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치다트에 남은 떠돌이의 흔적 -- >
프로타고가 파르티크를 풀어서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경쟁자들이 몰랐다면 치다트의 권력 쟁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대를 이어서 싸움을 벌여 온 네 세력에는 어김없이 첩자나 정보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프로타고이 파르티크가 세진의 손에서 나온 것이란 사실까지 자세히 알렸다.
그 이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파르티크를 확보하기 위해서 떠돌이들의 기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세진을 찾아왔다.
그들은 프로타고처럼 신분을 숨기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은밀하게 찾아와서 거래를 청하기도 했다.
세진은 그런 은밀한 거래를 좋아했는데, 정말 알짜 정보가 그들을 통해서 세진에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진과 같은 떠돌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치다트의 유지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 었다.
그들은 세진이 찾는 기록이란 것이 일종의 지도임을 알고 있었다.
즉, 이전에 떠돌이들이 지나갔던 테멜 게이트의 지도, 게이트와 게이트가 연결되는 순서. 각 행성에서 게이트가 있는 위치 같은 것들이 세진에게 의미가 있는 기록이란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들은 유지들에게도 꽤나 쓸모가 있었다.
그들 또한 부(富)를 손에 넣기 위해서 다른 행성과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
가늘인 행성에서 나지 않는 산물들을 가지고 와서 몇 곱의 이익을 남기고 파는 것은 사실상 이들 가문들의 주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각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게이트 이동 경로는 외부에 알릴 수 없는 귀한 정보였다.
하지만 세진은 떠돌이.
떠돌이에게 게이트 정보를 알리는 것은 가문에 피해가 갈 일이 별로 없다. 떠돌이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진이 정말 필요했던 정보들이 하나씩 쌓였고, 파르티크가 나갔다.
파르티크는 곧 용병들이 되어서 각 세력의 힘을 부풀렸고, 치다트 여기저기서 사소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 일도 못하게 될 텐데 말이야."
"아직도 더 필요해? 요즘 들어오는 것들은 거의가 중복된 내용들이잖아. 이 행성에서 네 게이트 까지는 거의 다른 정보는 없는 것 같은데?"
한 게이트는 게이트를 한 번 건너서 갈 수 있는 행성이고, 두 게이트는 게이트를 두 번 타고 갈 수 있는 행성이다.
지금까지 가늘인 행성에서 파악된 테멜 게이트의 수는 모두 여섯, 그 중에서 세진과 자넷이 왔던 괴수 영역의 게이트 정보는 없었다.
그러니 그것까지 일곱 개의 게이트가 있다. 여기서 각 게이트를 타고 가면 일곱 개의 행성을 찾게 되고, 그 일고 행성에서 다시 한 번 게이트를 타게 되면 무시무시한 숫자의 행성을 갈 수 있다. 한 행성에 테멜 게이트가 네 개만 되어도 거의 서른 개의 행성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 그 서른 개의 행성에 테멜 게이트가 네 개가 있다면 백 개를 훌쩍 넘는 행성으로 가게 된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그 이동 경로와 이동 후에 도착하는 행성들의 특징을 살피면서 게이트 관계도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세 번의 게이트 이동까지는 거의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의 게이트 이동부터는 거의 오백 곳의 행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 이거는요. 이 행성이랑 같은 거 같아요오."
어리가 두 개의 행성 정보를 비교하며 세진과 자넷에게 내민다.
"음,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여기로 갈 수 있는 행성이 또 하나 더 늘어나는 거네?"
"최단 경로로 가면 이곳에서 게이트를 두 번 타면 되는 거고, 돌아서 가면 게이트를 네 번 타면 된다는 거지. 아, 세 번에 갈 수 있는 방법도 있나?"
"아니, 자넷 세 번에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이 행성에도 여기 이쪽에 게이트가 하나 더 있는 걸로 표시를 해 둬야 하는 거네?"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거의 이미 있는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도 가끔은 방금처럼 새로운 내용도 나오잖아. 그러니까 정리를 제대로 해 둬야 하는 거지."
"하지만 이 테멜 게이트 중에서 아직까지 무사히 남은 것이 몇이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세진."
자넷이 입체 공간에 수 많은 행성들과 그 행성들을 이어주는 게이트 표시를 보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테멜 게이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때론 테멜이 공략되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테멜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만드는 지도에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파악한 테멜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때 뿐이었다.
새로운 테멜은 전혀 다른 행성으로 일행을 데리고 갈 것이다.
"어리가 고생을 하게 생겼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세진님. 제가 왜 고생을 해요?"
"그야 앞으로 새로 지나갈 게이트들을 모두 복제해서 보관을 해 둬야 할 테니까 말이다."
"흐응, 만드는 건 어리가 해도, 그거 관리는 다른 녀석에게 맡길 것이에요. 오션 그 녀석이 덩치만 크고 하는 일은 없으니까 바다에 섬 하나를 만들어서 그곳에 복제 게이트를 쌓아 두고 각 게이트마다 필요한 에테르 성질을 기억하게 할 거예요. 게이트 관계도도 외우라고 하고요."
"그거야 어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겠지. 하지만 게이트들 하나씩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니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요즘은 외부에서 코어를 들여오는 일도 별로 없잖아."
세진의 걱정은 어리가 사용하는 에테르의 확보였다.
물론 어리는 스스로 외부에서 에테르를 끌어들여서 코어를 충전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흡수 능력으로는 한번씩 막대한 소비를 하는 에테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냥을 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코어를 확보해서 테멜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보충을 해 줘야 하는 것이다.
"괜찮아요. 어리는 알아서도 잘 해요."
