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게슈너, 왔던 곳으로 돌아가다. -- >
"끝까지 비겁하구나. 크르륵!"
털썩!
게슈너를 노려보던 타지난이 쓰러졌다. 허리가 잘려나간 이상 회복 캡슐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마스터 블레이드에 의한 상처는 타지난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타지난의 허리를 잘라 낸 것은 세진이 아니었다.
타지난이 쓰러진 뒤에는 칸엘리가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세진은 고개만 겨우 들어 올리고 칸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타지난이 게슈너 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순간에 나타나서 기습을 가했다. 그리고 그 순간 게슈너 역시 타지난에게 디버프를 걸어서 순간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타지난의 죽음이 된 것이다.
"빚을 갚은 겁니다. 하파트에게 죽을 목숨을 살려 준 빚. 이로서 갚은 거지요."
"하지만..."
"자넷 양께서 좋은 방법을 알려 주시더군요. 테멜 안에서 툴틱을 제거하면 잠깐 동안은 이렇게 기록에 남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말입니다."
칸엘리가 팔을 들어 보이는데 그의 팔뚝에는 툴틱이 없었다. 그는 테멜에서 툴틱을 제거하고 이곳에 와서 타지난을 기습해서 죽인 것이다.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게슈너님을 살릴 방법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칸엘리는 게슈너가 살아날 수 없는 상태란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듯 했다.
"괘,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복수는 해 주신 거로군요. 그것도 제가 죽기... 전에."
세진도 이미 절반은 죽음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회복 캡슐의 효과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몸 안에는 더 이상 상처를 회복시킬 에너지원이 없었다. 지금 말을 이어가는 것도 몸에 퍼져 있는 에테르의 힘이었다. 이곳이 데블 플레인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런 상태에서도 회복 캡슐을 가동시킬 어떤 에너지원을 몸에 투입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데블 플레인은 지구에서 흔한 영양 주사도 호사인 곳이다.
칸엘리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넷에게 게슈너를 양보하고 모습을 감췄다. 다시 테멜에 들어가 툴틱을 장착하고 평소와 같은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괜찮아?"
세진의 곁으로 다가 온 자넷이 곁에 앉으며 물었다.
"괜찮아 보이냐? 그나저나 도와주려면 좀 일찍 도와주지, 이게 뭐냐? 쿨럭!"
"너 어차피 이제 본체로 돌아가야 하잖아."
"하악!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 전에 너 그럼 일부러 칸엘리랑 늦게 온 거야?"
자넷은 대답이 없고 세진은 점차 몸에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지게 춥네. 아, 춥구나."
자넷이 춥다고 중얼거리는 세진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서 품에 안았다.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는 세진이었지만 자넷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좀 괜찮아?"
자넷이 품 속의 세진을 내려다며 물었다.
"이미 감각도 없다. 좀 일찍 왔으면..."
세진은 죽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농담을 했다. 진짜 죽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아는 까닭도 있지만, 진짜로 죽는 순간이라고 해도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생이 끝난 후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호홋. 왜 이 누나의 가슴 볼륨을 느끼고 싶었어?"
자넷도 농담으로 응수한다.
"그래,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 하지만 제일 궁금했던 건..."
"궁금했던 거? 뭔데?"
"니가 왜 이러느냐는 거야."
세진이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뭘?"
"너, 나한테 너무 잘 하거든. 아닌 것 같은데 넌 내가 어지르고 다니는 것을 너무 잘 치워... 잘..."
"그래서? 응? 정신 차리고 말을 마저 해야지. 그래서 어떤데?"
자넷이 정신이 흐려지는 게슈너의 몸을 안은 상태에서 흔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궁금하지. 이 여자가 왜 이럴까..."
"그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런 건 너도 알잖아."
자넷이 숨김없이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그렇지. 그래. 그것 밖에 없는 거지. 이유가 뭐가 있겠어. 좋은데... 좋은데 말이야."
"응. 그래. 그러니까 그런 거야. 그럼 너는 어때? 세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거... 게슈너 말고 세진에게 물어봐. 세진이 대답을 해 줄 거야."
게슈너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감돈다.
"세진? 세진!"
그렇게 게슈너는 자넷의 품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자넷도 잠시 게슈너를 흔들다가 포기하고 게슈너의 몸을 테멜에 넣고 몸을 일으켜서 레트 시로 향했다. 오늘은 레트 시의 라훌족 의원 투표와 개표가 있는 날이었다.
= 아아 돌아왔다. 아웅. 어리 앵무가 세진의 어깨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세진을 보는 사람들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조금 전에 세진이 어리를 불러 어깨에 올리고 뭐라고 하더니 금방 어리가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우우우웅.
"아, 왔다."
정진이는 다른 의미의
'왔다.'
를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우두머리 우렁각시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추정 등급 4등급의 몬스터였다. 아니 3등급 우두머리 몬스터였다. 이제 일행들 모두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절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모두 우두머리 우렁각시에게로 쏠렸다. 저것은 아무리 세진이 나서더라도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세진도 4등급을 넘어서는 몬스터는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도망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 절망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쾅!
그런데 다가오던 우렁각시가 뭔가에 부딪혀서 뒤로 밀려났다. 콰과과과광!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렁각시를 감싸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키이이이익 키이이익.
우두머리 우렁각시가 기괴한 소리를 질렀지만 일행들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세진이 만들어 놓은 에테르 방패 덕분에 우두머리 우렁각시의 음파 공격이 일행에게 닿지 못한 것이다.
