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난을 당하다 -- >
세진은 허탈한 마음으로 돌바닥에 앉아 있고, 그 곁에는 자넷이 우두커니 지키고 서 있다.
- 세진님, 정신 차리세요.
"그래. 세진.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
"그래. 되긴 하겠지. 지금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야. 어이가."
세진은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세진이 있는 곳은 이름도 알 수 없는 행성이다. 가늘인 행성에서 게이트 이용자들이 남기 기록들을 모아서 살핀 끝에 결국 세진과 자넷, 어리는 게이트를 지키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확하게는 게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지침을 내리고 때에 따라서는 게 이트를 찾아서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최우선 과제는 다른 행성의 왕성한 에테르가 인류가 살아 있는 행성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일인지 데블 플레인 연합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인식이 나빴다. 그들은 데블 플레인 연합이 원주민을 착취하는 못 된 세력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대한 그 세력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 노력의 일환이 데블 플레인 연합과 통하는 테멜 게이트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정보를 얻은 세진은 곧바로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통하는 테멜 게이트가 열릴 가능성이 높은 행성으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사실 테멜 게이트가 굉장히 무질서하게 열리는 것 같지만 수많은 게이트가 얽힌 모습을 잘 살피면 그 안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종의 행성군으로 묶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성군은 특별한 하나 혹은 두 개의 행성에서 다른 행성군으로 넘어가는 테멜 게이트가 있었다. 그 나머지 테멜 게이트는 그 행성군에 속한 행성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게이트가 열리는 것이다.
세진은 그래서 행성군 사이의 통로가 되는 행성은 길목 행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관문 행성이라고 했다가, 자넷이
'관문이나 게이트나 그 말이 그 말인데? 그거 번역해서 다른 언어가 될 때에는 비슷해서 듣는 사람이 헷갈릴 거야. 고유 명사라고 해도 간혹 뜻대로 통역하는 경우가 있다고.'
라고 하는 바람에 길목 행성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어쨌건 그런 길목 행성들이 수십 개의 행성들을 묶은 행성군을 나누고 있었고, 그런 중에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잘 열린다는 행성군이 있고, 완전히 에테르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행성으로 가는 게이트가 잘 열리는 행성군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세진이 길목 행성이라고 부르는 행성이라면 당연히 높은 확률로 데블 플레인으로 가는 테멜 게이트가 생기곤 할 것이다.
그래서 세진과 자넷은 가늘인 행성을 뒤로 하고 급하게 테멜 게이트를 돌파해서 결 국 데블 플레인으로 가는 길목 행성까지 내달렸다.
그 사이에 지나친 행성의 수가 자그마치 열아홉 곳이었지만 세진과 자넷은 그 행성들에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거 테멜 게이트를 찾아서 움직였을 뿐이다.
중간에 한 곳의 게이트가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에 우회를 하느라 게이트를 세 번을 더 지나야 했지만 어쨌거나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이곳 길목 행성에 도착해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길목 행성에 도착한 순간 어리의 순간 이동에 제약이 생겼다.
어리는 테멜 안에서 순간 이동이 수십 미터밖에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것도 연속으로 순간 이동을 하지도 못했다. 거의 1초 이상의 딜레이가 있었고, 그 정도면 파란색 등급의 몬스터라도 어렵지 않게 어리 앵무를 쫓아와서 박살을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세진과 자넷이 도착한 테멜은 보라색 등급의 테멜.
세진과 자넷은 정말 오랜만에 화끈하게 싸워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싸우다 보니 결국 부족 코어를 지니고 있는 몬스터까지 사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족 코어의 몬스터는 불행하게도 테멜 코어의 역할도 함께 하는 녀석이었으니 테멜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순간 이동이 되지 않는 이유가 어리 너의 감지 범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란 말이지?"
- 네. 세진님. 굉장히 강력한 방해가 있어요. 제가 사용하는 형태와 비슷한 감지 에너지가 행성 전체, 심지어는 테멜 안쪽까지 퍼져 있는 거죠. 그래서 제 감지 능력을 쓸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문제?"
- 제가 부리는 몬스터도 제 감지 범위 밖으로 나가면 통제가 안 된다는 거죠. 그나마 의체 사용자들은 헌터룸의 힘으로 범위가 넓어지긴 하겠네요. 그래도 반경 20km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어리 테멜 안에서는?"
- 그건 문제없어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감지도 저를 뚫을 수는 없어요. 제 감지 범위 안쪽으론 못 들어와요. 그래봐야 30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지만요.
"그래. 순간이동도 딱 그 정도가 한계지? 거기다가 1초 정도 딜레이도 생겼고?"
- 이전에도 약간의 딜레이는 있었어요. 여기서 좀 더 길어진 거지만요.
어리가 항변을 하지만 그래봐야 의미가 없다.
"세진, 우리 돌아가야 할까? 다른 행성으로 가서 데블 플레인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찾아 보는 것도 한 방법이잖아. 어리가 테멜 게이트 복사해 둔 것이 있으니까 다른 행성으로 가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 저기 자넷 언니. 그거 좀 어려운데요?
"뭐가? 설마 복제한 테멜 게이트를 못쓴다는 것은 아니곘지?"
자넷이 살짝 인상을 썼다.
