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71화 (171/298)
  • < -- 너희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 -- >

    몬스터가 휩쓸고 지나간 로디아드는 안정을 찾지 못했고, 페이러드와의 소통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특별히 허락을 받은 몇몇만 로디아드를 벗어나서 하위 지역으로 나갈 수가 있었고, 나머지는 로디아드로 복귀한 후에 외부 출입을 통제 당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로디아드가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었다. 물론 그 악몽의 밤에 페이러드로 도망친 이들이 몇은 있었지만 5대 가문의 힘은 그들의 헛소리를 잠재울 능력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로디아드에 남은 이들은 무력을 갖춘 사내들이 거의 전부였다. 몇몇 여자를 뺀 나머지 여자 전부와 지계로 훈련을 받고 있던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 전부, 그리고 집안일을 돌보는 직계 방계의 혈족들과 그 가족들, 심지어는 하찮은 고용인들까지 모두 사라졌다. 죽은 이들도 더러는 있다는 걸 알지만, 사라진 이들이 대부분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하우타칵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사람들 넣을 수 있고, 또 흔적도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하우타칵에 대해서 들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떠올릴 수 없었고, 그것은 그리 틀린 추측이 아니었다.

    테멜을 이곳 로페소에테에서 부르는 이름이 창고라는 의미의 하우타칵이니 말이다.

    "그렇겠지. 얼마나 대단한 하우타칵인지 몰라도 그 엄청난 몬스터들을 담아와서 이곳에 뿌렸어. 그리고 또 여기 있던 사람들을 담아 갔지. 허허허. 이게 말이 되나?"

    테르렉치의 가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십여 년은 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다른 가문의 수장들 역시 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테르켓트의 악몽. 그것에 대한 복수인 건가?"

    거멘단트의 가주가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뭐가 달리 있겠습니까? 분명 테르켓트 놈들 짓일 겁니다."

    자히락의 가주는 벌써 며칠 동안 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앞으로 계속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데글 가문의 가주가 테르렉치 가주를 보며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사실인 듯 하오. 오면서 확인을 해 봤는데 로디아드를 벗어난 이들의 소식이 없소. 나가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요."

    "허허허. 우리를 여기 가둬 두겠다는 건가?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털거일의 가주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하는 말이다.

    "그건 모를 일. 우리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이번 로디아드에 들어온 몬스터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지. 그런데 이번 일을 한 놈들은 그걸 해 냈단 말이지. 하우타칵의 위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몬스터들을 잡아서 넣는 일을 하우타칵이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테르렉치 가주께서는 이번 일의 배후에 있는 이들 중에 우리 다섯 가주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자히락 가주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가능성이."

    테르렉치의 가주는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무척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모두들 어디 있는 것인지. 혹시 모두..."

    "어찌 그런 참람한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털거일 가주는 쓸데없는 소릴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자하락의 가주는 또 다시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우리가 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음이지. 허허허. 어찌할꼬. 어찌..."

    테르렉치의 가주는 눈을 뜨지 않은 상태로 낮게 웅얼거렸다. 그에겐 여전히 많은 일족이 있었지만 모두가 장년층 이상의 나이였다.

    가문의 미래인 아이와 여자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흥, 그래봐야 아이들과 여자들일 뿐입니다. 우린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테이러드에서 적당히 여자들을 데려다가 가문을 부흥시키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번 일의 배후를 찾아서 제거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소용이 없지요. 다시 이와 같은 일을 당할 테니까 말입니다."

    "맞습니다. 일단 이번 일로 싸울 수 있는 전력만 남은 상태가 되었으니 이 힘으로 적을 찾아 해결을 한 후에 가문을 재건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고 그 때까지 우리들 다섯 가문이 하나라는 생각으로 협력을 하는 걸로 합시다."

    데글과 거멘단트의 가주가 그렇게 의견을 모으자 다른 가주들도 뺄 수는 없어서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적을 어떻게 찾아서 제거할 것인지를 놓고 이런 저런 함정을 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 지금 사라진 가족들은 일단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지?"

    "음. 예상 외로 테르렉치 가주가 좀 동요가 심한 것 같긴 하지만 뭐 하는 짓들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문 아닐까?"

    "가문?"

    "그게 아니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함정을 피해서 놈들의 수를 줄이는 일을 계속 해야겠어. 그리고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놈들에게 시체를 돌려 보내야겠어."

    "세진."

    자넷이 세진의 말에 깜짝 놀라서 세진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장례를 치르더라도 저들이 알아서 치르게 해야지. 그리고 밖으로 나간 이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려줘야 하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

    "그냥 실종과 살해당한 것은 차이가 크지. 실종되었다고 아는 것과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이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어차피 테르켓트의 악몽을 알고 실행한 놈들만 죽일 거야. 그 나머지는 로디아드 놈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보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세진은 자넷의 걱정스런 표정에 그렇게 안심을 시켰다.

