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20화 (220/298)

< -- 클리르 행성에서 발이 묶이다 -- >

"저기, 저기 보이죠? 저게 디퀴피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빈엘르가 앞쪽을 손가락질 하면서 디퀴피드가 있다고 했고, 세진과 자넷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다가 굉장히 놀라고 말았다.

클리르 행성 전체를 아우르며 테멜을 감시하는 것이라서 규모가 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높이가 수천 미터가 넘고 둘레 역시 수천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은 지금까지 세진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규모였다.

"피라미드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그럴 말이라고 해? 겨우 몇 백 미터 높이하고, 저건 몇 천 미터라고."

"대단하네."

"뭐, 우주 연방의 회사 건물들 중에는 저보다 더 큰 것들도 많지만 어쨌건 이런 낙후된 곳에 저런 건물은 정말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저기 꼭대기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요. 그것이 제가 지닌 에너지와 충돌을 일으켜요. 아마도 테멜 코어가 만드는 에너지에 반발하는 성질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인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제 에너지가 밖으로 펼쳐지질 못하는 거죠.]어리가 테멜 밖으로 펼치는 에너지는 실제로 강력한 것이 아니다. 또 강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넓게 펼쳐서 주변을 살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리의 테멜 코어 에너지가 디퀴피드라는 감지탑의 에너지에 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디퀴피드가 있는 곳이 곧 틸터와 덱터의 수도라고 할 수 있다.

클리트 행성은 틸터 제국과 덱터 제국이라는 두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선주민들에 대한 통제는 그리 심하지 않아서 제 진영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틸터 진영에 속한 선주민 젊은이들은 수련을 거쳐서 언젠가는 틸터에 들어가길 희망하고, 덱터 진영의 젊은이들은 또 덱터에 속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길 원했다.

어찌 말하건 클리르 행성 역시 힘이 지배하는 행성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이 덱터와 틸터인 것이고, 거기에 속해 있다는 것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녀도 되고, 또 주변인들의 허리가 자연스럽게 굽혀진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니 출세를 하고 싶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덱터, 혹은 틸터에 속해서 공을 세우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길 원하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세진과 자넷이 빈엘리 일행의 안내를 받아서 디퀴피드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입구에는 틸터의 수뇌부들이 무리를 지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진은 그것을 보고, 뭔가 장거리 연락 수단이 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디퀴피드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틸터 수뇌부들을 대표해서 세진과 자넷을 맞은 사람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인 특징은 없었고, 흰 수염과 머리카락에 비해서는 팽팽한 피부를 지닌 노인이었다. 세진은 그 노인은 물론이과 마중을 나온 틸터의 수뇌들 중에서 다수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약 서른 정도의 수뇌들 중에서 몇 명을 빼면 모두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전부는 아닐 것 같은데, 전력이 굉장하네. 거기다가 덱터 쪽에도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을 테니, 이 클리르 행성은 용담호혈일 것 같은데?'

세진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널린 것이 그랜드 마스터란 소리가 입밖으로 나올 지경인 것이다. [세진님 여기서 용병을 구해서 지구로 가면 괴수들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리게 넘치는 그랜드 마스터들 접하고 놀란 세진에게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다. 세진은 어리의 말을 무시하고 상대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 세진이오. 그리고 이쪽은 내 아내 자넷."

세진의 말은 그다지 공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계속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틸터의 간부들을 만났다고 바뀔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틸터의 수뇌들 중에서 누구도 세진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이들은 없었다.

사실 지금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단계에 이르러 있는 세진과 자넷이었다.

그런 세진이 누군가를 존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 역할은 자넷이 알아서 해 주고 있으니 세진은 여전히 무뚝뚝한 모습을 가장하는 것이다.

"아, 나는 틸터의 마함브 자세이크라고 합니다. 마함브는 틸터의 직책입니다. 일종의 원로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알고 있소. 틸터가 집단 지휘 체제를 가지고 있고, 그들을 마함브라 한다고 들었소. 틸터의 마함브가 아홉 명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소."

"하하하. 맞습니다. 내가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인 자세이크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들이 나머지 마함브 들입니다."

자세이크는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노인들을 소개했다. 결국 세진과 자넷을 보기 위해서 다섯 명의 마함브가 도시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서로간에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세진과 자넷은 자세이크의 환영을 받으며 틸터들의 중심 도시인 틸터에그로메에 들어섰다.

틸터에그로메에서 세진과 자넷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틸터에서는 세진과 자넷의 무력을 인정하고 또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전력이 늘어났다고 덱터와 전면전을 벌이거나 또는 싸움을 확대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서도 대치해 온 두 세력은 이번에 세진과 자넷이 벌인 사건에 촉각을  곤두섰지만 그렇다고 행성 전제의 균형에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니 세진과 자넷도 딱히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저 도시를 구경하다가 주는 음식을 먹고 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며칠 시간이 지나자 세진과 자넷은 틸터에그로메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틸터의 입장에서는 그저 세진과 자넷이 덱터 쪽으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세진과 자넷이 데블 플레인으로 건너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서 덱터를 물리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해야 하는 거였어."

세진이 살짝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른 행성으로 가서 그곳에서 어떻게 넘어가는 방법은 없을까?"

"길목 행성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행성군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 같아. 지금까지 확인 했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그래도 혹시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해서 묻는 거지."

"아예 필드 행성, 그러니까 선주민들이 모두 전멸한 행성으로 통하는 길목 행성을 찾는 방법이 있을 거야. 아무래도 그 쪽은 길목 행성의 수가 하나는 아닐 것 같으니까 가능성이 높지."

