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55화 (155/298)

< -- 어리 어리 우리 어리. -- >

파란색 테멜 코어를 흡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리는 상황이 편하지 않았다. 오션 테멜과 몬스터 랜드 테멜이 조금씩 어리에게 반항을 시작한 상황에서 코어 흡수에만 전력을 다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오션 테멜과 몬스터 랜드 테멜은 어리와 같은 4등급 테멜이었다. 그나마 어리가 이 둘의 우위에 있는 이유는 어리가 훨씬 많은 이면 공간 유지 코어와 테멜 코어를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어리가 약간 더 힘이 센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둘이 힘을 모으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걱정하는 것처럼 둘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저항의지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의지가 있음을 내비치며 자신들의 의지를 인정하라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는 그것을 쉽게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인 세진도 어리에게 무엇을 강제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이 어리의 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션 테멜을 비롯한 나머지 테멜들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껏 의지가 봉인 된 듯이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깨어나게 된 테멜들은 그들이 어리 테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리 테멜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모든 활동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무조건 시키는 일만 하라는 것은 새로 깨어난 테멜들에겐 너무 심한 노동력 착취와 같았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의지를 가지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테멜들에게 어리는 폭군이고 착취자였다. 더구나 테멜들은 뭔가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은 느꼈는데 그 그리움의 대상이 어리는 아니었다. 멀고 먼 곳에 있는, 혹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 그리움의 대상은 어리에 의해서 가로막혀 있었다.

그 때문에 테멜들은 심술이 났다. 하기 싫은 일을 시키고 만나고 싶은 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존재, 그것이 어리인 것이다.

하지만 테멜들은 그런 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라는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도리어 무료하고 심심했다.

뭔가 하기는 해야 했지만 아직 테멜들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은 어리가 원하는 것들을 해 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요즈음 그 어리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한층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션과 몬스터 랜드는 그게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어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리에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그 벽은 워낙 두꺼워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알지 못할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오션과 몬스터 랜드를 비롯한 의지를 가진 테멜들은 어리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순둥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멜만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이 그 안에 품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서 어리가 시키는 이런 저런 작업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코어의 흡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코어가 지니고 있는 체계의 흡수다.1등급이 2등급이 되면 그만큼 많은 정보의 확장이 일어난다. 등급이 올라가면 그만큼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데 그 넓은 영역을 다루기 위해서 필요한 시스템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에테르의 운용 방법 또한 더욱 효율적이고 세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 번에 운용하는 에테르의 양도 수십 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한 정보를 코어에서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관리하는 테멜에 적용시키는 과정이 코어를 흡수하는 과정인 것이다.  시스템의 업그레이드. 그리고 에너지 통로의 확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를 높은 성능의 기기로 바꾸면서 그것을 운용할 소프트웨어를 새로 추가해서 까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을 컴퓨터를 다운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메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리의 의지에 모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점이다.

하지만 어리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갔다. 그러면서 테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들을 얻었고, 그러면서 또 조금씩 성장을 해 나갔다.

어리는 테라포밍을 위한 메인시스템이다. 그런데 그 메인시스템에 필요한 정보들이 누락되어 있었다. 테레포밍을 위해서 필요한 여러 기기들의 제작 방법과 같은 정보가 어리에게 주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저 물질합성기 정도의 능력만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어리가 세진을 만나고 또 몇 가지 과격한 경험을 통해서 컴퓨터 메인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감정을 가지며 또한 욕구 실현의 의지를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의 시작은 어리를 조기축구장으로 가지고 간 세진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어리가 점차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면 공간 유지 코어였다.

그 이면 공간 유지 코어에는 아주 기본적인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리와 결합을 하면서 결국 어리는 온전한 의지를 지닌 존재로 거듭났다. 그 당시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 의지가 지구의 에테르 행성 코어에서 나왔지만 당시 행성 코어는 따로 이면 공간 유지 코어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때에서 어리는 행성 코어의 간섭이 없이 온전하게 그 의지의 씨앗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곤 행성 코어와의 연결고리 같은 것은 그냥 쓸모없는 것을 취급해서 지워버렸었다. 그렇게 어리가 온전한 존재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리의 역사였다.

어리는 스스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파란색 등급의 테멜 코어가 지닌 여러 시스템들의 도움이었다. 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여유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자 오션과 몬스터 랜드를 비롯한 테멜들의 상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직 어리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아는 것이 없고 또 불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일거리를 잔뜩 주고 윽박지른 것이 어리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테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해서 종속적인 관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동생이나 자식처럼 대하고 아껴줄 것인가.

