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 정부 따위? 없는 게 나아! -- >
"그나저나 문제는 에테르 코어인데, 그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에테르 코어의 수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이번 회의에서 분명하게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비축해 둔 비축분의 사용을 허락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만일의 사태에서 에테르 코어의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걸 헐어서 쓰는 것은 우리가 가진 힘 하나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무슨 수로 도시를 유지한다는 말입니까?"
"어차피 우리들은 도시 주민들은 인질로 삼아서 프랜드에게 저항해야 하는 비루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에테르 코어를 내놓지 않는다면 결국 프랜드에서 내 놓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1억이 넘는 사람들을 버릴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1억의 인구는 10대 도시 전체의 인구를 합친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모두 담합을 해서 에테르 코어 문제에 신경을 쓰지 말자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도시 전체에 에너지 부족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면 프랜드에서 도시의 포위를 풀거나 혹은 에테르 코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인 것이다.
"흐음. 그건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외줄을 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테르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저들이 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저들이 우리를 지우려고 들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최대한 저들의 분노를 피해야 할 상황입니다만."
"그래서 우리가 도시에 핵을 깔자는 거 아닙니까? 자폭을 결심하고 하는 일인데 뭘 가리겠습니까?"
"맞습니다."
벤진 회장의 우려에 대해서 몇몇 도시의 수장들이 반대 의견을 내 놓았다.
"그럼 그 문제는 재량껏 하는 것으로 하십시다. 어차피 이제 우리는 서로 개별적인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문제에 스스로 대처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말입니다."
벤진 회장도 다른 도시의 움직임에 크게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벤진 회장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예상보다 심하네."
"뭐가?"
인상을 찌푸리는 세진 곁으로 자넷이 다가와 앉는다.
테멜 안에 있는 두 사람만의 부부 공간이라 어리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세진이 이곳에 있을 때에는 따로 방해를 하거나 하지 않는 곳이었다.
"에테르 코어를 틀어쥐고 내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아. 꽁꽁 숨겨두고 있는 거지."
"그 도시들 말이야?"
"그래."
"모두 그런 거야?"
"아니. 여섯 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고 네 곳은 비축분을 풀어서 최소한의 도시 기능은 유지하고 있어. 물론 그 때문에 엄청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연일 진압과 데모의 반복이지만."
"아예 공급을 중단한 쪽은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주민들이 도시 밖으로 몰려 나가서 몬스터 사냥에 나서곤 하지."
"응?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몽땅 잡아서 테멜 안으로 이송시키고 있지. 도시에선 실종, 혹은 사망으로 처리를 하게 되는 거고."
"가족들 상심이 클 텐데?"
"그것까지 신경을 써 줄 수는 없지.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 거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다지 정이 가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들도 지난 수십 년을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기대러 풍족한 삶을 누려왔던 이들이니까 말이야."
세진은 별로 연민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듯이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 잘못은 아니잖아. 그들이 원해서 그러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도시를 지배하는 일부 세력의 탓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훔친 빵인 줄 모르고 먹었다지만 그것으로 배를 불리고 살았다면 이제 빼앗기는 입장이 되어 봐야지. 그래봐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겪었던 것을 똑 같이 겪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 아직도 거대 도시들의 잠재력은 충분해. 스스로 아끼고 절약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는 곳이야. 거대 도시는 말이야."
"정말?"
"심지어는 에테르 코어가 전혀 없다고 해도 인구의 절반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로 기간 시설이 잘 갖추어진 도시들이지. 뭐 그걸 만드느라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뼛골이 빠졌겠지만."
"대단한데? 한 번 구경을 가 봐야겠다."
"시간 내서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이번에 본보기를 보일 도시가 정해지면 가보자고."
"응! 좋아. 참, 그런데 그 민족반역자?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야?"
자넷이 민족반역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한반도에서 일제히 검거되어 테멜 안에 갇혀서 노역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민 중이야. 일을 시켜도 생산성이 별로 없어. 하는 일마다 서툴러서 뭐가 제대로 되질 않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리하고 의논해서 테멜 중에 작은 것을 하나 배정해 줄 생각이야. 거기에 넣어 놓고 알아서 살라고 하지 뭐. 최소한의 의식주만 일단 해결을 해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알아서?"
"농사지을 여건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리고 그들이 생산한 것을 일정 기간마다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해 줄 거야.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는 거지."
"그러다가 전처럼 안에서 힘을 앞세워서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나타나면?"
"그런 놈들이야 어리가 알아서 하겠지. 모랜에 처박아 버릴지도 모르고."
"정말, 전에 그렇게 따로 빼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각성 능력자들과 수련 능력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끌려 갔잖아."
"능력을 이용해서 노역을 하고 있지. 돌을 깨거나 땅을 갈거나, 수로를 만들거나 하는 일."
"어리가 힘을 쓰면 금방인 일을 사람들 시켜서 하는 거구나?"
"어리가 힘을 쓰려면 에테르가 필요하잖아. 하지만 그들에게 일을 시키면 에테르 소비가 없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사람들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에테르가 몇 배는 더 많겠네. 쳇."
"하하하."
세진은 자넷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멋쩍은 웃음만 터뜨렸다.
