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또 다른 떠돌이 -- >
세진과 자넷은 새로운 행성을 탐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진의 어깨 위에 있는 어리 앵무는 부리를 죽지에 묻고 죽은 듯이 움직임이 없다.
어리가 이렇게 움직임이 없는 것도 며칠 된 일이다.
괴수 사냥이 끝난 후부터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괴수는 역시 괴수였다.
괴수의 필살기 공격으로 그 때 빛에 휘감긴 녹두병사 전부가 가루가 되었다.
그나마 세진과 자넷, 어리는 먼 곳으로 순간 이동을 했기에 무사할 수 있었지, 가까이 있었다면 셋 모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자칫했으면 큰 낭패를 봤을 것이다. 기껏 키운 의체를 모두 잃게 된다면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려야 원상회복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결국 본체로 뭔가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나마 어리 앵무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어리 테멜의 입구가 있는 목걸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 소형 테멜, 즉 이동이 가능한 곳에 테멜의 입구가 있는 그것은 실제로는 그 물건이 테멜이 아니라 입구 좌표를 지정한 것에 불과하단 결과가 나왔다.
즉 그것이 없어지면 테멜과 현실 공간을 이어주는 입구가 사라지는 것을 뿐, 테멜 자체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다만 다시 입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도 어리처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코어의 경우에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사라진 입구를 다시 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목걸이에 연연해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 덕분에 어리 테멜의 존재에 대한 부담을 확연히 줄일 수 있었다. 테멜은 그것을 유지하는 코어 자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외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리 앵무와 같은 현실의 몸통이 필요한 이유는 좌표의 문제 때문이었다.
테멜 입구는 테멜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좌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 앵무처럼 이동이 가능한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변하는 좌표를 코어로 전송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게이트를 넘어도 그 좌표를 따라서 어리 테멜의 입구가 그곳에서 열리게 되는 것이었다.
세진은 혹시나 몇 개의 좌표를 동시에 기억해서 테멜의 입구를 열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확인해 보니 그 영역은 테멜 코어에서도 아직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당연히 지금으로선 조작 자체가 불가능했고, 좌표도 오직 하나만 정해지는 듯 했다.
즉 코어가 좌표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출구를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사물에 지정을 하게 되면 이동 가능한 좌표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보면 소형 테멜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테멜 출구를 만들 때에 지정한 대상물의 크기에 따라서 이동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결정되니 말이다.
그럼 바위에 만들어진 출구를 바위를 잘라서 이동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 그 출입구는 바위가 아니라 행성의 땅이란 거대한 대상을 지정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잘라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괴수의 필살기를 세진과 자넷, 어리가 피했다는 것이고, 괴수는 필살기를 쓰느라고 많은 생체 에테르를 소비해서 지쳤다는 것이다. 그런 괴수를 세진과 자넷, 그리고 어리가 다시 지원한 녹두 병사들로 공략해서 결국 쓰러뜨렸다.
그리고 지금 어리는 그 여파로 코어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코어의 에테르 흡수 기능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영양 보충을 하느라 바쁘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울러서 모랜에 끌어넣은 괴수를 감시하느라 한눈을 팔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그냥 죽이는 것이 더 나았을까?"
"또 그 소리야?"
자넷이 눈을 살짝 흘겼다.
괴수 '쫑'을 죽이지 않고 모랜으로 끌어 들인 것은 세진의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마지막 숨통을 끊기 직전에 세진이 어리에게 '쫑'을 모랜으로 넣을 수 있는지 확인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당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쫑'은 두어 번의 시도 끝에 모랜으로 끌려 들어갔고, 거기서도 죽지 않고 겨우겨우 버티면서 회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하고 영역 선포까지 해서 다른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고 웅크리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쫑'이 모랜의 테멜 코어를 노린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테멜 코어에 접근을 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리는 결사적으로 '쫑'이 테멜 코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몇 겹의 보안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느라 더 많은 에테르를 소비해서 녹초가 된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언젠가 괴수를 만들어 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어리는 지금도 모랜의 '쫑'을 살피며 에테르를 흡수하며 쉬고 있을 터였다. '쫑'은 개를 닮은 괴수에게 세진이 악의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아무리 멋지게 생겼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힌 괴수 따위에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지 않겠다는 작은 심술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어리가 한동안 밖의 상황에 신경을 쓰기 어려운 상태라서 세진과 자넷은 오랜만에 어리의 순간이동 도움 없이 두 발로 행성 탐험을 하는 중이었다.
"역시 여기도 원주민이 있었네?"
자넷이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중얼거렸다. 마을은 그저 마을이라고 부르기엔 규모가 컸다.
성벽을 높게 쌓고, 망루도 벽돌로 높게 만들어 놓았다.
"고위 능력자는 없을지도 모르겠네."
세진이 망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그럼 굳이 저런 망루가 필요 없지. 여기서 저기까지 시야 청소를 해 둔 것이 1km정도 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 정도 범위를 감지할 사람이 없어서 망루 위에서 감시를 하느냔 말이지?"
자넷이 얼른 알아 들었다.
"뭐 귀찮아서 부하들 시키는 거라거나 할 수는 있지만 솔직히 1km 정도는 누워서 자다가도 몬스터 등장을 알아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잠깐, 세진이 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는 것 같아."
"응? 뭐가?"
