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10화 (210/298)

< -- 또 다른 떠돌이 -- >

세진은 확실히 어리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 넓은 가늘인 행성에서 세진과 자넷이 두 다리로 대도시를 찾아 움직였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런데 그 일을 어리는 단지 몇 시간 만에 해 냈다.

세진은 어리를 한껏 칭찬해 주고 다시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

어리는 곧바로 테멜로 들어가서 '쫑' 관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날개에 부리를 묻은 어리 앵무을 어깨에 올리고, 세진은 자넷과 함께 가늘인의 대도시에 입성했다.

신기한 것은 가늘인 대도시에 가늘인이 아닌 이들이 간혹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헌터들이 아닌가 했지만 역시 헌터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 가늘인 행성을 다녀간 떠돌이들이 남긴 후손들이라고 했다.

"꽤나 많은 떠돌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네? 봐봐 종족이 참 다양해."

"그러게. 내가 아는 종족도 있어."

"자넷, 표정이 무척 밝은데?"

"그거야 당연하지. 어쩌면 연방이나 데블 플레인으로 가는 길을 알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어째서?"

"그야, 떠돌이들, 그러니까 테멜 게이트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이들도 나름대로 우리처럼 지도를 만들고 그러지 않겠어? 우리도 우리가 지나온 행성들에 대해선 모두 알고 있잖아."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런 떠돌이들의 행성 이동 경로를 알아내서 데블 플레인으 로 복귀를 하자는 거야?"

"맞아. 바로 그거지."

"잘 되면 좋겠다."

세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론 어려울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당장 자신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테멜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진과 자넷은 가늘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두 사람은 아무리 대도시라고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가늘인 사이에 이질적인 생김새를 지닌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자주 접하던 이웃이 아니라면 당연히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세진과 자넷이 거처를 정하기도 전에 도시의 지배자로부터 초대가 들어왔다. 세진과 자넷은 심부름을 온 가늘인들이 가지고 온 탈 것을 타고 도시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이것도 꽤나 괜찮은 방법인데?"

"그러게. 우리도 이런 거 아나 만들자."

"그래야겠다. 아주 좋아."

자넷과 세진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탈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늘인의 염력으로 움직이는 탈것이었다. 바퀴도 없는 것이 허공에 뜬 상태로 움직이고, 염력의 수준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무척 비싸겠는데? 이런 정도의 크기로 만들려면 아마도 무기 백 개는 만들 재료를 써야 할 거야."

세진이 금속으로 골격을 만들고 나머지는 다른 재질로 채운 탈 것을 자세히 살폈다.

두 사람은 안쪽의 의자에 타고, 탈것의 네 방향에는 가늘인 네 명이 붙어 서서 탈것 을 움직이고 있는데, 세진이 보기에 그들이 힘을 합쳐서 탈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눈썰매 마차를 연상시키는 탈것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시 상공을 가로 질러서 날았다. 세진은 탈것을 보면서 이 가늘인 행성에서 이전에 알았던 특수 금속의 활용 방법은 지극히 낙후된 것임을 짐작했다.

"이거 갑옷 같은 걸 잘 만들기만 하면 이러 거 안 타고도 하늘을 날 수 있겠어. 에테르 소비도 거의 없이 말이야."

자넷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세진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한다.

"맞아. 나도 그 생각 했어. 무기만 염력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면 활용도가 무궁무진하겠어."

세진도 자넷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러는 사이에 탈것은 커다란 저택의 담을 넘어서 곧바로 정원이 있는 집의 현관 앞에 멈췄다. 여전히 탈 것은 조금 허공에 뜬 상태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탈것이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한 사람이 나와서 세진과 자넷을 맞이하다. 그 역시 가늘인이다. 세진과 자넷은 그 가늘인의 신분을 알 수 없지만 일단 탈것에서 내려서 그와 마주섰다.

"정중한 초대를 받았으니 예의를 지켜서 주인을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그 쪽이 우릴 초대한 주인입니까?"

