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리르 행성에서 발이 묶이다 -- >
어리가 있었으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오고갈 수 있다.
또 그러한 이동에 익숙한 세진과 자넷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 행성에서 그 이동의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기껏 30미터 내를 이동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번, 목숨을 구할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불편함이 이루 말할 바가 없을 정도다.
몸이 지치지는 않지만 정신이 먼저 지친다. 쉬지 않고 숲을 헤치며 걷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까 저 코제크가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디퀴피드라는 감지 장치의 신호를 받아서 주변의 테멜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란 건가?"
"거기다가 테멜에 큰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신호를 주기도 합니다. 새로 그런 기능을 추가한 물건이지요."
"대단하군. 그런데 어떻게 만든 거지?"
"사실은 덱터의 기술을 훔친 것입니다. 그들도 그렇지만 우리도 덱터에 정보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서 알 것은 거의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나 덱터나 이 행성의 원주민들을 완벽하게 갈라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응? 마을 사이의 교류가 원활한가?"
"아, 여긴 테멜이 있는 곳이 아니면 대체로 몬스터의 등급이 낮습니다. 빨간색에서 초록색 정도까지 출몰을 하고, 파란색 이상은 덱터와 우리들 틸터가 관리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덱터와 틸터들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도 그런 몬스터를 막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테멜 발생 지역을 관리하면서 위험한 몬스터도 막고 있는 거로군."
"하여간 이번에 덱터 놈들의 마스터를 일곱이나 처리했으니 그 쪽에서도 바짝 약이 올랐을 겁니다."
"정확하게는 마스터 열셋에 그랜드 마스터 둘이네."
"네?"
빈엘르가 세진이 한 말을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스터 열셋과 그랜드 마스터 둘이 왔었다고 했네. 그리고 그들은 하나도 돌아가지 못했고."
"그, 그게 정말입니까?!"
빈엘르가 비명같은 고함을 질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앞서가던 일행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세진과 빈엘르에게 꽂혀 있었다.
"조, 조장님. 세진님과 자넷님이 처치한 덱터 놈들이 일곱이 전부가 아니랍니다. 거, 거기에 마스터 여섯과 그랜드 마스터 둘이 더 있었답니다. 그들 모두가 주, 죽었습니다."
세진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고쳐주고 싶었지만 그냥 뒀다. 어차피 그들은 다시 어리 테멜 밖으로 나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죽은 것으로 해도 별 상관은 없는 일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일곱 틸터를 이끌고 있는 조장, 디퀴리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는 세진과 자넷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맞아요. 우리를 공격했던 이들은 마스터가 열셋에 그랜드 마스터 초급과 중급사이 둘이었어요."
"모, 모두 죽인 겁니까?"
"맞아요. 그들 중에서 도망간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남은 시체가 일곱밖에 없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굳이 그것까지 알려드릴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열다섯 명이 공격을 했고, 우리는 그들 모두를 제압했어요."
자넷은 죽였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일곱 틸터들이 듣기에 자넷의 말은 죽였다는 말과 같았다. 시체가 보이진 않았지만 모두 제압을 했는데 여덟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라졌다는 말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후로 틸터들이 세진과 자넷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졌다.
이전에도 이미 자신들과 동급의 덱터 한 조를 전멸시킨 것을 확인하고 조심조심 하고 있었는데 확인은 못했지만 그랜드 마스터 둘이 포함된 열다섯 명의 덱터를 전멸시켰다면 그건 상황이 전혀 달랐다.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자칫해서 틸터들과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빌미를 자신들이 제공한다면 이후에 어떤 질책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세진과 자넷은 제법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 행성의 이름은 뭐라고 부르지?"
"아, 이곳은 클리르 행성입니다. 이곳 선주민들의 언어로 지나가는 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원래 선주민들은 행성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테니, 그들에게 행성의 이름을 알려준 사람들은 분명 테멜 게이트 여행자였을 겁니다. 행성의 개념과 더해서 이름을 지어줬을 테고, 그래서 그 이름이 클리르가 된 거라고들 합니다."
빈엘르는 최대한 세진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려고 했다.
"원주민이란 단어보다 선주민이란 단어를 쓰나?"
"아, 모르셨군요? 데블 플레인 연합이 생길 때부터 그랬습니다. 원주민이란 단어가 행성에 원래 있던 주민이란 의미지만 워낙 그 단어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아서 원주민 대신에 선주민. 즉 먼저 있었던 사람들이란 의미의 단어를 쓰게 된 거지요. 원래부터 먼저 있었던 이들과 그 후에 그 행성으로 가게 된 사람들을 구별하는 의미도 있어서 선주민이라 한 겁니다. 선주민에는 적어도 먼저냐 나중이냐의 의미는 있지만 미개하다거나 하는 의미는 없으니까요."
"확실히 듣고 있으니 틸터가 데블 플레인 연합의 갈래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네요. 원주민과 선주민을 그렇게 나누어서 구별하는 것은 지금의 데블 플레인 연합에 선 별 의미가 없어서 따로 따지는 경우가 없는데 여기선 아직도 원주민과 선주민을 구별하고 있으니 말이죠. 확실히 오래 교류를 못한 티가 역력하네요."
자넷이 빈엘르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조금 걸음을 늦춰서 세진 곁으로 붙으면서 말했다.
이전까지는 조장인 디퀴리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니 이젠 대충 이야기가 끝난 모양인지 세진의 곁으로 온 것이다.
