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 정부 따위? 없는 게 나아! -- >
방해일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참을 더듬은 끝에 자신이 무너지는 집무실 벽에 깔렸던 것을 기억했다.
"끙, 병원인가?"
하지만 방해일의 코에는 병원 특유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독특한 냄새기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바닥도 딱딱했고, 덮고 있는 것도 없었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그런 상태로 잠이 깬 적이 없었다.
노숙이란 것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방해일은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그 동안에 눈이 어둠에 적응을 하기라도 했던지 조금씩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이게 뭐야?"
방해일은 자신이 집무실에 있었던 그 복장 그대로 흙바닥에 누워 있다가 지금 일어나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방시장님?"
그 때 방해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해일은 고개가 부러질 정도로 빠르게 목소리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그가 익히 아는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 역시 방금 정신을 차린 듯이 흙투성이의 하얀 셔츠를 추스르며 방해일을 보고 있었다.
"박대장?"
"아, 네. 접니다. 박근태 방위대장입니다."
"이게 어찌된 것인지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출근하는 길에 갑자기 차가 구른 후로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깨어났지요."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한 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을 두르고 있던 어둠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아니, 저 사람은 대구 시장? 부산 시장도 있고, 광주, 대전 시장도 있군."
"대부분이 관직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아, 저쪽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뭐라고요?"
방해일일은 박대장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박대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시력은 그리 좋지않았고, 더구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안경까지 잃은 상태라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저,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짐작이지만 어쩌면 저쪽에 제 가족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대장이 허둥지둥 일어나서 걸음을 옮긴다.
"가, 같이 가세."
방해일이 급히 박대장의 뒤를 따른다. 상황이 어떤지는 몰라도 방해일은 벌써부터 줄대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곳에선 아무래도 박대장처럼 든든한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더구나 박대장은 수련 능력자로서의 실력도 출중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를 파악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둥도 없이 둠 형태로 만들어진 실내였다.
거기다가 벽과 천정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까맣게 보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빛을 내가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을 확실하게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실내의 조명이 되어 주었다. 눈이 부시지 않으면서도 그늘진 곳이 없이 사방을 밝혀 주는 조명이라 다들 신기하게 여겼다.
그들은 그것이 테멜의 기본이 되는 구조물임을 알지 못했다.
거대한 둠형 공동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의 수는 모두 1만에 가까웠다. 그들은 모두가 공공 기관에서 근무를 하던 이들이거나 도시나 마을에서 지도층으로 행세하던 이들이었고, 또 그의 가족과 자손들이었다.
게중에 시계를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꼬박 열여섯 시간이 흐르자 벽과 천정의 빛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이내 둠 전체가 깜깜하게 변해버렸다.
"흐흐흑. 어떻게 해? 응? 밖으로 나가는 길도 없이 고립된 곳이야. 하루 종일 물도 못 마셨어. 이러다가 굶어 죽을 거야."
"엄마, 목말라."
"배고파. 배고프다고!"
"아빠, 우리 집에 언제 가?"
여자와 아이들의 걱정과 투정이 어둠 속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전염이 되듯이 이리저리 전파되더니 곳곳에서 짜증과 눈물과 한숨과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썅! 시끄럿! 조용히 못해?"
그런 중에 수련 능력자 중에 하나가 기운을 실어서 고함을 질렀다.
"지금부터 떠드는 년놈이나 새끼들은 목을 비틀어 버린다. 앙. 아가리 닥치고 조용히 있어. 안 그래도 상황 파악이 안 되서 골이 아픈데 어디서 징징거려?"
"어떤 새끼야? 지금 어떤 새끼가 협박질을 하는 거야? 앙, 나 박근태다, 지금 떠든 새끼 다시 한 번 아가리 놀려 봐라."
누군가 고함을 지르자 박근태가 맞받아서 소리를 질렀다.
"아, 박근태? 그 방위대 대장이 여기 있었구만? 그 윗대가리들에게 손바닥 비벼서 된 대장 자리가 여기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어디 한 번 해 볼까?"
