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74화 (174/298)

< -- 프락칸의 비의를 훔치다. -- >

"반가워요. 난 대지의 일족 넷째 딸이자 대지의 프락칸인 허서르라고 해요."

세진은 인사를 하는 여자의 모습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여자의 등으로 이어지는 갈기를 보고서야 뭔가 조금은 다른 종족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봐야 우주연방에서 인류로 인정한 모든 종족들은 결혼이 가능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 가능하다. 신체 일부가 포유류를 떠나서 파충류나 곤충에 가까운 경우도 있는데 등으로 이어지는 갈기 정도야 대수로울 것도 없다.

"반갑습니다. 허서르.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로페소에테에서 일을 마치고 우주선에 돌아와서 우주선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장치를 가동시키자 곧바로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그 게이트를 통과해서 도착한 곳이 이곳 행성이었다. 그래서 세진이나 자넷은 이곳이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아, 그건 비밀이랍니다. 호호홋. 우리 데블 플레인 연합에서 극비에 속하는 곳이거든요."

"그런 곳이라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도 좀 문제가 있어요. 내가 두 분을 만나는 것도 비밀이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선택한 거죠. 뭐 두 분만 입을 다물어 주시면 되는 일이잖아요? 사실 제가 소외된 데블 플레인들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반대파들이 있어서 귀찮거든요. 그들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연방에서 요구하는 필드를 더 만들기 위한 수작이죠. 필드가 많아야 헌터룸을 이용한 사업이 번창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아시는 것처럼 기존의 인류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헌터룸을 이용한 사업을 할 수가 없거든요."

"듣기로는 우주에는 엄청난 수의 데블 플레인이 있다고 했는데 겨우 한 두 개의 행성 때문에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세진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류가 살고 있는 행성의 수도 없이 많고, 또 데블 플레인의 수도 엄청나게 많다면서 행성 한두 개를 두고 다툰단 말인가?

"끝도 없는 수의 시작은 하나죠. 그걸 잊지 말아요. 없는 것에서는 시작하지 못하고, 하나에선 시작할 수 있어요. 있다는 가장 작은 것이 하나에서 시작하는 거라는 걸."

세진은 허서르 프락칸의 말에 뭔가 깊은 뜻이 있는가 싶었다.

"헛소리."

그런데 자넷이 그런 허서르에게 독설을 쏟았다.

"자넷."

"저거 헛소리야. 그냥 뭔가 있어 보이려고 저러는 거지. 저런 말은 연방의 사색집이나 그런 거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아.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것 아무리 봐도 저 여자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거야. 딱 봐 아직 결혼도 못한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이이이, 자넷!"

허서르가 날카로운 고성으로 자넷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세진은 허서르란 여자가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봤지? 저렇다니까? 호호홋."

자넷이 허서르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세진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후아, 후아. 좋아요. 사실 우리는 거래를 한 거니까 서로 깔끔하게 거래를 마무리하고 끝내죠. 그 이상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래도 어쨌거나 저는 이번에 두 분의 일 처리에 무척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약속을 이행할 생각입니다."

세진은 허서르 프락칸의 대답을 들으면서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자넷이 그 여자가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고 몇 번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곳에서 곧바로 해도 되겠습니까? 따로 준비를 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준비는 내가 아니라 그 쪽에서 해야지요. 몬스터 사체 혹은 코어가 있어야 하죠. 물론 등급이 높은 것이면 더 좋아요. 그래야 효과도 좋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파란색 등급으로 열 마리 정도, 거기에 코어도 같은 등급으로 다섯 개 정도면 되겠습니까?"

세진이 허서르에게 물었다.

"그 정도면 의식을 한 번 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네요. 뭐 더 많아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양이 많으면 저로서도 무리가 가는 일이라서. 그래 테멜 안에서 하자고 했나요?"

"맞습니다. 테멜 안에서 의식을 거행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꼭 한 번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왜요? 테멜 안의 에테르를 굳이 그렇게 정화해야 할 정도인가요? 에테르 농도가 그렇게 짙어요?"

세진은 허서르가 테멜 안의 에테르가 너무 많아서 테멜을 이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정화 의식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사실 그것도 그거지만 테멜의 크기가 큰 것도 이유입니다. 테멜의 넓이가 매우 넓어서 말이죠. 그리고 사실 프락칸님의 정화 의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도 알 수가 없고 말이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죠. 가서 정화를 해 봐야 나도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세진은 작은 상자를 꺼내서 그곳에 테멜의 입구를 만들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제 그곳에 접촉을 하게 되면 어리의 테멜 공간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상자 따위가 필요 없지만 지금은 매개체를 상자로 가지고 있는 테멜인 듯이 포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펼치는 연극이었다.

"가.

시.

죠. 허서르 프.

락.

칸."

"앞장서세요. 자넷 총수님."

자넷은 앞서서 테멜로 들어가면서도 슬쩍 허서르 프락칸을 도발하고, 허서르 프락칸도 지지 않고 맞받아 친다. 세진은 두 여자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끼면서도 도대체 그게 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오호, 대단하군요. 끝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테멜이라니 말이에요."

허서르 프락칸은 어리 테멜 안으로 들어와서 뭔가 탐색을 해 봤던지 호들갑을 떨었다.

"거기다가 에테르도 묘하게 느낌이 다르네요. 흐음. 이게 정화가 될지 모르겠네요. 저기 저게 정화 대상인가요?"

허서르 프락칸은 어리의 홀 한쪽에 놓여 있는 몬스터들의 사체와 그 사체 앞에 상자에 담겨 있는 코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맞습니다. 허서르 프락칸님. 저것들이 의식의 재료들입니다."

