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33화 (133/298)

< -- 게슈너, 왔던 곳으로 돌아가다. -- >

"결국 가는 거야? 너, 이길 생각은 있는 거냐?"

자넷이 상점을 나서려는 세진에게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최선을 다해서 이길 생각이다. 뭐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 알았다. 그럼 만약 실패하면 제이비아로 갈 거야?"

"그래야지. 그런데 너 지금 에텔론 없잖아."

"에텔론?"

"너 그거 전부다 몬스터 코어로 바꿔서 테멜에 쌓아 둔 거잖아. 너 테멜에서 툴틱 제거한 후로 한 번도 안 썼거든?"

"아, 그렇구나. 난 내가 무척 부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나 거지였어?"

"그러니까 타지난과 약속 장소 정하고 나서 툴틱 다시 착용하고 에텔론 상점에서 정산한 후에 타지난을 만나. 그래야지 지금까지 벌어 놓은 에텔론을 써 먹지. 안 그러면 그냥 날린다?"

"어차피 어리가 가지고 있는 건데 뭐 무슨 일이야 있겠어?"

"너 그냥 죽으면 기록이 없잖아. 그런데 훌쩍 헌터룸에 나타나 봐라. 여기서 어리를 어떻게 찾을 거야? 응?"

"아, 그런가?"

"죽을 생각을 했으면 어리도 정산도 하고 테멜도 헌터룸에 가져다 놓고 그래야지. 이대로 훌훌 나가서 타지난에게 죽으면 어쩌자고?"

세진은 자넷의 타막에 머리만 긁었다.

"며칠 여유를 달라기에 도망이라도 가려는가 싶었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도망을 갔으면, 당신이 나를 그냥 뒀을까?"

"허허, 나도 이젠 늙고 기력이 달려. 거기다가 매사에 의욕도 없지. 그래서 아마 네가 도망을 갔다면 몇 곳에 화풀이만 하고 돌아갔을 거야. 아마도."

"그 몇 곳이 내 상점과 내 점원과 내 지인들이란 것이 문제겠지. 늙은이 성격에 화풀이를 아무곳에나 분이 풀릴 때까지 하고는 발광을 하다 갔겠지."

"허허허. 내가 나이가 들면서는 좀처럼 그런 험한 말을 듣지 못했지. 그런데 막상 들으니 신선하긴 한데 기분이 좋지는 않군."

"테카의 허울을 쓰고 살았던 것이 자랑인가? 웃기지도 않는 우월주의에 빠져서 되지도 않는 주장으로 같은 동족을 착취한 것이?"

"같은 동족?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아니야. 아니 우리들은 영혼이 없는 것들은 동족으로 취급하지 않아. 우리들은 생체 에테르바디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타지난은 라훌들을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있었다.

"하! 그래? 그렇겠지. 그랬으니 라훌들을 그렇게 착취하면서도 스스로 테카니 뭐니  하면서 거들먹거리고 살았겠지. 하지만 이젠 어쩌지? 테카는 이제 없어. 이제는 겨우 현자의 가르침을 쫓아가 엎드려 과거의 영광을 구걸하는 이들만 남았을 뿐이지. 테카들이 몰려와서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열성적으로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 내가 모를 것 같은가? 그렇게 현자님의 가르침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쥐려는 더러운 속셈을?"

"그것까지 꿰뚫어 봤던가?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떻게 할 건가? 설마 테카들의 정체, 이전부터 해 왔던 일들을 널리 알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지는 않을 터?"

타지난은 라훌족들 사이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질 수 있음을 게슈너에게 상기시켰다. 그것은 지금 한 발 뒤로 물러난 연장자들이 마지막까지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이고, 만약 그렇게 되면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동원해서 저항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왜?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려지게 될 일이야. 두라, 무라, 누라들이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것 같은데? 나나 네스토가 나서서 그 일을 까발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혼란을 피하기 위함일 뿐이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될 거야."

"그래도 시간은 벌 수 있지. 그리고 우리 테카들을 그 사이에 라훌 사이로 스며들게 될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

세진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말하는 타지난에게 자넷이 의원이 되어 가장 먼저 할 일이 인구 조사와 등록이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인구등록이 끝나고 나면 결국 테카들은 그들의 멍에를 쉽게 벗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니 타지난이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 동정심이 생기기까지 하는 세진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당신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지?"

세진이 드디어 용건을 물었다.

언제까지나 변죽만 울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사후 처리까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제 원했던 대로 타지난과 멋지게 한 판 붙어 보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 시간 게슈너의 상점은 이미 깨끗하게 철수를 했을 것이고, 게슈너 경비대는 자넷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 내가 자넬 찾은 이유. 뭐 서로 아는 일 아닌가? 자네가 우리 테카들을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이전에 이곳 레트에서 일어난 실종에 대해서도 알겠지? 그 라하라는 이 말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세진은 라하에 대해서 안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타지난은 세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세진을 노려봤다.

"알기는 알지만 그 실종과는 상관이 없다는 투로군?"

"그게 사실이니까."

세진은 라하에 대해선 철저하게 발뺌을 했다.

"그럼 하파트의 죽음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하겠군."

타지난이 조금씩 기세를 끌어 올리며 세진에게 물었다.

"하파트? 칸엘리와 싸우다가 죽었던 그 마스터? 그 자 역시 테카였지? 그래, 그의 죽음에 대해선 나도 알지."

"그것 역시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거냐?"

"아, 그건 아니지. 난 테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우리 라훌의 착취자들. 그런 놈 은 죽어도 싸지."

"그래서 그랬나? 마스터의 대결에 끼어들어 비겁하게 암습을 했어?"