"그래. 가능성이 높긴 하지. 사람 하나 없이 에테르 몬스터만 날뛰는 행성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높아. 하지만 그 많은 행성들 중에서 필드가 된 행성을 찾는 것은 기약이 없잖아."

자넷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곳 클리르 행성에서 데블 플레인으로 넘어가는 게이트 테멜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거른 결론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 그럼 덱터는 적이 되는 거네요? 거기다가 어떻게 해서든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넘어가는 게이트 테멜에 대한 정보를 찾아야 하고 말이죠.

"어리야 어떻게 범위 좀 널려 볼 수 없겠냐?"

세진이 답답한 마음에 어리에게 물어본다.

- 테멜 코어의 에테르 소비량을 높이게 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겨우 100미터 정도? 그 이상이라도 200미터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그 디퀴피드라는 것이 엄청나게 까다로워요. 다른 것에는 괜찮은데 유독 테멜 코어에서 나가는 에너지에만 천적처럼 반응을 하고 있어요. 아마도 덱터란 단체에서 테멜 사이의 정보 교환까지 막기 위해서 만들어낸 테멜 코어 방어 기구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어리 니 말은 그게 테멜 코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정보를 막기 위해 만든 것 같다고?"

- 그러니까요. 원래 테멜 게이트를 통해서 이어진 두 개의 테멜은 양쪽 행성의 에테르는 물론이고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디퀴피드란 것은 최소한 그것이 있는 행성의 정보를 코어가 수집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잖아요. 코어의 기운이 외부로 뻗어갈 수가 없게 만드니까요.

"그거 일리가 있는데? 디퀴피드가 그냥 테멜이 어디에서 생기고 없어지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덱터들이 에테르 몬스터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행성간의 정보 전달을 막을 요량으로 제작한 거란 말이지? 정말 그럴듯 하다. 어리야."

- 그럴 듯 한 것이 아니라 거의 확실해요. 제가 지금 당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의지가 있으니까 나름대로 제 자신을 지키고 있지만 다른 테멜 코어들은 속속까지 전부 들키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생활 따위는 없는 코어가 되는 거죠. 불쌍한 코어들 같으니라고.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하고, 어쨌거나 여기 틸터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것이 별로 없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길을 찾아 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클리르에 프랜드에그로메를 만든다."

에그로메는 이곳 클리스 행성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래서 틸터의 수도가 틸터에그로메가 된 것이다. 그러니 방금 세진의 선언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응? 어떻게 하려고?"

자넷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는다.

"덱터들 영역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세우고 놈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병사들은 지금 수련중인 의체들."

"하지만 아직 마스터에 이른 사람들도 몇 안 되는데?"

자넷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세진에게 따진다.

"괜찮아. 정말로 덱터와 싸우는 선봉에는 우리가 설 거야. 나머지는 몬스터를 상대하고 또 겉으로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거야. 거기다가 우리 프랜드에그로메는 틸터나 덱터보다 훨씬 앞서는 살기 좋은 도시가 될 거야."

"어떻게 하려고? 어지간한 전자제품은 이곳에서 쓰지 못해. 알잖아. 여긴 에테르 농도가 높아서 안 된다는 거."

"그래도 툴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더구나 생활 도구와 식량이 넘치는 도시라면 충분히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다가 틸터까지 적이 될 수도 있는데?"

"적은 무슨. 어차피 우리가 필요한 것은 덱터의 게이트 테멜이야. 데블 플레인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덱터와도 거래를 할 수 있지. 사실 서로 적대적으로 싸우는 것 보다는 데블 플레인 쪽으로 넘겨 버리고 잊어 버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 아닌가? 전에 자넷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틸터나 덱터나 따지고 보면 굳이 데블 플레인으로 넘어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지도 몰라. 서로 대립하면서 어떻게든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지."

세진은 이미 클리르의 틸터나 덱터들이 본래의 취지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데블 플레인으로 넘어간다고 틸터에게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몇 사람을 빼곤 모두가 클리르에서 태어난 이들인데 굳이 데블 플레인의 고향 행성이 그리울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덱터의 경우에도 고약한 적대 세력이 다른 행성으로 모두 떠나준다면 반겨야 할 상황인데 그것을 굳이 막으면서 서로 피를 보고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대립 관계는 어쩌면 기득권을 유지하고, 틸터와 덱터라는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명목상의 명분 때문에 서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지. 자꾸만 우리 쪽에서 덱터를 건드리면 덱터도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틸터에그로메를 떠나면 덱터에서 우릴 노리지 않을까? 잡아 둔 그랜드 마스터들 때문에라도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 텐데?"

"상황을 봐서 잡아 놓은 마스터들 중에서 한 둘, 정도는 전령을 보내지 뭐. 우리 요구를 알리고, 인질과 교환 조건으로 우리 두 사람만 게이트를 지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 아, 그 사람들을 그렇게 쓸 수도 있겠네요. 정말 인질 교환으로 그 요구를 들어주면 좋겠어요.

"그래. 그렇지.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나저나 이야기가 횡설수설 정리가 안 되는 것 같군. 일단 덱터와 포로를 가지고 거래를 해 보는 거야. 반응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그러면서 프랜드에그로메를 세우는 것도 생각을 해 봐야지. 하지만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 틸터에그로메를 떠나는 거야. 여기 더 있어봐야 얻을 것은 없을 것 같으니까."

세진은 그렇게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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