"네. 그렇군요. 그럼 당장 시작을 하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제가 하는 정화의식은 에테르를 대지의 기운으로 바꾸는 것이에요. 물론 일부는 본래의 기운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대지의 기운으로 바뀌죠. 그건 이해를 해야 해요. 저는 대지의 프락칸이니까요."

"으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러니까 몬스터의 에테르를 정화해서 본 래의 기운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의 기운으로 대부분 변하게 하는 겁니까?"

세진은 예상과 다른 허서르의 말에 그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망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에테르를 정화하는 것도 맞고 원래의 기운으로 되돌리는 것도 맞아요. 다만 내 능력이 대지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에테르 중에서 대지의 기운이 변한 것들을 주로 환원시킨다는 말이에요. 사실 몬스터 중에는 각각 특정 기운을 많이 품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이 몬스터들처럼 땅에 사는 것들은 대지의 기운을 많이 품고 있지요. 그러니 당연히 저와 상성이 잘 맞아서 정화를 해도 대지의 기운이 많이 나와요."

"그럼 물에 사는 몬스터라면?"

"당연히 물의 기운이 많아서 제가 정화를 하면 제대로 정화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정화가 되어도 효과가 크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죠."

세진은 그렇게 설명을 듣고서야 허서르의 말을 이해했다.

많은 기운으로 뭉쳐져 있는 몬스터의 사체나 코어에서 특정 기운을 환원시키는데 특화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대지의 프락칸이니 대지의 기운으로 본래 기운으로 바꾸는데 특화된 것이고.

"그럼 다른 기운들도 있는 겁니까? 어떤 기운이 있습니까?"

"그거야 다들 좀 다르게 이야길 하기도 하지만 우리 행성의 경우에는 대지와 물과 바람의 프락칸이 있어요. 그들이 각각의 기운을 정화하는 거죠."

"불이나 나무 뭐 이런 기운은 없습니까?"

세진은 불현듯이 오행이 떠올라서 물었다.

"다른 행성의 종족들은 몰라도 우리 행성에선 대지와 물과 바람이에요. 그리고 어떤 행성은 대부분이 물의 기운만 있는 곳도 있죠. 그건 조금씩 다르죠. 그리고 불의 기운이 성한 곳에선 생명이 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곳이 데블 플레인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걸로 알아요."

"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불의 기운이 많다는 건 그만큼 뜨거운 행성이란 소리일 테니 말입니다."

"자, 대충 이해가 되었으면 의식을 시작하겠어요. 의식 중에 말을 걸거나 몸을 건드리는 일은 없길 바라요. 그럼 의식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허서르 프락칸."

세진이 그렇게 허서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자넷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세진에게 어렵게 구해 준 사람이 한 쪽의 기운만 주로 정화를 하는 대지의 프락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기운을 정화해서 변화 시키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 구하고 좀 모자란 사람을 구한 것에 대한 민망함 때문에 손가락을 못살게 구는 것이다.

하지만 세진은 자넷의 그런 심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허서르보다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 세진은 어리와의 연결에 집중해서 어리가 허서르 프락칸의 정화 의식을 살피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는 이곳 공간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아주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고 허서르 프락칸의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식의 시작은 허서르 프락칸의 몸에서 흘러나온 묘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의 시작은 허서르 프락칸의 몸속이었다. 어리는 그 기운이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는지 살폈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특별한 오러 로드의 순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특이한 에테르 로드 수련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허서르의 기운은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 나와서 몬스터의 사체와 코어를 휘감았다.

그런데 그렇게 허서르의 기운이 몬스터 사체나 코어에 닿자마자 묘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서르의 기운과 몬스터 에테르가 서로 얽히더니 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진은 그 현상을 그렇게 느꼈다. 허서르의 기운과 몬스터 사체, 혹은 코어의 에테르가 범벅이 된 후에 다시 에테르와 허서르의 기운 그리고 전혀 새로운 기운들로 풀어진다고 느꼈다.

둘이 뭉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후에 다시 분리가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을 어리와 연결된 시선을 낱낱이 보고 있던 세진은 적어도 대지의 프락칸이 사용하는 기운은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진 혼자였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허서르 프락칸 내부의 에너지 흐름을 모두 읽어 낼 수 있었으니 그녀와 같은 로드를 개척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가능하리란 생각을 한 것이다.

어쨌거나 허서르 프락칸의 정화 의식은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그 덕분에 어리와 세진은 프락칸의 에너지 흐름을 완벽하게 훔칠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익혀낼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지구의 에테르도 정화해서 몬스터들을 약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진은 그런 기대로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휴우."

허서르 프락칸은 준비되어 있던 모든 사체와 코어를 정화하게 낮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진은 진심으로 허서르 프락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수고랄 것이 뭐가 있나요? 약속을 지켰을 뿐인데요. 하지만 미안하군요. 이곳 테멜이 너무 넓어서 이 정도의 정화로는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네요."

"아닙니다. 어쨌거나 계약을 하고 허서르 프락칸께서는 대가를 치르렸습니다. 저는 아무 불만도 없습니다."

세진은 그렇게 말했고, 뭐라 이야기를 하려던 자넷이나 허서르 프락칸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넷은 좀 더 대가를 받으라고 하고 싶었을 것이고, 허서르 프락칸은 미안한 마음에 한 번 정도 정화를 더 해주려고 하다가 세진이 완곡하게 거부하는 말을 하니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자, 그럼 다시 나가시죠. 여기 오래 있으면 불안하기만 합니다."

세진은 허서르 프락칸을 테멜 출구를 미리 준비해 둔 벽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사람은 다시 이전에 허서르를 만났던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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