자넷은 빈엘르의 말에서 틸터라는 집단이 데블 플레인 연합과 관계가 깊은 집단이란 확신을 얻었다. 선주민과 원주민을 구별하는 세심함까지 계산해서 자신들을 속일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틸터 소속의 일곱명이 보이는 신체적인 반응을 미루어 봐도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소한 것에서 확신을 얻게 되니 일면 마음이 편해지는 자넷이었다.
"지도를 얻을 수 있나? 이곳 클리르 행성의 지도 말이야. 될 수 있으면 덱터와 틸터의 영역 구별이 확실하게 되어 있는 지도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건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조장님도 그걸 결정할 권한은 없고 요. 가서 상부에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
빌엘르는 세진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그렇겠지. 참, 그런데 덱터라고 했지? 그들도 툴틱을 가지고 있나?"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긴 것이 몇 있기는 하지만 그걸 쓸 수는 없습니다. 소유자가 정상적으로 양도를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덱터 쪽에는 아직 연방 수준의 과학 기술을 보유한 행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몇 가지의 도구들을 그들은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래."
세진은 빈엘르의 말을 들으면서 어리를 이용해서 툴틱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툴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헌터룸의 관리를 받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전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지님. 헌터룸의 신호도 20km 밖으로는 쓰지 못합니다. 헌터룸을 테멜 밖으로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툴틱으로 클리르 행성 전체 를 아우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어리가 세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세진의 뇌리에만 들리는 소리로 이야기를 전했다.
'기지국 세우면 되잖아.'
[기지국이라니요? 설마 20km 마다 전봇대라도 세우실 생각이세요?]
'어려울까?'
[제가 그것들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이 행성 전체에 설치를 하실 건데요?]
'그런 문제가 있구나? 우리 어리가 꼼짝을 못하게 되니까 확실히 불편하긴 하네.'
[디퀴피드라고 하는 그걸 박살을 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마 그게 없다면 순간이동 능력이 되살아날 겁니다.]'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덱터 쪽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했지? 언제 확실하게 그 구조를 한 번 파악을 해 보자.'
[제 감지 범위가 30미터 정도로 좁아져서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세진님.]
'힘 내라. 이제 덱턴가 뭔가 하는 놈들에게서 데블 플레인으로 넘어가는 게이트 테멜만 찾으면 되는 거 아니냐. 이전에 비하면 굉장히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거잖냐.'
[그렇기는 하지만, 어째 갈 길이 험할 거 같아요. 어리는 앞이 깜깜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어리와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자넷이 다가와서 세진의 정신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순간 세진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을 감지했다.
드디어 틸터와 선주민들이 어울려 산다는 마을에 도착을 한 것이다.
마을에 도착한 이후로는 이동이 편해진 것 같았다.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바퀴가 달린 탈것을 타고 간다는 것은 지루함만 참으면 힘들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진과 자넷은 그 지루함을 며칠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리에게 부탁해서 탈 것을 제작했다.
가늘인들이 사용하는 특수 금속인 파리티크를 이용해서 만든 탈 것은 꼭 눈썰매의 모습을 닮았다. 세 칸으로 이루어진 좌석의 앞쪽에는 세진과 자넷이 타고, 뒤에 두 칸에는 디퀴리를 비롯한 틸터 소속 마스터 일곱이 자리를 잡았다.
그 후에는 길을 따라서 날아가면 그만이었다.
"이런 걸 어떻게 들고 다니는 거죠? 테멜인가요? 하지만 테멜이라면 우리들이 모를 수가 없는데요? 디퀴피드의 감지 범위를 벗어난 테멜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전히 빈엘르는 세진에게 친근감을 표현하고 가까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특별한 테멜도 있는 법이지. 우리 부부의 짐은 그 안에 모두 들어 있지. 물론 짐 뿐만은 아니지만, 그것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겠지."
"우와, 대단해요. 정말 테멜인 거예요? 그럼 설마 그 안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 건가 요? 그래서 전에 덱터 놈들을 그렇게 물리칠 수 있었던 건가요? 그렇군요. 정말 몰랐습니다."
빈엘르는 이전에 처리한 그랜드 마스터가 포함된 덱터 무리를 세진과 자넷 둘이 아니라 테멜 안에 있는 조력자와 함께 처리한 것으로 확정지어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이렇게 날아가는 거죠?"
빈엘르는 다시 파르티크 비행썰매에 관심을 보였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면 무기를 의지로 다루지.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것은 이동에만 특화되게 만들어진 것이라 힘이 덜 들지. 거기다가 나하고 자넷이 번갈아서 조종을 하면 얼마든지 이런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다. 혼자라면 무리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둘인까."
"그러니까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건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 어느 정도 훈련을 하면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어도 가능할 사람들이 있을 거다. 물론 그건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일이어서 확언을 할 수는 없군."
"그렇군요. 우와 그럼 저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시험을 해 봐야 하지만 이동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 그리고 쉽게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실 이곳 클리르에서 몇 번 게이트를 통과하면 갈 수 있는 행성의 원주민, 아니 선주민들의 고유 능력인데 그 행성인이 아니면 배우기가 어려운 것 같더군."
"그런데 세진님과 자넷님은 익숙하게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랜드 마스터가 되면 비슷한 방식으로 무기를 사용하지. 의지로 사용하는 형태. 그래서 그들의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거라고 해야겠지."
"그런 거군요. 그럼 저도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랜드 마스터가 되면..."
세진은 그래도 파르티크를 써서 도구를 제작해야 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빈엘르가 정말로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그 때까지도 인연이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 때 상황을 봐서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