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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노트-211화 (211/298)
  • < -- 또 다른 떠돌이 -- >

    "내려갑시다."

    세진은 탈것을 조종하는 가늘인에게 길 위로 내려 설 것을 부탁했고, 데리고 왔던 곳으로 데려다 주려던 이들은 세진과 자넷을 프로타고의 집 앞, 길에 세진과 자넷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이 주인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이들과 세진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겠지만 상황이 불리하니 세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기다린 것 같은데 이유를 들어볼까요?"

    세진은 탈것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따라 내려온 가늘인들에게 말했다.

    세진이 생각했던 대로 가늘인들은 따로 도구가 없이도 허공에 떠 있을 수 있고, 또 이동도 할 수 있었다.

    세진은 시선은 날카롭게 가늘인들이 입은 옷을 살피고 있었다. 신발과 바지, 상의는 물론이고 팔찌를 비롯한 악세사리와 옷 여기 저기 박혀 있는 금속 판들.

    세진은 그것들이 가늘인들이 허공에 떠 있을 수 있게 하는 받침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체중을 분산해서 띄워 주기에 적절한 위치에 금속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발의 밑창은 확실하게 금속판을 중간에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한 걸음 늦었습니다. 우리 역시 프로타고님과 같은 용건이 있어서 게이트 방문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세 무리의 가늘인 중에서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가늘인이 나서서 모두를 대표해서 세진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프로타고씨는 우리 부부에게 원조를 부탁했고,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가부를 결정하기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곳 치다트에 처음 왔고, 이곳 사정을 알지 못하니 어느 누구를 지원하는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쪽에서 할 이야기가 프로타고씨와 다르지 않다면 우리 부부의 대답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세진은 결정을 유보했다는 입장을 전했고,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란 뜻도 분명하게 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우리들은 혹시나 방문객께서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나 않을까 무척 우려했습니다."

    "우려? 그래서 앞으로 막았다는 겁니까? 그건 더 나쁘군요. 만약 우리가 프로타고씨에게 협조하기로 했다면 당신들이 힘을 모아서 우리 부부를 해코지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니 말입니다."

    세진은 슬쩍 기세를 끌어 올렸다.

    에테르가 매섭게 일어나며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세 무리의 가늘인들이 다급한 표정을 짓는다. 성격이 급한 가늘인은 벌써 무기들을 주변에 띄워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곧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고 무기를 다시 등으로 옮긴다.

    아직 세진과 자넷이 적이 된 상황은 아닌데 자칫 실수를 해서 적으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짐 못합니다. 강력한 적이 등장하면 다른 약자들이 힘을 모아서 대항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방문자께서 현명하게도 시간을 두고 결정을 하겠다고 하시니 저희로선 고마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치다트와 피노나에 유익한 결론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오랜만에 따뜻한 침대에서 쉬고 싶군요."

    세진은 오랜 여행을 한 여행자처럼 엄살을 피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언을 드리자면, 치다트의 서쪽 성벽 가까운 곳에 게이트 여행자가 있습니다. 치다트에 온 것이 제법 된 사람이니 그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치다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두 방문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 무리의 대표로 이야기를 하던 가늘인이 세진과 자넷에게 서쪽 성벽에 있다는 게이트 여행자를 소개하자 다른 두 무리의 가늘인들이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세진은 그 게이트 여행자가 지금 소개를 해 준 가늘인의 상관과 가까운 사이일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푹 쉬고 난 다음에 생각할 문제군요. 그럼 우리는 이만."

    세진은 자넷과 함께 지금까지 둘을 기다리고 있던 프로타고의 탈것에 올랐다.

    이번에는 세 무리의 가늘인들이 세진과 자넷의 앞을 막지 않았다.

    "실력들이 고만고만해. 마스터급 실력자가 지금까지 여섯 쯤 본 것 같은데, 프로타고는 마스터 상급 정도 되는 것 같고."

    "응. 그랜드 마스터는 없는 것 같지?"

    "기운을 숨기고 있다면 모르지만 치다트에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저쪽이지? 서쪽이."

    세진이 치다트 시의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런데 별로 대단한 기운은 없는데?"

    "그러게. 우리 정도 되는 실력이라도 쉽게 우리의 감각을 피하긴 어려울 텐데 말이지."

    "일단 쉬었다가 내일 가서 만나 봐. 어차피 테멜 게이트 떠돌이라면 같은 떠돌이끼 리 인사는 해야지. 그리고 서로 교환을 할 수 있으면 하고 말이야."

    "그렇지. 뭣보다 테멜 게이트의 위치를 아는 것은 꼭 필요하지. 서로 교환을 하더라도 말이지."

    "호홋, 아마 교환을 해도 저쪽 위치를 먼저 들어야 할 거야. 만약 우리가 위치를 먼저 말하면 거기 괴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 필요 없는 정보라고 할 테니까 말이야."

    "그런가?"

    "그럼 세진 같으면 안 그렇겠어?"

    "하긴."

    세진과 자넷은 한국어로 그런 대화를 하며 치다트의 상업 지구까지 가서 그곳에서 여관을 잡았다.

    치다트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단연코 특수금속이 제일이었다. 그것의 양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데 주로 무게 단위가 화폐의 단위가 되는 것도 그 이유였다.