처음 소리를 질렀던 수련 능력자가 박근태의 고함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너 누구야 새끼야!"
"나? 나 조동일이다. 씹새야. 왜?"
"조동일이? 그 부산 꼴통?"
"왜? 이제 좀 감이 오냐? 박근태 그냥 찌그러져 있어라. 안 그러면 내가 니 목을 따 버릴 테니까."
"뭐라?"
"여보, 그냥 참아요. 네?"
"참긴 뭘 참아? 저런 새끼는 일찌감치 코를 발라 놔야 다음부터 기어오르지 않는 거 야."
"그래. 맞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한 번 해 볼까?"
박근태의 아내가 남편을 말렸지만 박근태가 듣질 않았고, 조동일이란 사내 역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랄들을 해라. 거기 둘, 아가리 닫고 그냥 디비 자라. 응?"
그런데 또 다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려그려. 우리 형님이 찌그러져 있으라잖냐. 응?"
"맞지. 그래야 하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괜히 설치다가 자는 사이에 목이 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지. 그리고 다른 년놈들도 마찬가지. 다들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라. 애새끼들 징징 거리면 콱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다들 간수 잘 하고. 집에서 하던 것처럼 개수작 떨면 내일 아침에 몇 놈은 사지가 뽑혀서 죽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허고."
"그렇지. 그리고 수련 능력자들은 좀 자중해라. 응, 이런 곳에선 아무래도 각성 능력자들이 더 효과적이니까 말이지. 이 어둠 속에서 몸도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손가락 하나를 잘라 가면 어찌 알 것이여?"
"크아아악. 어떤 새끼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왜 우릴 염탐을 하려 드냔 말이지. 그냥 조용히 자빠져 자라니까."
"그러게 말이지."
"..."
다시 공동 안은 조용한 침묵에 빠져 들었다. 어린 아이들을 거느린 부모들은 아이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소리를 내지 않게 했고, 서로를 껴안고 숨을 죽였다.
짙은 어둠. 그 속에서 흐릿하게 피냄새가 났다.
손가락 하나 잘린 것으로는 도저히 날 수 없는 비린내가 물씬 뿜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냄새를 피해서 이리저리 어둠 속을 기어다녔다.
공포와 침묵이 가득한 시간이 흘렀다. 갈증과 배고픔도 잊고 그렇게 하루의 밤이 지났다.
"꺄아아아악!"
"흐어억. 이게 뭐야?"
"사, 사람이 죽었다!"
"으아아아악!"
조금씩 빛이 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겨우 든 선잠을 비명소리에 깨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밤 사이에 소리도 없이 죽은 수십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검가 검게 굳어서 퍼져 있고, 하나같이 사람들은 그 시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불길한 비린내를 피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으으으, 이, 이게 뭐야? 왜? 누가!"
방해일은 그의 아내와 첩과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와 함께 한쪽 구석에 뭉쳐 있었다.
그의 곁에는 본처와 세 명의 첩과 다섯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 다섯 명의 며느리와 세 명의 사위, 그리고 방해일의 두 동생의 가족들, 그리고 방씨 일가와 혼인 관계로 묶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숫자가 1천에 가까웠다.
물론 그 1천의 숫자는 또 다른 이들과 인맥으로 얽혀 있었고, 그 인맥이 또 다른 인맥과 연결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방해일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해일 일가와 그 인맥들에는 불행하게도 각성 능력자와 수련 능력자가 별로 없었다. 방해일은 그 때문에 무력의 부재로 인한 위협을 크게 느끼는 중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죽은 이들의 수가 두 다리 숫자에 달한다. 자칫, 그 다음에는 자신이나 자신의 일가 중에서 누가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방해일은 이리저리 궁리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게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박근태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도 안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갔지. 이곳에선 밖으로 나갈 길이 없는데?'
