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기댄 모양이다 -- >
사람 인(人)이란 글자는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모습을 흉내 낸 글자라고 한다. 크고 높은 건물을 지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지어간다.
하찮은 탑 쌓기 놀이도 위에서부터 쌓은 경우는 없다.
로디아드의 귀족들이 제아무리 잘났다고 떠들어도 그 밑에 페이러드가 있고, 소르메드, 에프레드, 테르켓트가 있을 때에야 귀족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디아드 밖으로 나간 이들은 하나같이 실종이 되거나 혹은 주검이 되어서 돌아왔다. 죽거나 실종 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더구나 죽은 이들은 대부분 가문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들의 기반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거만이 아니었다.
테르켓트와 에프레드, 소르메드에 로디아드 귀족들이 벌였던 테르켓트 악몽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너무도 구체적으로 퍼진 내용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쯤은 그 소리를 믿었고, 그 반 중에서 또 절반 정도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테르켓트의 사람들이 그들이 생산한 것을 에르레트나 소르메드의 상인들에게 팔지 않았다.
테르켓트는 그들이 생산한 것만으로도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테르켓트에서 수입되던 물품들이 끊긴 에프레드나 소르메드는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칼부리까지 일어날 지경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소르메드의 하급 귀족들이 페이러드의 중급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페이러드의 귀족들이 로디아드에 해결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로디아드가 이미 하위 구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은 로디아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는 마스터 등급의 원로가 로디아드를 벗어났다가 죽어 돌아왔다. 그러니 로디아드의 귀족들 중에서 마스터 이하라면 나가봐야 시체가 될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로디아드가 다른 지역에 신경을 쓸 수가 있을까? 마땅한 대책이 내려오지 않으니 페이러드와 소르메드의 귀족들이 나서서 몬스터 사냥꾼들을 데리고 나서서 에프레드와 테르켓트에서 강제로 물품 조달을 했다. 말로는 물품 조달이지만 일종의 약탈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프레드와 테르켓트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물론 무력으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심리적인 저항이란 것은 무서웠다. 이제 귀족들은 사람들을 지켜주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핍박하고 착취하는 더럽고 야비한 놈들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로페소에테에 악몽이 시작되었다. 로디아드에는 파란색 등급의 몬스터가. 페이러드에는 초록색 등급, 소르메드에 노란색, 에프레드에 주황색 그리고 테르켓트에 빨간색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서 나타났다.
로페소에테의 사람들은 그것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어렴풋이 할게 되었다.
신의 은총이라는 몬스터 방어벽이 소용없다는 것.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안전한 곳에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것.
물론 그런 정보를 모으고 분석한 곳은 테르렉치의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서 로디아드의 가주와 소통을 했다.
사람들이 오고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소식을 주고 받았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그러게 몬스터는 못 다니지만 동물들은 다닐 수 있다는 걸 이용해서 편지를 주고받 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다니 제법이야. 호호. 재밌어. 원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률 97%로 편지가 전달되면 저 정도면 대단해. 음. 대단해."
세진과 자넷은 테르렉치 가문의 가주와 그 하위 상인들 사이에 정보고 오고 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봤다. 그것은 그들 로디아드의 귀족들에게 그나마 외부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게 하려는 의도였다.
세진은 로디아드에 있는 귀족들이 언젠가 스스로 항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숨통을 터 놓은 것이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실종된다.
이것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로페소에테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누가 누구를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각각의 구역은 개별적인 생존투쟁에 들어갔다.
다만 생산력이 극히 떨어지는 로디아드나 페이러드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물자 부족에 일찍부터 허덕여야 했다.
로디아드는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을 해야 했고, 페이러드는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서 다른 지역들을 돌아가며 약탈해야 했다.
그런데 몬스터가 한 번 나타나서 소탕이 되면,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실종이 되었다. 확인 된 희생자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 실종자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그런 실종자들 대부분은 몬스터를 상대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중에 페이러드, 소르메드, 에프레드의 거주민 중에서 어느 정도 수련을 했지만 그곳에 나타나는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약간 부족한 이들이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서 용병 일을 시작했다.
아직도 몬스터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이들의 가치는 높았다. 하지만 페이러드 살면서 상급 몬스터가 나타나면 상대를 할 수 없는 실력이지만 소르메드에 나타나는 중급 몬스터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이 소르메드로 갔다. 그러자 소르메드에서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이들이 에프레드나 테르켓트로 이동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게 무력을 팔아야 먹고 생필품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무력을 앞세워서 약탈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지만 그런 이들은 또 다른 이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직접 나쁜 짓을 하지는 못해도 나쁜 놈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거리낌 없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일을 해서 대가를 얻는 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중에도 로페소에테는 계속 변했다.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몬스터는 끊이지 않았다.
하리야트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집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또 집이 늘어나면 거기에 살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로페소에테의 상황이 전해졌다. 터트거 노인은 새로 유입되는 이들이 하리야트에 새로 만들어진 질서에 적응을 하지 못할까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 오는 이들은 이미 하리야트의 법칙에 순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쉽게 적응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로페소에테에서 겪은 삶의 변화, 인식의 변화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변화되지 않은 이들은 하리야트로 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어리는 어느 정도 하리야트에 적응할 준비가 된 사람들만 하리야트로 옮겨 오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테멜로 끌고 들어와서도 험한 교화 과정을 거친 후에야 하리야트에 정착을 시키고 있었다.