그런데 어리가 의외의 말로 세진과 자넷을 놀라게 만들었다.
코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어리가 괜찮다는 말을 한다.
당연히 세진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어리를 쳐다보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털어 놔라."
"세진님은 왜 그런 눈으로 어리를 보시는 거예요?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두 분이 치다트에서 떠돌이의 기록으로 모으실 때에 어리도 다른 마을과 도시들을 살펴 보겠다고요."
"그래. 그랬는데?"
"그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까 떠돌이 기록도 있지만 힘돌들도 무지무지 많더라구요. 다 처리도 못하면서 힘돌을 가득 쌓아둔 마을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어리가 약간 수고를 덜어 줬어요. 그 사람들 그걸 전부 정화하려면 힘들 거잖아요."
"한마디로 훔쳤다는 거냐?"
"상부상조 하는 거죠. 어차피 가늘인들도 그걸 정화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어리가 나서서 그것들을 이 행성에서 완전히 없애주는 것도 좋은 일이죠. 안 그래요?"
"휴우, 그래서 얼마나 챙긴 거냐?"
세진은 이제와서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또 어리의 행동이 이곳 가늘인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가늘인들이 에테르 코어를 정화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큰 이익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정화를 함으로서 가늘인 행성의 몬스터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처치 곤란으로 쌓여 있는 힘돌, 즉 에테르 코어를 어느 정도 수거해서 처리해 주는 것이 가늘인들에게 해가 될 일은 없는 것이다.
"어리의 녹두병사들을 모두 복구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시간만 있다면요."
세진의 어리의 말을 듣고 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니까 녹두병사를 복구하고 조금 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조금 더요."
세진은 굳이 조금 더의 숫자가 얼만지는 묻지 않았다.
에테르 욕심이 과할 정도로 많은 어리가 당분간은 괜찮다고 할 정도라면 이번에 슬쩍 한 에테르 코어의 양이 적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궁금하면 어리와 정신 연결을 해서 살펴보면 될 일이다.
"어? 이거 봐."
그런데 갑자기 자넷이 호들갑을 떨며 세진과 어리를 불렀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기록 하나를 펼쳐 놓았다.
그곳에서 꽤나 묘하게 생긴 문자가 적혀 있었지만 어리나 세진은 그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세진은 툴틱에서 자연스럽게 해 주는 것이고, 어리는 학습에 의한 것이었다.
"음, 어디가 문제야?"
세진이 물었고, 자넷이 손가락으로 한 줄의 글을 횡으로 쓸었다.
"우리들은 그들이 게이트를 이용하여 영역을 넓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이커 위아드의 세력과 연결되는 통로를 끊었고, 이후로도 그들과 연결되는 통로는 발견되는 즉시 파괴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바보아! 세이커 위아드가 바로 데블 플레인 연합을 결성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 이 말은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통하는 게이트들을 파괴하고 또 보이는 족 족 없앴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라고."
"뭐?"
세진은 자넷의 말에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언제 기록이야?"
세진은 급히 물었다.
"꽤나 오래 된 것 같아. 여기 세이커 위아드의 세력이란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적어도 몇 백 년은 된 거지. 세이커 위아드가 데블 플레인 연합의 일에서 손을 뗀 이후로는 데블 플레인 연합을 두고 세이커의 세력이니 하는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뭐야? 초기부터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통하는 테멜 게이트를 단절시켰다는 이야기잖아?"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여기 있어."
자넷이 그 아래로 몇 줄 밑을 다시 손가락으로 그었다.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인간들이 살지 않는 행성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파괴하는 일에 더해서 세이커 위아드의 세력과 연결되는 게이트까지 찾아야 하는 부담이 생긴 것이다? 이건 뭐 딱 우리가 필요한 테멜 게이트를 작정하고 박살을 내고 다녔다는 거네?"
"여기 이런 글도 있어.
'게이트 이용자들은 몬스터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생성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발견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게이트를 파괴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가 생존하고 있는 쪽의 행성으로 유입되는 에테르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들은 인류의 안전을 위해서 완전히 에테르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행성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니까 우리도 그 곳으로 통하는 테멜 게이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게이트 이용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게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이런 기록은 처음이잖아. 그럼 이후로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찾은 정보들을 봐도 알 수 있잖아. 데블 플레인 연합이라고 생각되는 행성도 없고, 필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행성도 없어. 그런 곳으로 통하는 테멜 게이트는 모두 파괴가 된 거야."
자넷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흠? 여기 이건 어때?"
세진이 자넷이 펼쳐 놓았던 가죽에 적힌 글들 중에서 한 줄을 가리켰다.
"때문에 우리는 두 곳으로 나뉘어서 활동을 해야 했다는 내용이네요? 이게 어때서요? 세진님?"
어리가 세진이 가리킨 곳을 읽으면서 물었다.
"두 곳으로 나뉘어서 활동을 했다는 소리가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어."
세진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면서 말했다.
"데블 플레인 연합과 연결되는 게이트가 등장하는 곳, 그리고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행성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등장하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일정한 지역, 그러니까 행성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란 소리지. 그러니까 이들이 나뉘어서 활동을 하게 된 거 아니겠어?"
"맞아. 그렇구나?"
"그런 것이군요. 역시 세진님!"
"그럼 이제 그런 곳이 어디였는지를 알아 내야 하는 거네?"
"그렇지. 조금 더 기록들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어. 이젠 지도 보다는 그런 소소한 내용들도 놓치지 말고 봐야 해. 우리가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면 연합이나 필드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니까 말이야."
엉뚱한 기록 하나가 세진과 자넷, 어리에게 활력을 불어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