방해일은 사람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찾지 못한 것이라 여기면서도 계속해서 박근태를 찾기 위해서 눈을 굴렸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박근태를 찾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결국 날이 밝고 정오가 되어갈 무렵까지 박근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부산 꼴통이라고 했던 조동일과 그 가족도 없었고, 뒤늦게 무리를 지어서 험한 분위기를 조장했던 대구 출신의 각성 능력자들도 사라졌다. 비록 그들이 자신이 누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곁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누군지 모두 알고 있었는데 밤 사이에 그들이 모두 실종되어서 대구 출신자들이 수군수군 거렸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둠 안은 인맥에 따라서 무리를 지어서 패거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대체로 각 도시나 마을을 중심으로 뭉치는 형태였다.
물론 방해일처럼 규모가 큰 경우에는 여러 도시의 권력자들과 연합을 하고 하나로 묶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발이 넓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도시와 마을 단위로 뭉치고, 그 후에는 규모가 작은 그룹들이 또 하나로 뭉쳐서 다른 세력과 균형을 맞춰갔다.
그렇게 무리를 짓고 있는 중에 둠에 일제히 변화가 생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돌도 이루어져 있던 벽이 녹아내리듯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간신히 드나들 정도의 통로가 생겼다. 그런데 둠의 원형 벽을 둘러가며 생긴 통로의 수는 백여 개나 되었다. 정확하게는 108개였다.
- 조용히 하는 것이에요. 지금부터 떠들어서 내 말을 방해하는 사람은 불이익이 있는 것이에요. 굶고 싶으면 떠들어도 되는 것이에요.
웅성웅성.
- 지금 내 말이 무시당한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의 식사는 반으로 줄어든 것이에요. 더 떠들면 식사는 다시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말을 안 들으면 먹을 것은 없는 것이에요.
갑자기 통로가 생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이어지는 말에 하나하나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떠들다가 옆 사람에게 얻어맞는 이도 있었다.
- 좋은 것이에요. 이제 잘 듣는 것이에요. 지금 광장의 벽에 만들어진 입구는 모두 108개 인 것이에요. 그리고 각 통로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의 총 수는 100명인 것이에요. 어떻게 들어가건 100명이 들어가면 입구는 닫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광장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도 입구는 닫히는 것이에요. 그렇게 입구가 닫히고 나면 다시 그 통로의 반대쪽에 입구가 열리는 것이에요. 그럼 그리로 이동을 해서 그곳에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입구가 열리는데 그 입구로 들어가면 배급된 식량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면 되는 것이에요. 물론 식량을 그 통로에서 먹어도 되는 것이에요. 하지만 일정 시간이 흐르면 통로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여러분은 다시 이곳 광장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알아둘 것이 있는 것이에요. 일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만 지불할 것이에요.
"이익,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너흰 누구냐? 설마 너희는 벗이냐?"
방해일이 고함을 질렀다.
- 쓸데없이 떠든 것이에요. 하지만 혼자 떠들었으니 저 사람이 끼어 있는 무리는 오늘 배식에서 절반을 뺄 것이에요. 그게 싫으면 저 사람은 동료로 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에요. 그걸 위해서 입구 중에서 검은 색의 표지가 나타난 것이 있는 것이에요. 무리에서 축출해서 지우고 싶은 사람은 그곳으로 밀어 넣으면 되는 것이에요. 괜히 잠자리에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하는 말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어쩌면 밤 사이에 사라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과 연관이 되어서 실종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 그럼 움직이는 것이에요. 잘 몰라도 하다보면 알게 되는 것이에요. 하지만 오래 적응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 것이에요. 빨리 움직이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목소리의 재촉을 받아서 광장의 벽에 생긴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해일은 홀로 검은색의 표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는 집단의 우두머리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여기서 고집을 부려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99명의 일족이 식량 배급에서 절반의 손해를 입게 되면 자신의 입지는 그야말로 추락을 하게 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 검은 색의 표지를 찾아 가면 일족에게 그만큼 신임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검은 표지로 들어간 방해일은 다시는 광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