건데 과정은 무시하죠."
"결과가 좋더라도 불쾌한 경험을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텐데?"
"설마 돕자고 한 일인데 그걸 문제로 삼기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여자나 아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흐음. 그게 문제야. 남는 말도 없어. 그럼 여자와 아이를 누군가 뒤나 앞에 태워야 하는데, 너는 네 안사람을 남의 말에 태우겠냐?"
"미쳤습니까? 절대 못합니다."
"그럼 니 말을 빌려주고 다른 사람 말을 탈 생각은?"
"대장님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내 말에 눈독들이지 마쇼."
"쯧,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새꺄. 너도 싫은 짓을 저 남자는 하고 싶겠냐? 응?"
"아, 그런 소리였습니까? 그러고 보니 문제가 있긴 합니다. 남는 말이 없다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네요."
부하는 대장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강제로 저들을 데리고 가려고 해도 말에 태워야 하는데 남편이 있는 여자와 아비가 있는 아이를 멋대로 다른 사람의 말에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여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는 경우는 가족인 경우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도 직접 말을 몰고 다니지 누구의 말을 타지 않는 것이 이들 부족의 관습이다.
남의 여자를 내 말에 태우는 경우는 약탈을 할 때 뿐이다.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때로 부족에 여자가 모자란 경우에 다른 부족에 가서 여자를 약탈해 온다. 그 때는 남모르는 여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내달려 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부족간의 혈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처녀를 데리고 오는 경우에는 유야무야 넘어간다.
그리고 장님이 아닌 이상 약탈혼을 하기 위해 나가서 유부녀를 말에 태우고 오는 경우는 없다.
유부녀는 머리를 하나로 묶거나 땋는다. 처녀는 머리카락을 둘로 나누어 땋거나 묶는다.
과부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지만 묶지 않고 좌우로 남기는 머리카락이 있어서 구별이 된다.
어쨌거나 유부녀만 아니면 처녀거나 과부거나 약탈혼의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있다.
당연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고 말에 태울 수 없는 여자다. 그렇다고 말을 내어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전사는 자신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타고 나와서 돌아가 풀어 놓을 때까지는 어쨌거나 말과 전사는 하나인 것이다.
"그것 참, 뭐라고 설명을 하지?"
일행을 이끌고 있는 울렉치는 답답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말을 못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라."
세진이 입을 가리는 동작과 귀에 손을 올리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 이후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저거 뭐라는 거냐?"
울렉치가 물었다.
"딱 보니까 말을 못 하지만 귀는 뚫렸다는 소리 같은데요?"
부하 중에 하나가 그렇게 대답을 하는 순간 세진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말인 모양이네요? 어이 우리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으면 칼을 대지에 꽂아."
울렉치와 이야기를 하던 부하 녀석이 세진에게 고함을 질렀다.
세진은 칼을 역수로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가 땅에 박아 넣었다.
"음. 그렇군 말을 하진 못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는 거군. 그럼 우리가 지금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알겠군."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여유분의 말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마을은 여기서 가깝지 않아서 사람을 보내서 말을 가지고 오게 하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일 해가 뜰 때까지도 갔다 오기 어려운 거리다. 이해하나?"
울렉치의 말에 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자넷과 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진의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어리는 세진의 생각을 읽고 한 행동이었고, 자넷은 이곳의 문화가 어떨지 몰라서 남자와의 대화에 끼지 않으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는 여자가 우위에 있고, 또 어떤 사회는 남성 중심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 사회이건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소통을 하는 것이 정상이고, 이성 사이의 소통은 그리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
"울렉치 대장, 우리 몇 명이 마을에 가서 말을 끌고 오면 되지 않을까? 그 사이에 대장하고 나머지가 저들을 보호하면 될 것 같은데?"
아까부터 울렉치와 주로 대화를 하던 부하가 의견을 냈다.
"그랬다가 습격이라도 당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저들을 보호하다가 포위되어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말이 없다면 그 꼴을 면키 어렵다."
울렉치의 말에 부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물론 습격을 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습격을 받게 되면 울렉치의 말대로 될 것이다.
지킬 것이 있으면 말을 타고 도망을 가면서 그것들의 수를 줄이거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지치게 만들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 불가능하다. 힘대 힘으로 싸워야 하고 그렇게 되면 희생자가 생기게 된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저들은 아직 우리의 손님이 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애일칭이 아니어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저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몸을 보호할 재주가 있었을 것이다."
울렉치는 그렇게 말했고, 세진은 아니라고 손을 젓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첫 대면에 살려달라고 애걸하기에는 세진의 자존심이 녹록치 않았 다.
세진은 웃으면서 손을 밖으로 내저었다.
흔히 가 보라는 뜻으로 쓰이는 손짓이었다.
"저건 뭔 뜻이야? 우리보고 그냥 가라는 건가?"
이번에도 역시 세진은 자신의 뜻을 맞춘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냥 간다고 해도 알아서 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울렉치가 세진에게 물었다.
세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죽어봐야 의체다. 자존심 때문에 위험을 자초하는 면도 있지만 그래도 굽히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 세진이다. 문제가 있다면 어리가 문제지만 어리 역시 지금 밖에 나와 있는 것은 테멜 안에서 사용하던 의체일 뿐, 본체는 여전히 테멜의 코어와 결합이 되어 있는 상태로 안에서 테멜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눈앞의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가 함께 있어 주겠다. 하지만 만약에 마가스들이 나타나면 그 때는 우리도 우리의 안전을 우선으로 행동하겠다. 어떤가?"
울렉치가 그렇게 물었지만 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인원이 많으면 도리어 마가스인가 뭔가 하는 것에게 들킬 가능성만 높을 것 같았다.
"싫다는 건가? 그렇군. 알았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마을로 돌아갔다가 다시 말을 가지고 오겠다. 그 때까지 무사히 있을 수 있다면 당신 가족을 우리 마을로 초대하겠다. 그건 어떤가?"
세진은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를 받아 가는 것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았다. 어떻게든 무사하기를 바라겠다. 마가스가 언제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 행운이 함께 하길! 자, 우린 돌아간다. 일정이 지체되었다."
울렉치는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고, 부하들은 울렉치의 명령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고 일제히 말의 옆구리를 박차며 울렉치를 따라서 구릉을 내려갔다. 그렇게 울렉치 일행의 모습은 왔던 길을 따라서 멀리 사라져갔다.
"정신없는 것이에요."
어리가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