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24화 (224/298)

< -- 클리르 행성에서 발이 묶이다 -- >

"잡아!"

하지만 에세돈은 어떤 시도도 해 보기 전에 세진의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을 받은 녹두병사들은 에세돈이 어떤 선택을 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녹두병사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에세돈 밖에 없었지만 녹두병사의 수 앞에서는 읨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녹두병사들에게 제압을 당했고, 이어서 세진이 꺼낸 쇠침이 몸에 파고드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의 무위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에세돈이 깜짝 놀랐다.

"대충 어떤 방식인지 알겠지? 너의 몸 안에 흐르는 에테르를 방해하는 거다. 그러니까 괜히 어설프게 에테르를 움직이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장담하건데 몸 안이 망가지고 다시 회복하려면 무척 힘들다."

세진은 틸터 중에서 나이가 많은 이들 중에서 영구 회복 캡슐을 복용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 봤던 자세이크 역시 영구 회복 캡슐을 복용한 사람이었다. 즉 1세대 틸터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아직까지 클리르 행성에 남아 있는 것이다.

대부분이 세대 교체를 통해서 사라졌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명이 긴 종족과 경지가 높은 사람, 그리고 영구 회복 캡슐의 도움을 받는 이들 중에서 장수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틸터들이 데블 플레인으로 돌아가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이전에 세진과 자넷은 그저 명분으로만 남은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이후에 1세대들이 다수 살아남아서 틸터의 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을 조금 달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에세돈은 회복 캡슐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몸이 크게 상할 수도 있기에 경고를 해 주는 것이다.

"크으윽. 이런 짓을 하고..."

"어차피 너희가 먼저 시작한 일이야. 나는 될 수 있으면 틸터 쪽과는 원만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말이지."

세진은 뭐라고 항의하는 에세돈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쇠침을 이용해서 '못질'을 하고는 모두를 어리 테멜 안으로 넣어 버렸다.

"어? 저기 봐, 도망을 가려는 것 같은데?"

갑자기 세진과 자넷 주변에 엄청난 병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검문소로 달려오던 틸터 소속의 병사들이 멈춰 서서 상황을 보다가 이제는 조금씩 물러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세진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틸터의 무리를 쳐다보다가 프랜드에그로메 쪽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군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두병사들이 세진, 정확히는 세진의 어깨에 있는 어리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따라 붙었다.

"빠르게 들이쳐서 잡는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죽어서 의체를 상실하는 일은 없도록!"

세진은 명령을 내리면서 곧바로 녹두병사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 곁으로 자넷이 따라 붙었다.

"이래도 되나 몰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 아냐?"

"포로를 많이 잡으면 협상의 여지가 생기는 거고, 그렇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대해봤자 얕잡아 보일 뿐이야. 강하게 나갈 때에는 강하게 나가야지. 그랜드 마스터는 그리 간단히 찍어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지."

세진이 자넷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사이에 이미 녹두병사들은 틸터의 병력과 충돌을 하고 있었다.

"차앗! 나는 너희가 모두 그랜드 마스터란 것을 믿지 않는다!"

틸터의 후방 공격을 맡은 지휘관은 녹두병사들의 수준을 보이는 대로 믿지 못했다. 그리고 용감하게 검을 휘두르며 녹두병사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콰과과광! 카가강! 파캉!

하지만 그의 검은 그가 노린 녹두병사의 머리가 아니라 방패에 막혀서 멈췄고, 곧이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녹두병사의 창과 검의 공격이 그의 사지를 찌르고 들어왔다.

"크아악! 아악!"

"죽지는 않겠네? 캡슐 복용자야."

"그래서 용감했던 건가? 어지간한 상처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못질 해서 잡아 둬."

"알았어."

세진은 자넷에게 그랜드 마스터의 뒷처리를 맡기고 계속해서 녹두병사들과 함께 틸터 진형을 파고들었다.

수십 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뭉쳐서 밀고 들어오는 돌파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애초에 있을 턱이 없었다.  거기다가 익스퍼트 중급 정도는 세진의 디버프에 걸려서 힘도 쓰지 못하고 몸을 떨며 쓰러져 굴렀다.

세진이 그렇게 녹두병사들과 함께 틸터 진형을 쓸고 지나가면 뒤따르는 의체 사용자들이 틸터의 부상자들을 포박했다.

그러는 동안에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급히 달려오던 반대쪽 무리들은 어이없이 깨지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더니 급히 후퇴를 해버렸다.

"뭐야? 안 덤비고 그냥 가는 건가?"

세진이 아쉬운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쓰러진 부장자들을 잡는 것만으로도 벗의 전사들은 바빴다.

한 번의 충돌로 에세돈을 비롯한 그랜드 마스터 두 명에 마스터가 오십 여명이 잡혔고, 익스퍼트는 수 백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런 소문이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틸터나 덱터 양 진영에 프랜드에그로메와 틸터의 충돌이 알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틸터 진영에서 협상단이 프랜드에그로메를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런데 그 협상단을 이끌고 온 대표가 세진과 안면이 있는 빈엘르였다.

"틸터에선 협상의 의지가 없는 모양이군. 빈엘르 당신을 보낸 것을 보면 말이야."

세진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신분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조장도 아닌 일개 수색 대원을 협상단의 대표로 삼은 것이 프랜드에그로메를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저, 그, 그건 아닙니다. 저는 틸터의 마함브에서 내린 결정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함브의 협의를 거친 내용에 있어서는 전권을 받아 온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두 분과 안면이 있고 하니 저를 보낸 것이지요. 다른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빈엘르는 세진이 불쾌하지 않도록 상황 설명을 하느라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물론 고급 인력을 보냈다가 다시 포로가 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세진이 당장에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것이다. 그런 무시를 당하고 참을 사람이 아니라고 빈엘르는 생각했다.