타지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숲의 작은 공터에는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워워.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시나? 암습? 뭐 그거야 하파트의 특기 아니었나? 호위들로 하여금 칸엘리를 기습하게 하고, 곧바로 칸엘리에게 정신 공격까지 했지. 아주 더러운 놈이었어."

"으득. 싸움에 정도가 있다더냐?"

"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싸움에 정도가 없으니까 내가 하파트의 뒤통수를 친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라고. 처음부터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언제나 싸움에 끼어들 자격이 있었거든. 싸움이 라훌족과 유저 헌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광장에서 있던 모두가 휘말린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같은 라훌이 아니라 유저 헌터의 편을 들 수 있단 말이냐!"

"지랄도 풍년이다. 니가 그랬잖아. 너희 테가는 라훌이 아니라고. 그런데 지금은 같 은 라훌을 안 도왔다고 입에 거품 무는 거냐? 너도 지금 내 말을 들으니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지? 그래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지. 사실 난 니가 워낙 뻔뻔해서 내 말을 듣고도 얼굴색도 안 변하면 어쩌나 했어."

세진은 평소와 달리 말을 앞세워서 타지난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더러운 수작이구나. 이렇게 해서 하파트도 암습을 했느냐?"

"어라? 알아차린 거야? 대단한데?"

세진은 타지난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타지난의 몸으로 흘러들어간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폭주시켜서 타지난에게 디버프를 걸었다.

"흐읍. 이따위 잔재주로 나를 어쩔 수 있을 것 같으냐?"

타지난은 세진의 그런 공격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그것도 이전까지 몬스터나 라하가 했던 것처럼 생체 에테르를 폭발적으로 뿜어서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털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몸 안에서 제압하는 방식을 썼다.

'역시 마스터 상급이란 건가? 디버프를 저렇게 간단하게?'

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실제로 타지난도 속으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몸안에 눌러 놓은 디버프 기반 에테르 때문에 본래 전력의 10% 가까이가 묶였다. 거기다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막기 위해서 또 그 정도의 전력을 투자해야 했다.

그러니 평소 능력의 80%로 게슈너를 상대하게 된 것이다.

'그래봐야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놈일 뿐. 애초에 내 상대가 아니다.'

타지난은 그렇게 판단하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다 놀았으니 이젠 죽어야 할 때다. 게슈너."

타지난의 검에서는 마스터의 상징인 마스터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게슈너의 검에 맺힌 익스퍼트 블레이드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지랄 저렇게 마스터 블레이드를 뽑아내면서도 전혀 힘든 표정이 아니잖아. 그럼 내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막는 것이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다는 말이야?'

세진은 싸우기도 전부터 살짝 기가 죽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죽자고 온 길, 망설일 것은 없었다.

세진은 정신 능력과 육체 능력 모두를 동원해서 타지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타지난은 그런 세진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하나하나 받아 내면서 심심찮게 세진의 몸에 검상을 남겼다.

상처는 빠르게 아문다. 영구 회복 캡슐의 효과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진 않다. 더구나 마스터 블레이드에 의한 상처는 그것을 완전하게 회복하는데 다른 상처에 비해서 들어가는 수고가 더 많기 마련이다.

회복 캡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체력을 갉아 먹는다.

점점 회복 캡슐이 사용한 에너지원이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서 세진의 몸은 점차 회복이 느려지고 또 에테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다.

회복 캡슐은 에테르를 에너지로 삼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세진은 에테르를 육체적인 능력에 쓰지 못하고 정신 능력에 더 많이 쓰게 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타지난과 주고받는 공방은 세진을 크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아니 타지난이 세진에게 그런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공격을 퍼붓던 세진이 몇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사실 그 정도 거리야 마스터인 타지난이 아니라 세진이라도 별 의미가 없는 거리다. 그럼에도 걸음을 뒤로 물린 것은 공격 의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한 표시였을 뿐이다.

"무얼 묻는 거지?"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는가 물었다."

"크크크. 보면 모르나? 가지고 노는 거지. 얼마나 어디까지 발악을 하는지 보는 거야. 그러면서 점점 실력이 늘고 또 익숙해지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느끼고 절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거지. 난 그걸 원하는 거야."

"그럼 좀 쉬었다 해도 되나? 체력이 없으니 회복도 느리고 뭘 해 보려고해도 안 되거 든?"

"하하하. 게슈너, 너는 내가 그렇게 인자한 사람으로 보였나? 이제 재주를 다 부렸다면, 그래서 나를 재미있게 해 줄 것이 더 남지 않았다면 죽어야지. 그리고 죽기 싫다면 당연히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응? 무슨 말인지 알겠나?"

타지난은 세진에게 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끝까지 덤비다가 결국 지쳐서 쓰러지면 마지막 순간 절망에 잠긴 눈빛을 보며 목을 잘라 주리라 마음먹고 있을 뿐이었다.

세진은 타지난의 속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쉬기는 뭘 쉬나? 어디 끝까지 해 보자. 뭐 하나라도 얻으면서 죽으면 그게 남는 장사지.'

세진은 다시 타지난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우리 테카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우리 테카들의 몰락에 깊게 관여한 것이 잘못이다. 네 재주가 무척 아쉽지만 나는 너를 죽일 것이고, 또 너와 관계된 모든 것을 지울 것이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니까."

타지난은 세진의 공격을 막고, 피하고, 흘리고, 되받아쳤다. 그러면서 조금씩 날카로워지는 세진의 정신 공격을 느끼며 세진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성장을 해도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더 크게 성장해서 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지금 타지난이 게슈너를 상대하는 것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타지난은 세진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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