"그 정도 능력자가 성벽까지 나와 있겠어? 저 마을 중앙에 있겠지?"
"그러니까 마을의 크기가 크면 능력자가 있어도 망루가 필요하단 이야기네?"
"원래 인간은 대접을 받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실력 있는 사람은 마을 중앙에 큰 집을 짓고 살 거야."
"일리가 있네. 그럼 우리는 어쩌지? 이대로 가서 이야기를 해 보나?"
"말이 통할 거라고 봐?"
"절대 아니겠지."
행성이 다른데 언어가 통할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
무슨 의지를 전달하고 어쩌고 하는 것도 서로 통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새로운 행성에서 원주민과의 통화는 몸짓으로 시작했었다.
"일단 가 보자. 보아하니 그렇게 이질적으로 생긴 사람들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세진이 불쑥 숲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마을의 성벽까지 훤히 시야 청소가 된 곳이라 세진과 자넷이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벽 위로 사람들의 모습이 까맣게 몰렸다.
사람들의 모습은 젓가락 인간이라고 하면 딱 맞을 모습들이었다.
키가 큰 것이 아니라 골격이 얇았다. 어깨도 좁고, 뼈마디도 얇은데 뚱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뼈에 가죽을 둘러 놓은 것보다 약간 나은 모습이었다.
"못 먹어서 저런 모양일까?"
"그런 것 치고는 생기가 넘치는 것 같은데?"
"저건 뭘까?"
"무기잖아."
"무슨 무기를 서너 개씩, 그것도 허공에 띄워 놓고 있어?"
"손으로 휘두르는 것이 아닌 모양이지. 딱 봐도 저 몸으로는 유탄전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거야 봐야 알지. 아무튼 사람들 많이 나왔네. 우리 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냥 가만히 있자. 손을 드는 것도 공격 의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길지 몰라."
세진과 자넷은 성벽 위의 사람들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성벽 위에선 뭐라고 떠들고, 고함을 질렀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우린,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린 당신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
세진은 에테르를 섞어서 성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대략 마스터 정도의 경지에서 사용하는 에테르 수준이었다.
성벽 위에선 세진의 고함소리에 웅성웅성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고, 세진과 자넷은 성벽에서 20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멈췄다.
더 가까이 가면 저들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서 있는 세진에게 뭔가 기묘한 느낌이 전해졌다.
- 떠도는 자. 들어 올 건가?
"자넷, 들었어?"
"으응. 그런데 정확하진 않고,
'여행자 마을로 들어 올 것인가?'
이런 정도?"
"난
'떠도는 자. 들어 올 건가?'
이렇게 들렸는데? 들린 것이 아니라 느껴진 거라고 해야 하나?"
"그거나 그거나. 일단 대답을 해 줘야지."
"그냥 고함을 지르면 알아 들을까나?"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반응을 보이긴 해야 할 일이다.
세진은 에테르를 이용해서 다시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당신들과 교류를 원한다. 마을에서 쉴 수 있다면 좋겠고.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질 생각도 있다."
세진의 고함소리가 성벽을 넘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 환영한다.
"들어오라는데?"
세진이 듣기엔
'환영한다.'
였지만 자넷은 마을로 들어 오라는 뜻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정확한 단어가 아닌 의미의 전달이란 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오역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고 세진은 생각했다.
"나는
'환영한다.'
로 들렸어. 뭐 어쨌건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네."
끼이이이이익.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에 성벽의 문이 열렸다.
성문은 도개교 형식으로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을 감싸는 해자 따위는 없으니 그저 문을 눕혔다가 세웠다가 하는 방식이었다.
"좌우로 여는 문이나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눕히는 방법이네?"
자넷은 그게 신기한지 혼잣말을 한다.
"좌우로 열기에는 문이 크지. 그리고 끌어 올리고 내리려면 성문 위쪽에 더 높은 구조물을 세워야 할 거고 말이야."
"그래서 그냥 안으로 눕혔다가 다시 세우는 방법의 문을 만들었단 거야?"
"확실치는 않지만 그렇지 않을까? 밖으로 눕히면 몬스터가 밟고 있으면 다시 세우가 어려울 거니까 안으로 눕히는 거고."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세진과 자넷은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성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은 좌우 폭이 거의 10미터는 될 것 같았는데 그와 비슷한 넓이로 성문 안쪽에 사람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세진과 자넷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들은 전부 등 뒤에 붙였네?"
"그러게. 어디 걸어 놓은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등 뒤로 옮겨 놓은 것 뿐이네. 일종의 예의 같은 건가?"
"무기를 뽑아 든 것과는 다른 거겠지. 이를 테면 저게 칼집에 넣은 상태 비슷한 거 아닐까?"
"그런가?"
세진과 자넷은 사람들이 만든 통로를 걸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성문 끝에 다섯 명의 사람들이 서서 세진과 자넷을 기다리고 있어서, 결국 성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 여행자. 먼 시간에 본다. 환영한다.
"내가 말할게.
'떠돌이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어서 와라.'
이렇게 해석 됐어."
"역시 자넷이 나보다 나은 모양이네. 난
'여행자. 먼 시간에 본다. 환영한다.'
로 들려. 이제부터 통역은 자넷이 하는 것이 좋겠다. 대화도 자넷이 주도하고."
"응, 그럼 그렇게 할게."
자넷은 세진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자넷이 듣기에도 세진보다 자신이 이들의 뜻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