"뭐 좋다. 그렇다고 하지.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왔지?"

세진도 초반부터 협상을 깰 생각은 없었기에 빈엘르의 변명을 받아들이는 척 했다.

"틸터에서는 앞으로 세진님과 자넷님이 하시는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게 전분가? 나와 내 아내를 잡아 죽이겠다고 설친 것에 비하면 약소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군. 그냥 앞으로도 간섭을 하라고 해. 우리도 틸터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우리야 별로 상관없는 문제야. 틸터에서 간섭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가 그걸 신경써야 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 이야긴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군."

세진은 빈엘르의 처지를 고려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개인적인 안면이 공식적인 일에 영향을 주게 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세진은 빈엘르를 압박하고 있었다.

"덱터와의 분쟁에서 세진님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며 덱터에 대한 공격에서 함께  공조하는 협약을 맺고 싶다고 합니다."

빈엘르가 다시 보따리를 풀었다.

"그게 우리가 좋은 거야? 아니면 틸터가 좋은 거야? 협상을 하러 와서 너희 쪽이 유리한 조건만 늘어놓는 것은 무슨 경우지? 그걸 협상 내용으로 들고 온 거야?"

세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시만요. 틸터가 가지고 있는 게이트 테멜에 대한 정보를 모두 전해주겠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데블 플레인으로 가는 게이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테멜의 위치와 그 이유도 함께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진은 급하게 자신을 붙잡으려는 빈엘르의 말에 살짝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 틸터에그로메에 도착을 했을 때에도 세진은 틸터의 마함브들에게 그 정보를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극비라면서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소리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세진에게 디퀴피드가 있다면 모를까,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디퀴 피드로 일정 범위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도 겨우 하나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장치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것 역시 많은 활용 방법이 있을 테지만 세진과 자넷이 배운 것은 테멜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것을 어떻게든 어리가 만들려고 해 봤지만 디퀴피드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핵심 장치 때문에 어리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틸터가 가진 테멜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려준다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쁘지 않군. 그런데 말이야. 그 이동용 감지장치 그걸 만드는 사람을 좀 지원받고 싶은데 말이지. 가능하겠지?"

세진은 테멜에 대한 정보에 더해서 디퀴피드의 이동 감지 장치를 생산하는 기술에 욕심을 냈다.

"저, 그것은 제가 허락받은 범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나는 아직까지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이 없어. 빈엘르도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모두가 틸터에서 내민 조건일 뿐이다. 설마 틸터에선 내가 그 쪽에서 내놓은 조건들에 흡족해져서 전혀 다른 요구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건 아니겠지? 그래서 내 첫 요구 조건은 그거야 디퀴피드를 생산, 수리할 수 있는 기술의 전수."

"알겠습니다. 마함브에 세진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부의 결정을 받겠습니다."

"그라고 말이야, 그 장치의 세밀한 사용법은 당연히 함께 따라와야겠지? 제법 먼 거리를 두고 통신도 가능한 것 같던데 말이지."

"그것도 건의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시 보자고. 그 때는 나도 뭔가 새로운 요구조건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세진은 그렇게 첫 협상을 마무리했다.

실상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런 저런 줄다리기도 거의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가 오고 갔을 뿐이었다. 빈엘르 역시 마함브에서 결정을 내린 범위 안에서만 협상이 가능한 상황인데 그는 협상보다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선처를 바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따로 줄다리기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세진의 요구는 마함브의 회의에서 오렵지 않게 수용되었다.

디퀴피드의 소형 이동 감지 장치를 만드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태부족이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클리르 행성에 디퀴피드 통신 장치의 숫자가 그렇게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틸터의 형편이 그런 것이고, 덱터에서는 디퀴피드 통신 장치를 소형화 하고 또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덱터는 다른 행성에서 통신장치에 들어가는 핵심 재료를 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마함브에서는 세진이 다른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기술자를 보내준다고 해도 그것을 생산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통신 장치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몇 대 되지 않을 테니, 그것의 메뉴얼을 알게  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거란 판단도 섰다.

그런 이유로 세진의 요구가 마함브의 회의에서 어렵지 않게 통과가 되고, 또 빈엘르에게 전해졌다.

그 속도가 매우 빨라서 세진은 빈엘르를 만났던 다음날, 다시 빈엘르와 마주보고 있었다.

"저희는 세진님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빠르군. 결과가 그렇게 쉽게 나왔다는 것은 내 요구조건이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는 거겠군."

"그보다는 세진님께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마함브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세진님의 선처를 바라고 있습니다."

빈엘르가 잔뜩 저자세로 나왔다.

세진이 또 다른 요구조건을 내걸어 틸터를 곤혹스럽게 만들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세진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틸터에 요구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는 세진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거기에 대고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을까.

"좋아. 나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다. 틸테에서 약속한 것들이 도착하면 곧바로 포로들을 돌려주겠다. 하지만 명심해라. 다시 우리 프랜드에그로메에 적대적인 행위를 할 때는 선전포고 없이 응징에 나설 것이다."

세진은 귀찮은 포로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데리고 있어봐야 신경만 쓰이는 위험 요소일 뿐이다. 빨리 내다 버리는 쪽이 세진이나 어리에게도 홀가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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