어차피 완벽한 언어도 아니다.

세진은 대충 뜻이 통할 정도로만 말을 했다.

"아, 아닙니다. 주인님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분을 위해서 정찬을 준비해 뒀습니다. 이제 곧 식사 시간이지요."

"식사라. 가는 곳마다 식사 예법이 달라서 우린 될 수 있으면 우리끼리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별로 달갑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그냥 간단히 대화나 했으면 합니다."

세진은 까탈을 부렸다.

떠돌이들이 이곳 가늘인 행성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지만 세진이 생각하기에 떠돌이는 대부분이 엄청난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야 남색, 혹은 보라색 몬스터들이 날뛰는 테멜의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어디에서 쉽게 허리를 숙일 것 같지도 않았다.

많은 떠돌이들이 다녀가는 가늘인 행성에서 떠돌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실력자임을 모르지는 않을 터, 함부로 세진의 요구를 묵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시면 주인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리로..."

세진은 그 안내를 맡은 가늘인을 이 저택의 집사 정도로 생각을 하기로 했다.

집사가 아니면 집 주인의 측근 정도가 될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심부름꾼일 수 도 있겠지만 마땅히 그의 신분을 알 수 없으니 집사라는 꼬리표를 달아 두기로 한 것이다.

"저희 주인님께서 곧 두 분을 뵈러 오실 것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는 세진과 자넷을 커다란 응접실에 데려다 놓고 모습을 감췄다.

"여긴 이게 싫어."

세진은 의자에 앉으면서 투덜거렸다.

"호호홋. 가구는 사용자에 맞춰서 만들어지는 거야. 우리가 가늘인들의 표준에서 많이 벗어난 것을 탓해야지. 가늘인과 가구를 탓하는 건 좋지 않아."

자넷이 엉덩이에 꽉 끼는 의자에 앉은 세진을 보며 웃었다.

세진은 자넷의 웃음을 보고는 다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좁은 탁자를 의자 대신에 사용했다.

올라 앉은 것은 아니고 슬쩍 엉덩이를 기대고 앉아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자넷은 그런 세진 곁에 서서 세진을 보고 있었다.

"뭐 해? 왜 날 봐?"

"볼 게 없잖아. 여기 뭘 보겠어? 가구? 도자기? 벽화? 창문의 장식? 커튼? 뭐 볼 것도 없구만. 그저 그런 수준이야. 이런 것을 보고 있느니 세진을 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지."

"매일 보는 얼굴인데 질리지가 않지? 하하하."

"무슨 농담?"

"어? 아니란 말이야? 난 자넷을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는데. 매일 새롭지."

"흐응? 써비스가 좋은데? 왜 이러실까?"

세진과 자넷이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는 중에 드디어 세진과 자넷이 들어왔던 반대쪽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가늘이 몇이 등장했다.

한 명의 가늘인이 앞장서고, 그 뒤로 일곱 명의 가늘인이 동행을 했는데 집사 하나를 제외한 여석은 딱 봐도 경호원들이다.

"아,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모처럼 게이트 여행자가 오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해서 제 멋대로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그게 불편하셨다고요? 죄송합니다."

앞장선 가늘인은 들어오자마자 세진과 자넷 앞으로 다가와서 사과부터 한다.

하지만 세진은 그 가늘인이 제법 뛰어난 실력자란 사실을 안다. 그리고 함께 들어온 여섯 명의 경호원들 중에서 둘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란 사실도 알 수 있다.

"반갑습니다. 나는 세진. 여긴 내 아내 자넷입니다."

세진은 집주인의 사과에는 신경 쓰지 않고 평이한 인삿말을 건넨다.

"반가워요."

자넷도 세진에 이어서 인사를 했다.

"으음. 이거 곤란하군요. 의자가 이렇다니 말입니다. 하하핫. 생각도 못한 착오네요."

