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리르 행성에서 발이 묶이다 -- >
지도를 펼쳐 놓고 세진과 자넷, 그리고 어리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프랜드에그로메를 어디에 세울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두 곳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했다.
하나의 행성에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으면 당연히 두 곳에 접점이 생긴다. 실상은 모든 경계가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이곳 클리르에는 덱터와 틸터 이외에도 막강한 세력이 있다.
바로 몬스터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은 주로 테멜이 생성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틸터거나 덱터가 완전히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그곳에 있는 테멜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 맞았다. 이를테면 테멜 영역은 곧 몬스터들의 영역이고, 그 영역을 덱터와 틸터가 나누어서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이트 테멜을 몰래 숨어 들어가서 이용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디퀴피드는 테멜의 변화에 민감해서 테멜의 입구가 열리는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즉 테멜 안으로 누가 들어가거나 혹은 테멜에서 나오는 경우에도 정확하게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덱터나 틸터에서 모든 테멜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들은 게이트가 있는 테멜을 알고 있고, 그 테멜들에만 신경을 쓴다.
그런데 틸터는 오로지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가는 테멜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곳과는 상관없는 게이트 테멜이라고 밝혀진 곳은 지키기만 할 뿐 이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비해서 덱터의 경우에는 제법 활발하게 테멜 게이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틸터와 달리 다른 행성에도 지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조직적인 연계를 맺 고 있다고 했다.
세진도 당연히 다른 곳에서 에테르 몬스터에게 점령된 행성과 연결되는 테멜 게이트를 파괴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과 덱터가 연계를 맺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세진이었다.
어쨌거나 덱터와 틸터 사이의 대립에서 몬스터가 끼어드는 바람에 덱터와 틸터의 영역 사이에 공백이 생겼고, 때문에 몬스터 영역과 텍터, 틸터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도 생기게 되었다.
세진 일행은 그렇게 세 세력이 겹치는 부분에 프렌드에그로메를 세우려고 장소 선정을 하는 중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여기가 좋을 것 같아."
"선주민들 때문에?"
"그렇지. 우리가 앞으로 덱터와 사이좋게 지내긴 어려울 것 같은데, 여기 이곳은 주로 덱터의 영향을 받는 선주민들과 가깝거든. 그러면 아무래도 유입되는 인구가 적겠지. 그러니까 이쪽이 더 좋다는 거야."
세진이 지도 위의 두 지점을 번갈이 손가락으로 찍으면서 말했다.
- 맞아요. 그러니까 세진님이 고르신 곳이 좋아요. 물론 선주민 마을과 거리가 멀긴 하지만 파르티크를 사용한 탈것을 잘 이용하면 조금 먼 거리는 문제가 아닌 것이에요.
"그래. 그렇기는 하지만 파르티크 금속을 가늘인들처럼 사용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
자넷이 조금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선주민을 끌어 들이지 못하고 의체들만으로 마을을 꾸리는 것은 내키지 않는 것이다.
- 가늘인처럼 잘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에요. 아주 조금만 할 수 있어도 괜찮은 것이에요. 어리는 순수 파르티크로 탈것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별로 힘들지 않게 그걸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에요. 파르티크의 비율이 높으면 도리어 염력을 증폭하니까요.
"사람들 올라타고, 짐 싣고 하면 힘들기는 마찬가지거든?"
세진이 순수한 탈것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짐과 사람의 무게 는 온전히 운전자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세진, 그래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의체를 이용해서 탈것 운전수를 키우는 거야. 그래서 전문적으로 그 일을 하도록 맡기는 거지. 아, 그리고 테멜 안에도 보급하는 것이 좋겠다. 솔직히 테멜 안에서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것은 좀 아니잖아."
자넷이 파르티크를 이용한 탈것을 테멜 안의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사용하는 것까지 이야기를 확대했다.
"좋아. 결정했다. 여기로 하자. 여기에 도시를 세우고, 의체를 이용해서 세력을 키우는 거야. 그 파르티크 탈것도 고민을 해 보고."
"덱터와 틸터가 놀라겠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생기면 말이야."
"신경을 좀 쓰겠지. 그런데 덱터 쪽에서는 역시 반응이 없네?"
- 그러게 말이에요. 포로를 보내서 협상을 시도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네요. 포기한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타협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니 정말인 모양이네? 어쩌지?"
"그러게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풀어주기도 그렇고. 계속 잡아 두자니 그것도 좀 곤란하고 말이지."
"어리야 그 사람들 회복하면 위험하겠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랜드 마스터가 두 명이나 되니 그건 좀 문제거든."
- 테멜 안에서 난동을 부리면 곤란하긴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까불면 눅두병사들 잔뜩 풀어서 잡으면 되니까요.
"그래. 당분간은 못질을 해 둔 상태로 그냥 지내게 하다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회유를 해 보자. 죽이지 않는 대신에 그냥 조용히 테멜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괴수는? 뭐 좀 달라진 거라고 있어?"