    가늘인의 무게 단위는 데시나였고, 줄여서 데시라고 했다. 그러니 1데시가 최소 단위고 그 위로 숫자를 늘려서 액수가 정해지는 것이다.

    고급 여관의 숙박비는 200데시나 정도였고, 그 액수면 쓸 만한 단검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무게였다.

    물론 파르티크 이외에 다른 금속을 많이 사용하고 거기에 파르티크 200데시를 넣는다는 말이다. 가늘인의 데시는 세진이 알고 있는 무게로는 그램 정도가 가장 비슷한 단위일 것이다. 어쨌거나 가늘인은 파르티크가 어디에 있건 얼마나 되는 양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러니 어떤 형태가 되었건 파르티크가 들어 있는 금속 조각이 있으면 화폐로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파르티크로만 이루어진 금속괴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세진이 지불한 2000데시나의 금속괴는 여관 주인의 호감을 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세진과 자넷은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와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냥 테멜에서 자는 것이 좋지 않아?"

    물론 자넷은 그래도 테멜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세진과 자넷은 아침을 먹고 나서 곧바로 여관을 나서서 치다트를 구경하면서 서쪽에 있다는 떠돌이를 찾아 움직였다.

    아침을 먹고 나온 탓에 너무 일찍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서 이리저리 치다트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다내다 몇 사람의 가늘인에게 물어서 확인을 해 둔 떠돌이의 집 문을 두드렸다.

    예상보다 떠돌이가 살고 있다는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치다트의 중산층 정도가 될까 싶은 규모의 집이어서 세진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살아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누구시죠?"

    문 안에서 들린 목소리는 의외로 여자의 목소리였다.

    "테멜 게이트를 넘어 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우리 부부 역시 얼마 전에 게이트를 넘어 온 사람들입니다."

    "어머나, 잠시만요."

    세진의 대답에 문 안에서 깜짝 놀란 음성이 들리더니 문에 걸린 빗장을 푸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세진은 못해도 세 개 이상의 빗장이 현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안쪽에는 가늘인과는 전혀 다른 인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세진, 여긴 내 아내인 자넷입니다."

    "네에. 저는 마르시나라고 해요.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마르시나는 세진과 자넷을 거침없이 집 안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무척 흥분해 있는 모습이었다.

    "앉으세요. 아, 차를 드릴까요? 사실 드릴 게 그것 밖에 없긴 하지만요."

    "고마워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우린 마르시나 양과 대화를 하길 원하는 거지 대접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요."

    자넷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르시나의 집에 있는 가구들은 세진이나 자넷이 사용하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적당한 것들이었다.

    "네에. 그럼."

    마르시나는 부엌에서 찻잔과 주전자를 들고와서 탁자 위에 놓고는 세진과 자넷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진은 마르시나가 예전 라훌 행성의 헌터들 사이에서 몇 번 봤던 수인족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털이 많은 얼굴에 약간 긴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에도 털이 조복했다.

    "세진, 내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자넷이 세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상이 여자니 자신이 나서겠다는 뜻이고 세진은 그걸 말릴 이유가 없었다.

    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넷은 마르시나라는 여자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가워요. 나는 자넷이에요. 우린 서로 궁금한 것이 많을 거예요. 그러니 서로 번갈아가며 질문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괜찮겠어요?"

    "네. 네. 좋아요. 저는."

    자넷의 말에 마르시나는 맹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게요. 혹시 우주 연방이라고 알아요? 데블 플레인 연합이나."

    "알아요. 우주 연방도 알고 데블 플레인 연합도 알아요."

    "좋아요. 그럼 마르시나가 질문을 해요."

    "음... 그러니까. 뭘 물어야 하죠? 너무 많은데 정리가 안되요."

    마르시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넷은 묵묵하게 그런 마르시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혼란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후룩. 세진은 마르시나의 차가 의외로 입맛에 맞는다는 것이 기꺼웠다.

    '둥글레 맛이 나는데?'

    세진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에, 그러니까 저기."

    "말해요. 어려워하지 말고."

    "죄송해요. 질문이 아니라 부탁을 해도 되나요?"

    "부탁이요?"

    "저기 그러니까, 절 좀 데리고 가 주세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네에?"

    마르시나는 세진과 자넷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르시나는 테멜 게이트를 지나서 이곳 가늘인 행성, 아니 피노나 행성으로 온 것이 아니었나요?"

    자넷이 마르시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양쪽이 모두 흥분해서야 이야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게요. 일행들과 함께 왔는데요. 헤어졌어요."

    "헤어져요?"

    "그게 아니라, 흐흑, 절, 절 버리고 가버렸어요. 흐흐흑."

    "아니, 그게, 이봐요. 마르시나. 울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해 봐요. 네?"

    "그러니까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여행을 가자고 해서 따라 왔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테멜 안에 저를 버리고 다들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그 뒤로는 저 혼자,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테멜 게이트를 지나고 있는데요. 그런데 아무도 제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아는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벌써 20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두 명의 여행자를 만났지만 제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르시나는 자넷의 다정한 목소리에 안정을 찾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았다.

    "왜, 그들이 마르시나를 버리고 갔죠?"

    "아마도 부족을 이끌 후계자 문제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제 언니에게 제가 위협이 되었으니까 저를 버리기로 했을 거예요."

    자넷은 마르시나의 짧은 말에도 그 속을 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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