가늘인은 세진과 자넷의 모습에서 그 둘이 어째서 의자에 앉지 않고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차를 마시는 것도 어렵겠습니다. 그것 참."

그는 여전히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굳이 식사나 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부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세진은 집주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 도시의 지배자와 친해져야 할 이유는 있지만 그것이 세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권력자는 어떻게든 상대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늘리려는 본성이 있다고 세진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선입견이지만 거의 틀린 적이 없는 판단이기도 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성격이 급하신 분이군요. 저는 프로타고라고 합니다. 이곳 치다트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도시의 대표께서 여행자를 초대한 이유는요?"

세진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 놓을 것 같은 프로타고에게 다시 한 번 용건을 물었다.

"우리 치다트를 방문하신 게이트 손님께 인사를 하려는 것 뿐입니다. 우리들이 두 분 같은 이들을 떠돌이라고 부르긴 합니다만, 사실 그렇게 비하해서 칭할 문제가 아니지요. 우리들 피노나의 발전에 게이트 손님들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또 인정해야 할 문제지요."

피노나는 세진이 가늘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진은 여전히 가늘인이라고 부르고 있었기에 툴틱 통역도 간혹 피노나를 세진이 붙인 가늘인으로 통역하곤 했다.

세진과 자넷은 가만히 프로타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반응이 없자 프로타고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치다트를 방문하신 두 분께 도움을 드리고 또, 우리 치다트에 도움이 될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두 분을 모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리 급하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린 오늘 도착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저, 그것이..."

프로타고가 세진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고 슬쩍 피하려는 인상을 보였다.

"세진, 아무래도 저 프로타고가 이 치다트를 혼자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야. 경쟁자나 정적, 그것도 아니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있을 수도 있어."

자넷이 한국말로 세진에게 자신의 짐작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세진은 자신들이 이곳 치다트의 정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 프로타고가 세진과 자넷에게 자신이 이 도시의 지배자, 혹은 대표라고 소개를 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거래를 하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럼 우리가 이 치다트나 피노나에게 도움이 될 것을 내어 놓는다면 프로타고 당신은 무엇으로 우리에게 대가를 치를 것입니까?"

세진이 프로타고에게 물었다.

"당연히 힘돌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양, 뛰어난 품질의 힘돌과 하얀 힘돌까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진의 질문에 프로타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에테르 코어를 대가로 주겠다고 말한다.

"흐음. 그게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에테르 코어를 언제든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힘돌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세진은 프로타고가 준비한 에테르 코어를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꾹 참고 흥미가 없는 듯이 이야기했다.

프로타고는 세진의 말을 듣고 얼굴 표정이 굳었다.

그가 자신 있게 준비한 것이 세진에게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으니 이제 다시 눈앞에 있는 게이트 방문자를 회유할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계십니까?"

프로타고는 방법을 바꿨다. 그 역시 세진과 자넷이 가진 것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프로타고는 다른 모든 것을 빼고,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력만 생각해도 반드시 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세진과 자넷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뭐가 필요하냔 프로타고의 질문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있었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프로타고씨."

"맞아요. 지금 당장 무얼 결정하긴 너무 성급하죠."

세진과 자넷은 프로타고의 속을 새카맣게 태웠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세진과 자넷은 프로타고의 저택을 나섰다.

"음흉한데?"

"그러게. 결국은 치다트의 권력 싸움에서 우리의 힘을 빌려 쓰고 싶다는 거잖아?"

"우리가 테멜 게이트를 지나왔으니 당연히 실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싸움에 끌어 들이려는 수작이었어."

"응. 그래도 꽤나 수완이 좋은 사람인가봐. 우릴 가장 먼저 초대를 한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러게? 그러니 저 사람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서 저택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쿠쿡."

세진은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프로타고가 내 준 탈것의 앞을 막아서는 세 무리의 가늘인들을 보고 살짝 웃었다.

프로타고와 경쟁하는 이들이 적어도 셋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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