자넷의 말이 맞는 것이다. 확실히 사람들을 부리는데 쓰이는 에테르가 더 많고 신경 도 더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노역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일정한 숫자로 나눠서 작은 부락 형식으로 찢어 놓을 생각이고, 그겋게 되면 따로 관리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알아서들 자리를 잡고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 못하고 적응에 실패한 경우는 세진도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상하이.
중국 동부 해안의 거대 도시로 세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10대 거대 도시에 포함이 된 곳이었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나 기타 도시들을 모두 제치고 10대 도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상하이의 지배자가 화족을 대표하는 진대인이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세계에 퍼져 있는 중국인들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세계정부의 배우 세력들을 결집할 때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세진은 자넷과 함께 그 상하이에 와 있었다.
"보기가 좀 그러네."
자넷이 길을 걸으면서 세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상하이는 무척이나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 그 도시가 몬스터들에 의해서 고립이 된 후로 에테르 코어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에너지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물론 워낙 부유한 도시였기에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에테르 코어가 적지 않았다. 안테르의 발명 이후로는 에테르 코어를 보관하는데 따로 신경을 쓸 이유도 없어서 많은 부자들이 에테르 코어를 재산 축적의 방법으로 쌓아두곤 했다.
그래서 사실 상하이의 에테르 코어 부족도 상하이의 부자들이 쌓아 두고 있는 것들 모두 활용한다면, 진대인이란 자가 나서지 않더라도 몇 년은 상하이의 도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진대인이 에테르 코어의 공급을 중지한 순간부터 에테르 코어의 가치가 급등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되니 에테르를 지니고 있는 부유층들이 에테르를 내놓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세진과 자넷이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상하이의 곳곳은 파괴와 약탈의 흔적이 역력했고, 간혹 죽은 사람의 시체가 길 구석에 방치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상하이 곳곳에서는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이 제대로 유지될 때에는 관공서의 명령이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그 후에는 집단의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된다.
수십 년을 몬스터와 싸워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무력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행동 양식이 쉽게 드러난다.
그 동안은 경제적인 압박 때문에 부유층의 손과 발이 되었던 이들이 딴 마음을 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호를 맡은 능력자들이 도리어 도적이 되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거리 로 내몰렸다.
그나마 가문이나 단체를 유지하며 힘을 모은 이들은 겨우겨우 자신의 것을 지키며 위태로운 세태 변화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 역시 안테르는 몹쓸 물건인 것이에요.
어리가 세진의 어깨 위에서 투덜거렸다.
"역시 알아내기 어렵지?"
- 자넷 언니는 어리를 1.3.5.7 홀수로만 보시는 것이에요. 어리는 에테르가 아닌 다른 기운을 이용해서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이에요. 범위가 좀 좁기는 하지만 안테르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라면 쓸만한 것이에요.
"1,3,5,7은 뭐야?"
- 띄엄띄엄 보신다는 뜻인 것이에요! 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본다는 뜻인 것이에요.
"아, 그래. 알았다. 그런데 그건 또 어디서 배운 거니? 요즘 다시 옛날 영화나 드라마 들 찾아보더니 거기서 나오든?"
- 어리가 언니에게 보내 드릴 것이에요.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하시는 것이에요.
세진은 그러려니 하고 모르는 척이다. 취미 생활까지 간섭할 이유는 없다.
"좋아. 그럼 이젠 어쩔 건데?"
자넷이 세진의 팔을 잡아 안으며 묻는다.
"진대인 저택으로 가야지. 그리고 어리는 다른 부유층들이 숨겨 놓은 에테르 코어들을 모두 회수해. 대량으로 에테르 코어가 모여 있는 곳이면 모두 몬스터들 진입 시켜서 찾아 와."
- 세진님 명령대로 하는 것이에요. 지금 이 순간부터 상하이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에요.
"될 수 있으며 인명 피해는 줄이고."
세진은 노파심에서 한 마디를 붙였다.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어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인 작전을 했겠지만 그나마 인명 피해를 줄이라는 세진의 명령 때문에 상하이의 재앙 수준이 낮아지게 되었다.
"이쪽이군."
세진은 어리가 몬스터들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진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 세진과 자넷의 발 밑에는 파르티크로 만들어진 발판이 놓여 있었다.
이미 에테르를 이용해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해진 세진과 자넷이지만 그래도 파르티크를 이용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었다. 진대인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에테르 코어의 방출을 금지해도 상하이란 거대 도시에 축적되어 있는 에테르 코어라면 몇 년은 버틸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진대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테르 코어를 이용하면 다시 수십 년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진대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의 근원인 에테르 코어를 그렇게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죽더라도 내 후손들이 일어설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진대인은 가문의 창고에 숨겨 놓은 에테르 코어가 자신의 후대에게 좋은 발판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상하이를 진대인의 가문이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래봐야 프랜드란 집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비루한 존재일 뿐이었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중화의 혼은 미래를 기약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혹여나 프랜드에서 상하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둔다면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도시를 복구하고 가문을 지탱하는 수족들의 힘을 흡수해서 작지만 단단하게 환골탈태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의 상하이는 진대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거대했다. 계획을 초과해서 성장한 도시는 진대인에게도 부담이 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기회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도 얼마 전까지 상하이라는 거대 도시를 손에 쥐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10대 도시의 주인들과 함께 지구 전체를 아울러 쥐락펴락 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탓에 요즈음 진대인은 마음의 병이 깊어지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