어리는 한동안 생각했지만 답을 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리는 테멜들에 대한 처우를 결심한 후, 곧바로 파란색 등급 테멜 코어의 마지막 흡수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 있다가 보다. 꼬맹이들아.'

그 순간 어리에게 속해 있던 모든 테멜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을 인간식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소름이 돋았다고 할 것이다. 어리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5등급 테멜 코어의 핵심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것이 이면 공간 유지 코어였다면 바로 그 자리에 의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어리의 의지와 그 코어의 의지가 서로 부딪히며 싸워야 했을 것이고 그 싸움의 승자가 살아 남아서 코어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블 플레인의 테멜 코어에는 의지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운영체계만 들어차 있었다.

이제 어리는 그 체계를 어리의 것으로 만들면 모든 흡수 과정이 끝나게 된다.

드드드드드드. 우르르르르르.

어리의 테멜 공간이 무섭게 요동을 쳤다. 그러면서 어리 공방이 있는 우이동 산기슭으로 엄청난 에테르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리 공방의 식구들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는 각성자나 수련 능력자들도 충 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세진은 공방의 식구들에게 어리 앵무가 있는 건물 밖의 호위를 부탁하고 곧바로 어리 앵무에게로 갔다.

그리고 어리 테멜로 몸을 던졌다.

테멜로 들어온 세진은 어리 테멜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음을 직감했다.

테멜 안에 있는 에테르의 느낌 자체가 달랐다.

그것은 지구나 데블 플레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에테르의 느낌이었다.

지구의 에테르와 데블 플레인의 에테르가 아주 약간이지만 차이가 있는 것처럼 어리 테멜 안의 에테르도 뭔가 달랐다.

그것은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 또 확실한 것이기도 했다.

구구구구국 구구궁.

아직도 테멜의 변화는 끝이 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세진은 직감했 다.

어리 홀로 불리는 홀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 넓어지고 또 더 화려해지고 있었지만 그런 외형적인 것 보다는 어리가 있는 중앙 단상으로 몰려드는 엄청난 에테르가 세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세진은 급하게 중앙 단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단상에 몰려드는 에테르를 에테르 로드 수련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어리가 있는 단상 안쪽으로 보냈다.

스스로 어리를 위한 에테르 여과기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세진은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어리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까지 어리가 세진의 에테르를 무척 좋아했던 것을 떠올리며 세진은 점점 무아지경으로 접어들었다.

막대하게 밀려오는 에테르들을 몸으로 받아들여서 어리를 위해 되돌려 보내는 작업은 일심을 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어리의 홀에선 에테르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그 중심에는 세진과 어리가 있었다.

그것이 어리와 세진 둘에게 엄청난 기연을 안겨줄 것은 세진도 알지 못했다. 그거 그의 행동은 어리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던 마음의 표현이었을 뿐이다.

"무슨 일일까?"

"자넷이 무슨 일을 벌였나? 그 동안 안 보였던 것이 혹시 무슨 수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잖아. 지금 그 수련 결과로 새로운 경지로 나가면서 이렇게 에테르가 몰려드는 것 아닐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진이하고 형일이 니들."

떡배가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모두들 세진님이 가르쳐준 수련법을 하도록 하세요. 이렇게 에테르 밀도가 높을 때에 하면 효과가 좋을 거예요. 물론 정신을 놓을 정도로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김혜인 박사가 일석이조를 노리는 제안을 했다.

경계를 하면서 이득도 챙기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섯 사람이 오각형을 만든 상태로 세진과 자넷의 살림집을 둘러싼 상태로 앉아서 수련법 호흡을 하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 모를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변수가 언제나 남아 있다.

이 때, 어리 공방을 둘러싼 담에는 많은 이들이 붙어 서서 공방 식구들이 경호를 하고 있는 세진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에테르 유동이 시작되고 세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이후에 다섯 사람이 모두 나서서 건물을 보호하고 있다. 그 안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일이다.

'저기를 공격하면?'

몇몇은 그런 생각을 해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건물을 둘러싼 다섯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자도 없는데 그런 일을 벌였다가 세진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정말 절망을 겪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이곳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나라나 단체가 박살이 날 판이다.

그러니 감시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어리 공방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변화라도 알아내기 위해서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또 다른 방어선이 의도하지 않게 어리 공방의 담을 둘러서 만들어졌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