- '쫑'은 여전해요. 모랜 테멜 한쪽에 웅크리고 영역을 선포한 후에는 그냥 몸을 회복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어요.
"그 녀석이 날뛰게 되면 테멜에 문제가 생길까?"
- 아시잖아요. 절대 모랜 테멜의 코어에 접근할 수는 없어요. 정말 위험하면 두 분이 나서서 함께 상대를 해 주시면 되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자, 그럼 오랜만에 공방 식구들을 만나 볼까?"
세진은 정말 오랜만에 떡배 등을 만날 생각을 했다.
어리 공방의 식구인 떡배, 김혜인, 김형일, 정진이, 선도일은 테멜에서도 서로 이웃이 되어 살고 있었다. 떡배와 김혜인 박사는 딸 하나를 두었고, 김형일과 정진이도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도인은 테멜 안에서 만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들은 지구의 괴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 곧바로 테멜 안으로 소환이 되었고, 그 후로는 계속해서 테멜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7등급 이상의 몬스터라는 괴수가 72마리나 지구상에 등장했으니 지구가 그 후로 어떤 꼴이 되었을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민자들은 대부분 지구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종의 금기처럼 화제로 삼는 일을 삼가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세진씨가 우릴 부르는 것이 말이야."
"우리 딸이 열 두 살이니까 10년 조금 더 넘었지."
"그 동안 연락도 없다가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르는 걸까요? 쌍둥이 아빠."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형수님. 사실 우리들이야 이웃에 살면서 자주 봤지만 세일씨랑 자넷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 아닙니까."
"어쩌면 벗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도일이 끼어들었다.
다들 부부동반인데 선도일만 아내를 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무슨 소리야?"
떡배가 도일에게 물었다.
"그 때, 괴수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들을 모두 안전한 이곳으로 불러들였고, 그 후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벗이 그 괴수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서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실패했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 다면 지금까지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닐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나 의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거예요. 우리를 굳이 배제할 이유가 없어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형수님, 사실 우리는 이곳이 이면 공간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동안에 세진님과 자넷님은 이곳까지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올 수 없는 상황에서 겨우겨우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가 있는 이면공간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 우리끼리 아무리 떠들어봐야 추측일 뿐이잖아. 솔직히 우리들이야 이곳에서 안전하고 또 평화롭게 잘 지냈어. 덕분에 우리 쌍둥이들도 건강하게 잘 컸고."
"커엄. 그건 그렇지. 우리 공주님도 덕분에 잘 크고 있지. 솔직히 몬스터가 날뛰는 밖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다면 굉장히 불안했을 거야. 거기다가 그 괴수,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핵으로도 절대 해결 불가능한 몬스터라고 했는데 그 수가 72마리였어. 솔직히 지구의 문명이 완전히 멸망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전력이지.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 일흔두 마리가 설쳤다면 말이야."
"떡배 형님 말이 맞죠. 솔직히 나도 덕분에 아내를 만나서 행복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떡배와 선도일이 테멜 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그 때, 세진과 자넷이 떡배 등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다섯 명의 어리 공방 식구들이 벌떡 일어나 세진과 자넷을 맞이했다.
"어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요?"
정진이가 제일 먼저 세진과 자넷을 만난 감회를 그렇게 표현했다.
사실 10년의 시간은 어리 공방의 다섯 사람들에게만 흐르고 세진과 자넷에겐 전혀 흐르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영구 회복 캡슐의 위력에 더해서 그랜드 마스터의 능력이라면 노화는 한동안 걱정할 필요가 없기는 하지만 실상 이곳에 나타난 세진과 자넷도 본체가 아니니 그런 것 은 의미가 없었다.
"호호호. 쌍둥이 엄마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정진이씨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네요."
자넷이 슬쩍 정진이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준다. 실제로 각성 능력자인 네 사람이나 수련 능력자인 도일도 나이에 비해선 굉장히 젊은 얼굴이었다.
"수련을 멈추지 않았군. 다들 예전과 비할 수 없이 강해졌어."
세진은 마스터 중급 이상의 능력을 품고 있는 다섯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헌터룸에서 의체를 이용해서 수련을 하는 동안에서 본체 수련도 멈추지 않았던 표가 나는 것이다.
"뭘 이렇게 서서 이러고 있어요? 자 앉아요. 앉아서 이야길 하죠."
자넷이 사람들을 몰아서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도 세진과 함께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세진은 공방의 식구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다섯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하듯 바 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에게, 그리고 벗에게 비밀이 많은 것은 여러분도 잘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진이 전에 없이 존대를 사용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떡배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세진을 바라봤다.
"제가 여러분은 물론이고 지구에서 활동하던 모든 의체들을 복귀시켰던 그 날, 지구에 72마리의 괴수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벗에선 그 괴수를 상대할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전력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괴수 한 마리를 상대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꿀꺽!
누군가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