하리야트에서 에테르 수련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기초다. 그런데 문제는 몬스터를 잡아도 그다지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몬스터를 잡아서 코어를 얻어도 쓸 곳이 없었다. 이전에는 신의 은총을 유지하는데 쓰기 위해서라도 몬스터 코어가 필요했는데 이젠 쓸모 없는 돌덩이가 된 것이다.
"그건 문제지. 사람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세진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어쩔 수 없네. 어차피 하기로 했던 계획이니까 그대로 하자."
"뭐. 그래야지. 괜히 아깝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지. 여길 다시 올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야 할 거야. 그 여자가 이곳을 보호하기로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게슈너 상점의 에테르 가드와 웨폰에 대한 정보가 연합으로 흘러들어갈 수도 있어."
자넷이 조금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그래? 그럼 자넷이 그 여자를 볶아 버려. 그 여자에게 책임을 물어서 대가를 받아야지. 그 여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까 말이야. 우리 자넷이라면 충분히 대가를 받을 능력이 있지 않겠어? 이참에 뭐 게슈너의 에테르 가드와 웨폰에 대한 권리를 자넷이 등록을 해 두면 되겠네."
"응? 정말 그래도 되? 세진 거잖아."
자넷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뭐? 내 관심은 겨우 지구야. 지구 하나만 구해서 거기서 알콩달콩 살면 그만이라고."
"누구랑?"
"누군 누구야? 우리 자넷이지. 하하하."
"정말?"
"당연한 걸 뭘 물어? 그럼 자넷은 아냐?"
"에헤헤. 아이참. 부끄럽게."
- 너무하는 것이에요. 어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둘은 그렇게 노는 것이에요. 어리는 질투가 나는 것이에요.
둘 사이의 두드러기 애교 행각에 어리가 태클을 걸어 본다.
"어리야. 원래 그러는 거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주고 받으려고 하는 거. 그게 사랑인 것을 어쩌겠냐?"
- 우아아아. 세진님 이상해요. 안 그러시던 분이 왜 그러는 거예요? 악악악 대패, 대패.
"하하하. 어리야 장난 그만치고 일을 좀 해야겠다."
- 에에, 너무하는 것이에요. 또 어리를 부려먹으려고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우리 어리에게 에테르 샤워를 시켜주잖니."
세진이 어리가 들어있는 탁자에 손을 올리고 에테르를 흘려 넣으며 말했다. 어리는 세진의 에테르를 너무 좋아했다.
- 흐응. 딱이 이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에요. 하지만 세진님이 원하시니까 해 드리는 것이에요. 갑옷과 무기를 만들면 되는 거죠?
어리가 세진의 계획을 짐작하고 물었다.
"그리고 이것도."
세진이 품속에서 패를 하나 꺼냈다.
"이건 귀족들의 신분잖아. 로디아드 귀족들 신분패."
자넷이 패를 알아보았다.
"맞아. 써 먹을 곳이 없었는데 이걸 잘 연구해 보니까 쓸만한 것이 나왔어. 봐봐."
세진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신분패의 뒷면을 보였는데 거기에 구슬이 하나 박혀 있었다.
"어머, 코어네?"
"맞아. 그리고 이렇게 하면?"
세진이 코어를 꾹 눌렀다. 화화왁!
"응? 이거 뭐야?"
자넷이 갑자기 생겨난 비누거품 같은 것을 보며 말했다. 거대한 비누 거품은 세진과 자넷 둘을 모두 감싸고도 한참 여유가 남았다.
"신의 은총."
세진이 대답했다.
"신의 은종이라고? 이게?"
"뭐 적당히 손을 봤더니 나온 건데, 쉽게 말하면 몬스터의 생체 에테르에만 반응을 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행성의 몬스터 생체 에테르에만 반응을 하는 방어막이라고 할까?"
"효과가 뭔데?"
"디버프 효과가 생긴다고 할까? 아니면 그래 저 막에 닿은 몬스터의 신체 부분에서 생체 에테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멋대로 움직이지. 몬스터 입장에선 아주 괴상한 경험을 하게 되고 신체 일부에도 이상이 생기겠지. 그런 거야."
"흐응, 재미있네? 그래서 이걸 어쩌려고?"
자넷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이번에 만드는 에테르 가드와 웨폰, 그리고 이 보호부적은 모두 몬스터 코어를 장착하는 곳이 있어. 그리고 몬스터 코어를 장착해야 효과가 나타나지."
"흐응. 알았다. 그래서 그걸로 사람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게 만들 생각인 거구나?"
"어느 정도 보급이 되면 그것들을 만드는 원리도 교육을 시켜야지. 기초적인 거라도 말이야. 그래야 수리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수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만들기도 하겠지."
"좋은 계획이네."
"그렇지? 어리야 들었지. 이것도 부탁한다."
-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역시 일은 어리가 하게 되는 것이에요.
"한 번에 수 만 개도 만들 수 있는 녀석이 엄살은!"
- 쳇, 세진님은 어리를 너무 잘 알게 된 것이에요. 어리는 이제 프라이버시도 없는 것이에요. 어리는 일하러 가는 것이에요.
"호홋, 어리는 언제 봐도 재미있어."
자넷이 어리의 투정에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자넷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세진도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계획대로 풀려가는 상황에 대한 만족과 안도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