투투투툭 투투툭.
갑자기 우두머리 우렁각시의 몸통인 고등 껍질이 깨지면서 작은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세진이 우두머리 우렁각시의 전진을 에테르 방패로 막고, 에테르 붐을 강도를 낮춰서 더뜨리고 이번에는 디버품을 잘게 나눠서 연속으로 시전한 것이다.
세진은 지금 방금 복귀를 해서 이곳 이면 공간에서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힘이 과한 경우도 있고, 모자란 경우도 있다. 모자라긴 하지만 3등급 우두머리는 그나마 아쉬운 김에 세진이 지닌 힘을 시험해 볼 실험체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마스터의 경지를 훌쩍 넘은 세진의 능력으로 부족 코어를 지닌 노란색 등급 몬스터는 식후 해장거리도 되지 않는다.
실제로 데블 플레인에서 본체로 사냥을 다니면서 파란색 부족 코어 몬스터까지 시 시하게 여겼던 세진이었다. 물론 남색 일반 몬스터도 사냥을 했었다.
다만 남색 부족 코어 몬스터는 자넷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아직 세진의 실력으론 무리라고 여겼던 탓일 것이다. 그리고 자넷이 그렇게 판단을 했다면 그 말이 옳은 것을 테고.
어쨌거나 지금 우두머리 우렁각시는 세진이 디버품을 제대로 사용하면, 아니 다른 어떤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날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세진이 잠깐 디버품까지 시험을 해 보더니 이제는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서서 우두머리 우렁각시를 직접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떡배와 선도일 등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음흉한 사람이 숨기고 있던 능력을 꺼낸 거겠지."
"으윽. 그건 또 뭔 소립니까?"
김형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며 떡배에게 물었다.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저 양반 속을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죽을 고비는 확실하게 넘긴 것 같으니까 다행이지. 아구구 아주 죽는 줄 알았네."
떡배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저도 지금 몸이 말이 아닙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제대로 앉아서 에테르를 좀 받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형일이 죽는 소리를 했다.
"아, 육체 능력은 그렇게 하면 회복 속도도 빠르지. 읏차. 그려. 이제 좀 나은가?"
떡배가 힘들게 김형일을 일으켜 앉히더니 묻는다.
"형님도 참, 그게 금방 그렇게 되요? 좀 진득하니 기다려요. 지금 겨우 앉혀 놓고. 아, 저기 세진님은 일 끝낸 모양이네요."
모두의 시선이 우두머리 우렁각시에게 향하는데 우렁각시는 벌써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땅에 널려 있었다.
"그럼 이제 이면 공간이 무너지는 건가요?"
"아닐 수도 있고."
정진이가 김박사를 간호하다가 묻는 말에 떡배가 툭하니 대꾸를 한다.
그런 중에도 선도일의 시선은 세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선도일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세진의 마스터 블레이드의 흔적을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혹시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면 공간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진은 우두머리 우렁각시에게서 코어를 얻은 후에 일행들이 몸을 추스르자 곧바로 이면 공간 유지 코어를 찾아서 회수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은 오산시 동쪽의 작은 산기슭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진은 그 상태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김박사님."
세진이 김혜인 박사를 불렀다.
"네?"
"이곳, 좀 이상했지요? 2등급 몬스터 지역에서 이면 공간에 들어가니까 2등급과 3등급 몬스터가 섞여서 나왔고, 그런 중에 우두머리는 3등급이 나왔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등급이 혼합된 몬스터 지역은 간혹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긴 2등급으로만 알려졌다는 거죠. 정말 여기서 3등급 몬스터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을까요?"
"그럼 이미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릴 유인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거야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이틀 숨어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당연히 외부와의 통화는 금지입니다. 선도일씨, 스마트폰도 꺼 주십시오."
세진은 일행들에게 그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리와 함께 정보 확인을 시작했다. 이번 일의 시작은 기린 그룹의 의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린 그룹을 상대로 한 정보 수집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몬스터 영역이 사라진 것이 알려지자 기린 그룹이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 고위급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세진이 원하는 정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정보들을 통해서 결국 이번에도 석유 카르텔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석성의 특별팀도 개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석유 카르텔에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혼합 등급형의 몬스터 지역 정보를 통제하고 그걸 알지 못하는 세진 일행을 기린 그룹을 통해서 끌어 들인 것이 전부였다. 정말 운이 좋게 그런 혼합 등급 몬스터 지역이 대한민국에 생긴 것이고 그걸 적정하게 이용한 것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진을 노렸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석성의 특별팀도 자신들의 실패를 숨기기 위해서 입을 다물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해해 주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세진 일행이 이면 공간으로 들어 가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밀을 함구하고 있었던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확인을 마친 세진이 당장에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일행들 모두는 다시 어리 공방으로 돌아갔고, 곧바로 세진의 공식 적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기린 그룹과 석성 그룹이 벗에 대한 적대 행위를 하였으니 이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겠다는 짧은 내용이었지만 대한민국은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즉각 정부에서 나서서 벗의 자제를 요청하고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적법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 시간 이미 서울에 있던 기린 그룹의 본사 건물에는 대피 명령이 떨어졌다.
본사 건물이 붕괴될 테니 서둘러 건물 밖으로 대피하라는 벗의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확답을 할 수 없었지만, 폭탄이 설치 되었다는 장난 전화에도 건물을 비워야 하는 것이 테러에 대한 대처 요령이다. 그런데 벗이 나선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