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31화 (131/298)

< -- 테카, 두라, 무라, 누라. -- >

"그 현자의 가르침이 참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참입니까?"

한 젊은이의 질문이 회의장에 울리고 일순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 젊은 테카는 순수하게 의문을 풀고자 한 것이지만 지금 그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테카들의 향후 행동은 근본부터 달라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노회한 테카들 몇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테카나 두라, 무라, 누라의 계급 구분은 사실상 테카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라훌을 암중에서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거짓임을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결국 연장자로서 테카를 이끄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종종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유저 헌터나 라훌족이 있으면 그들을 정리하는 일을 연장자들이 모여서 결정하고 실행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현 책임자는 독립군의 강경파 수장인 펠릭스인 것이다.

"젊은 테카여 묻겠다. 너는 네가 테카가 아닌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 그 삶은 살 자신이 있느냐?"

일곱 연장자 중에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젊은 테카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아니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진실이야 어떠하건 상관없이 테카로 살기 위해서는 새로 나타난 현자의 가르침은 묻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서 테카, 두가, 무라, 누라의 구별은 없어질 것이고 테카로서 누리던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실 방법은 마땅치 않다. 이미 현자의 가르침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네스토가 끼어들어서 그것을 전파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그러니 방법이 있다면 오직 하나 뿐이다. 레트 시를 지운다. 그 뒤에 레트시 밖에서 현자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은 하나씩 찾아서 처치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숨기고 있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일순간에 일을 처리한다. 그래서 여기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나서서 레트시를 정리하기 위해서."

펠릭스가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씀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이 전부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레트 시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왜? 겁이 나나?"

중년의 테카가 묻는 말에 펠릭스가 되물었다.

"아니. 겁이 난다기 보다는."

"여기 모인 모두는 헌터 교육을 받아 헌터가 되었거나 혹은 이번에 새로 전해진 에테르 수련법을 익힌 이들이다. 이런 인원이 천 명이면 기습을 한다고 했을 때, 레트 시를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번 싸움에서 유저 헌터들은 피해야 한다. 그들만 끼어들지 않으면 레트 시를 지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절대 아니다. 우리도 이제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레트 시와 그 부속 마을들에 사는 라훌족의 수가 모두 합쳐서 몇이나 되는지 알고 하는 말씀입니까? 거기에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살? 펠릭스 테카 당신 미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테카인 이유는 우리가 다른 라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훌족을 어떻게 한다고요? 그러고도 당신이 테카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몇몇이 펠릭스의 말에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그들은 이전의 테카들과 달리 나이가 제법 있는 이들이었다. 다시 이야기하면 테카 계급에서도 발언권이 제법 되는 이들이란 뜻이다.

"테카이기 위해서! 우리가 테카로 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펠릭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결국 그런 것이 아닌가. 더러운 욕심을 위해서 지금까지 두르고 있던 가면을 벗자는 말. 그런 후에는 다시 가면을 쓰고 고귀한 영혼을 지닌 테카라며 두라와 무라 누라를 눈 아래로 보겠지. 아, 더럽구나. 테카여."

군중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탄식했다. 그 음성이 수많은 테카들의 가슴을 때렸다.

"현자가 그랬다지? 사는 것, 삶의 모습이 영혼의 격에도 영향을 준다고? 그럼 우리가 여기 모여서 이렇게 논의를 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지금처럼 욕심에 미쳐 동족을 살해할 일에 대해서 입에 올리는 것도 모두가 그러하겠지? 아, 나는 지금껏 내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하다 여겼더니 아니었던 것인가?"

또 다른 탄식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테카들은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장자들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은 결론이 날 것이고, 그 결론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의 승리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장자 무리의 작은 오판이었다.

그들은 라훌족이 얼마나 영혼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잠시 잊은 것이다. 그들이 테카란 계급에 숨겨진 이면을 읽게 된 이후로 영혼을 수단으로 삼다보니 그렇지 않은 이들, 영혼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의 사고 방식에서 너무 멀어진 것이다.

라훌족은 그것이 테카라고 할지라도 영혼에 대해서는 치열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영혼이 더럽혀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이들이 또 테카들이다. 그들은 날 때부터 완전한 영혼의 주인임을 교육받고 또 그 영혼의 가치를 존중받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영혼의 타락이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죄악이었다.

"더럽구나. 타락한 영혼들이여. 결국 이 자리를 만든 것이 너희 늙은 것들의 죄를 숨기고 또 우리들로 하여금 너희와 같이 비루한 영혼이 되게 함이냐? 타락자!"

"더러운 영혼!"

"저들을 벌하라. 그리하여 우리의 순수를 보호하자!"

삽시간이었다. 테카들은 조금씩 연장자들을 성토하기 시작하더니 금방 잡아 죽이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타니난이나 펠릭스를 비롯한 연장자 무리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무척 분노했다. 감히 어린 후손들이 선조들을 향해서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테카들이 암중으로 이어져 오면서 단 한 번도 핏줄 사이의 항명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항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감히!"

콰과광!

성질 급한 펠릭스가 연장자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부수면서 벌떡 일어났다.

"너희가 지금 우리에게 대항하느냐? 너희가 우리의 피와 영혼에서 나온 것을 모른단  말이냐? 감히 그러한데 너희가!"

"영혼은 제스스로 찾아 들고, 그 영혼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연장자들의 의무.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지금은 극악한 타락의 길로 목줄을 쥐고 가고 있소. 그런데 우리가 어찌 당신들을 따를 수 있단 말입니까?"