    이미 이번 일을 통해서 죽은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로디아드의 무너지 건물 밑에서 미쳐 구하지 못한 아이들과 여자들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다. 세진은 악인 열을 잡기 위해서 선인 열이 다치는 것도 마다치 않을 생각이었다.

    '악인 열이 살아 있으면 그들 손에 선인 백, 천이 다치고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것은 내 기준일 뿐이다. 어차피 내가 배운 윤리 도덕 역시 그렇게 배워서 내 스스로 세운 기준이 아닌가. 옳고 그름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세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리야트는 하루하루를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테르켓트에서 악몽의 날에 구함을 받고 신도시로 이주하게 된 이들은 그 신도시의 이름을 하리야트라고 지었다.

    그들은 하리야트에서 안면이 있는 마을 단위로 뭉쳐서 자리를 잡았다. 이미 그에 맞도록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가게나 공방과 거의 유사하게 만들어져 있는 건물을 보고 그것에 자신들의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외의 사람들도 하리야트의 집에 대해선 불만이 없었다. 이전에 지내던 집에 비해선 훨씬 좋은 환 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리야트의 주민들은 하루하루 공포에 떨며 지냈다.

    눈만 뜨면 보이던 신의 은총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그래서 간혹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자경단에 의해서 퇴치가 되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니?"

    "공터에요?"

    "네. 거기서 에테르 수련법을 가르쳐 준대요. 자경단 형이요."

    "그래? 그런 조심해서 갔다 와라. 저녁 시간 되면 들어오고."

    "네. 알았어요. 엄마."

    "가는 길에 옆집 아이들도 데리고 가! 그 아이들 부모는 일하러 가고 없으니까 챙겨 줘야지."

    "벌써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래 잘 했다."

    엄마는 벌써 저만치 뒷모습만 보이는 아들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 같으면 쓸데없이 위험하게 싸우는 방법 따위에 관심을 둔다고 말렸을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싫다고 해도 가르쳐야 할 상황이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보지만 어디에도 신의 은총은 보이지 않는다.

    "있으면 뭘 해, 그것도 귀족들이 마음대고 여닫아서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그나저나 투렐에서 또 사람들이 왔다고 하던데..."

    여자는 하리야트의 중앙 광장이 있는 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집안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하리야트의 광장에는 평소와 다른 침묵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냥 그러고 싶습니다."

    "내가 듣기로 로디아드의 귀족, 그것도 큰 가문의 자손이라던데 무슨 이유로 이곳에서 살겠다는 거지?"

    "어차피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쫓겨 날 입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젠 투렐에서 사는 형편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투렐 보다는 이곳 하리야트가 먹고 사는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것 참, 별난 일이군."

    터트거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말인 즉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하리야트에선 투렐의 주민들이 이주해 오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곳 하리야트의 질서에 순응하기만 하면 문제가 아니다. 하리야트에선 계급이 없다. 모두가 테르켓트에서 온 이들이고 일부만 에프레트, 소르메드에서 온 이들이다. 하지만 그 수가 워낙 적어서 따로 계급을 내세워서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나마 터트거는 이전 어리라는 존재와 대화를 이끌었던 것이 인정을 받아서 하리야트의 행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래봐야 자경단이라거나 혹은 촌장 회의라거나 하는 의결 기관들이 있어서 터트거의 권한이 무척 약하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으로 정착한 ㅏ람이었다.

    어쨌거나 계급이 없는 곳에 가장 높은 계급인 로디아드의 귀족이 들어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테르켓트의 악몽을 만들어낸 이들의 혈족이 아닌가.

    "하아, 나는 자네가 이곳에서 사는 것을 반대하고 싶다네. 테르켓트의 악몽을 자네들이 만들었지. 아니 그래 자네들을 이끄는 이들, 자네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라고 하지. 어쨌거나 그렇지 않나? 그런데 나는 그 악몽에서 내 아내와 딸을 잃었고, 이번에는 나 혼자 여기로 떨어졌네. 그나마 있던 아들과도 영원한 이별을 한 셈이야. 이런 상황에서 자네들은 그저 원수일 뿐이네. 여길 온다고 해서 자네들에게 나아질 것은 없어."

    "알... 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숲으로 가게. 몬스터가 있기는 하지만 숲에는 아직도 먹을 것이 넘친다네. 위험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지. 적어도 투렐의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무력은 강할 테니까 말이야."

    "숲이라고요?"

    "무엇을 먹어야 할지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지. 그리고 그것들을 구해 오면 또 다른 지식을 알려주겠네. 일종의 거래지. 자네들은 숲에서 채집을 하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채집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그게 끝나면 자네들이 채집한 것과 우리가 생산한 것을 바꿀 수도 있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야. 자네들이 이곳에 온다고 해도 누가 자네들에게 일을 시킬 것 같은가?"

    터트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곁에 있는 사내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따라와라. 적어도 먹고 죽지 않을 것들을 가르쳐주마."

    사내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터트거의 부탁을 들어 주려는 듯이 투렐에서 온 젊은이들을 한쪽으로 이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