- 제 안에서, 그러니까 테멜 안에서는 문제 없이 쓸 수 있지만요. 밖에서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에테르의 성질을 제가 조절을 해야 하는데 여기는 그게 힘들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행성으로 가려면 테멜 안에서만 가야 한다는 거네? 결국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갈 수 있어도 어리 너, 네 본체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지?"
세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리의 본체는 사실 크게 의미가 없다. 다만 어리 테멜에서 밖으로 나오는 좌표가 어디에 설정이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어리 앵무 안에 있는 목걸이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어리 테멜의 코어에게 외부의 좌표를 알리는 역할. 그래서 그 목걸이에 문제가 생기면 어리 테멜의 코어는 제일 마지막에 전달된 좌표로 다시 입구를 열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리 테멜 안에서 좌표를 멋대로 바꿀 수가 없으니 결국 테멜 밖에서 좌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물을 이동시키는 것이 어리가 이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복제 테멜 게이트를 밖에서 열 수 없다면 어리가 이 행성을 벗어날 방법은 다른 테멜 게이트를 찾는 방법 밖에 없다.
"미치겠네."
세진이 신경질을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자넷도 뭔가 느낀 듯이 한쪽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 원주민들인 것 같다."
세진도 긴장하며 말했다.
다가오는 이들의 기세가 제법 강했다.
마스터 이하는 없고, 그랜드 마스터도 둘이나 끼어 있는 무리였다.
"열다섯? 맞아?"
"맞아. 열다섯 중에서 둘이 그랜드 마스터야. 나머진 마스터고."
"굉장한 전력인데?"
"어째 이 행성, 만만찮은 곳일 것 같네. 조심해야겠어. 우리가 데블 플레인으로 가려고 한다는 건 당연히 숨겨야겠지?"
"당연하지. 우린 그냥 운 없는 테멜 게이트 여행자인 거야."
"그래. 그래야지."
세진과 자넷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다시에 드디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레 세진과 자넷이 있던 곳은 제법 넓은 공터였고, 거기에 테멜의 입구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세진과 자넷이 테멜 코어인 몬스터를 잡아 버리는 바람에 테멜이 붕괴되고 만 것이다.
테멜이 붕괴된 후 세진과 자넷은 공터의 중앙에 나타났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상황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세진과 자넷을 향해 다가온 이들은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무리를 지어서 공터로 들어섰다.
세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고, 세진 곁에는 자넷이 함께 그들을 노려보 고 있었다.
첫 만남이라 무기를 뽑아 들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공격을 할 준비는 마쳤고, 지금도 세진과 자넷의 디버프 기반 에테르는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진과 자넷, 그리고 새로 나타난 무리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역시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섞여 있어. 헌터들과 비슷하군. 응? 저건?'
세진은 그들을 살피다가 슬쩍 자신의 왼쪽 팔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팔에 차고 있던 툴틱이 모습을 감추었다. 어리가 세진의 뜻을 알아차리고 툴틱을 테멜로 넣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진의 행동을 알아차린 자넷 역시 슬쩍 등 뒤로 툴틱을 옮겼고 어리에 의해서 테멜로 사라졌다.
어차피 원거리 통신도 되지 않는 물건이지만 개인용 컴퓨터로는 최고의 성능을 가진 물건이라 통역이나 번역에서 요긴하게 썼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이곳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세진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앞에 있는 열다섯 중에서 한 명의 장식처럼 툴틱을 손목에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용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툴틱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이 전리품이 된다면 툴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툴틱을 등 뒤로 해서 어리에게 숨기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진과 자넷의 행동은 이미 앞에 있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정확하게 뭔지 몰라도 등 뒤로 숨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리야 팔찌, 아무거나 팔찌를 만들어. 툴틱과 비슷하게 보이는 걸로.'
세진의 의지가 어리에게 전해지고 어리는 곧바로 세진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세진과 자넷의 손에는 팔찌가 하나씩 들려졌다. 그것은 앞에 있는 이들 중에서 한 사람이 팔에 차고 있는 툴틱과 비슷하게 생긴 팔찌였다. 무엇을 숨겼느냐고 하면, 팔찌를 숨겼다고 할 생각이었다.
왜냐고 물으면 비슷한 팔찌를 차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괜한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라고 할 핑계도 준비를 했다.
"우리 말을 알아 듣는가?"
"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자넷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세진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우주 연방의 공용어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당신은 연방 사람인가요?"
자넷이 나서서 대화를 시작했다.
저쪽에서 말을 건 것도 두 명의 그랜드 마스터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렇군. 연방의 말을 알아. 그렇다면 너희는 연방 사람인가?"
자넷은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연방에 속한 사람이고, 내 남편은 아니에요.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 연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선가?"
자넷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대답을 했다.
"맞아요.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우리 남편은 그런 나를 돕고 있죠. 데블 플레인으로 건너가서 연방으로 갈 생각이에요."
"이곳에 데블 플레인으로 갈 수 있는 테멜 게이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몰랐어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알고 찾아 왔죠. 아주 먼 길을 찾아 온 거예요. 그러니 나와 내 남편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너희 둘이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나?"
"충분히!"
자넷은 호기롭게 외쳤다. 그랜드 마스터 둘에 마스터 열셋,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그리고 그 내용은 어리를 통해서 세진에게 모두 통역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공터에 싸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