펠릭스가 에테르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군중을 제압하고자 했지만 곧 이어서 군중 중의 누군가가 펠릭스의 에테르에 저항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억지로 저항하다 속을 다친 것이 분명했다. 물론 테카라면 모두가 영구 회복 캡슐을 먹었을 테니 곧 나을 테지만 그렇게 피를 흐리며 저항하는 모습만으로도 많은 테카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물러가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너희가 어찌 우리를 이끈단 말이냐. 죽어도 내 영혼의 타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희의 잣대를 우리에게 대지 말아라. 자, 우린 떠납시다. 더 이상 저들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소. 혹여 테카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이 온전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오."

"맞습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군중심리는 무서웠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테카의 지도자들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이이, 이게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찌! 어찌 이런 일이!"

타지난이 부들부들 떨면서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죽여버린다. 다 죽여 버린다! 현자고 네스토고 모두 죽인다. 그리고 이후로 현자의 가르침이니 뭐니 떠드는 것들은 테카라도 모두 죽인다. 이젠 숨길 것도 없다."

펠릭스가 금방이라도 테멜 밖으로 달려 나갈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그것이 말 뿐임을 알고 있었다. 이제 현자를 죽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흐음. 이보게 라지헤니."

한 연장자가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군중들이 떠난 후에도 남아 있던 테카들 중에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가. 가서 테카들을 이끌어. 이제부터 테카들은 철저하게 현자의 수족이 되어야 해. 그래서 테카들의 영혼이 다른 라훌족의 영혼보다 훨씬 더 격이 높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 아니 전부는 못되어도 비율적으로 수가 많아야겠지. 그리하여 현자의 제일 가까운 이들을 테카라고 부르게 만들어. 이름은 중요한 것이야. 그리하여 라훌 족의 테카는 여전히 가장 높은 곳에 있도록 만들어.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언젠가는 테카가 곧 라훌족 영혼의 가장 높은 위치라고 모두가 알게 하고, 우리 혈족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다음 대의 연장자들을 모두 이끌고 가. 그래서 다시 시작해. 몇 백 년이나 몇 천 년이나 상관없어. 이대로 몰락해서 사라질 수는 없음이니."

"알겠습니다."

라지헤니라 불린 장년인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을 모두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은 다시는 지금의 연장자들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테카의 번성에 있었으니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서 새로운 형태로 테카를 이끌 것이다. 지금 테멜 밖으로 몰려나간 테카들은 구심점이 시원치 않으니 라지헤니가 데리고 나간 이들이 일관된 목표를 제시하고 이끌면 모두가 그들을 따르게 될 것이다. 펠릭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또 그것이 최선임을 인정하 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제 테카들이 모두 영혼을 수련하는 수련자가 되겠군. 하하하. 재미있구나. 가장 존귀한 테카들이 이제는 몸의 괴로움을 참으면 영혼을 수련하는 자로 거듭나게 생겼어. 하하핫. 하하하하."

타지난은 웃는 듯, 우는 듯한 소리를 그렇게 한참을 이어갔다.

"이제 우리는?"

펠릭스가 아까 라지헤니를 보냈던 연장자에게 물었다.

"늙은이들이 할 일이 뭐가 있나? 그저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살면 그만이지. 살기 싫으면 말아도 그만이고. 하지만 괜히 현자를 건드는 일은 말아야지. 정 화가 나면 네스토의 목이라도 자르거나."

"하하하. 지금 상황에서 네스토의 목을 잘라서 뭐에 쓰게? 이거 정말 허탈하군.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니 말이야."

"우린 우리 후손들의 생각도 제대로 몰랐어. 솔직히 나는 모두가 몰려가서 레트를 지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면서 우리 테카의 수도 조금 줄이고 말이야. 너무 많은 것은 귀하지 않으니까."

"타지난. 타지난. 넌 너무 음흉해. 나보다 네가 더 못 된 놈인데 말이야. 욕은 내가 다 먹지."

펠릭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리 되었습니다."

"그래요? 이후에는 어떻게 하기로 했죠?"

"라지헤니가 테카들을 내세워서 사상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미흡한 부분들을 그들이 알아서 채워갈 것입니다. 일종의 경전을 그들에게 만들게 할 생각입니다."

"테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는 거 아닌가요?"

"테카들이 삼, 네스토가 삼, 일반 라훌이 삼, 그리고 자넷님의 수족이 일입니다. 이후에 자넷님의 수족들이 빠지고 나면 결국 남은 일을 두고 셋이 싸울 겁니다. 그러다가 언제 어떻게 그들의 세력 비율이 다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정도면  균형을 잘 맞춘 거리고 생각을 합니다만."

"흐응. 그런가요? 그나저나 세진이 이 소식을 들으면 많이 허탈해 할 텐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타지난은 레트 시로 올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서 레트 시를 선택했습니다."

"설마?"

"이제 세진님도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습니까. 게슈너의 탈을 벗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어? 그런데 어쩐 일로 세진에게 님이라고 하죠?"

"이전까진 그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시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자넷님께서 그때 보다는 훨씬 높이 두고 계시니 저도 마땅히 그에 맞춰서 대우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세바스. 세바스는 정말로 내가 세진에게 그런 가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는 걸 세바스가 더 잘 아는 모양이네요? 뭐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그래서 그렇습니다. 자넷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신다고 했으면 또 달랐을 겁니다."

"그렇군요."

자넷은 세바스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옅은 그 미소를 보는 세바스도 살짝 웃음기가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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